[재준]이는 나의 뜬금없는 부탁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왠지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슬쩍 지어보였다.
[띠리리~]
"응..나여...몇번을 말혀야 알아처묵겄냐. 시뀌야!!!..상중인거 몰라 이색히야??..
니가 알아서 챙기라고..이 씨벌보지야~!!!..."
[탁!!!...]
"에이..씨벌.. 호로색히덜...."
[띠리리~]
"네.형님.... 아닙니다.형님...내일입니다.형님.....아닙니다.형님...알겄습니다.형님..."
모든게 내뜻대로 되지 않고.. 언제나 최악의 길로만 걸어온 내 인생이었으니까..
어쩌면.. 누나는 나를 만나기전부터.. [성태]라는 인간을 만나왔고.. 그 남자에게 채워지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채우기위해.. 나를 만났을 지도 모르는 거였다.
정말 그랬을까???
새삼.. 오래전.. 누나를 만나러 목포로 갔을 때.. 하당의 갓바위공원에서 나에게
냉대를 했던 [민서]누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민서]누나였지만.. 누나와 나와의 어떤 결실이었다고 생각하고
[서희]를 슬픈 누나가 나에게 남긴 희망이자.. 또다른 목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이제는 깊은 허탈감마저 밀려왔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서 오신다는 손님들 챙겨야 허니께.. 성님은 더 드시다 가쇼.."
"아.....그래...재준아..."
[재준]이가 일어나 핸드폰을 귀에다 댄 채 접객실쪽으로 향한다.
접객실입구쪽..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순간 긴장하며 도열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분향소안 [서희]를 바라보았고 [서희]는 나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무언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서희]에게 다가가자 [서희]가 천천히 일어났다.
영정사진속 [민서]누나의 얼굴이 나와 [서희]의 가운데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듯 하다.
"선생님.. 갈께..."
"............"
"어머니.. 잘 모시고.. 나중에 보자.. 알았지??.."
"..........."
대답없는 [서희]와 [민서]누나를 남겨두고 뒤를 돌아서려 하자 [서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선생님!!..."
".....응??.."
"...물어볼께..있어서요.."
"..응..말해........"
"저....저희 삼촌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 응.. 그냥.. 뭐.. 이런저런..."
"......저 있잖아요... 그냥이요... 저..."
"....말해..괜찮으니까..."
"..그냥... 두분이서 나눈얘기... 아무한테도 얘기 안해주시면..해서요..."
"...왜??......"
".....그..그냥이요..."
"혹시...니네 아빠가..아빠가 교도소에 있다는게 챙피해서??..."
"....!!......."
"...엄연히 살아계신 아빠인데...그게 그렇게 챙피했으면 차라리 외국에 가계신다고
하면 되는걸 가지고.. 뭐?? 낳기전에 돌아가셨다고??....."
[현주]와 나의 사이를 모르는 [서희]는 휘경여고 학적기록사항에 적힌 내용을
내가 얘기하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하는듯 해 보였다.
순간 [아차~!!]하며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을 돌리고 [서희]와의 대화를
서둘러 마감을 지어버렸다.
"아무리 챙피해도 그렇지..!! 흐음..!!.. 하여간.. 알았다... 알았어...."
"............."
여지껏 나도 모르게 격앙된 어조의 말투를.. [서희]에게 내뱉고 있었나보다.
[서희]가 동그란 두눈으로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민서]누나와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얘깃거리만
잔뜩 들어서인지.. 허탈감과 왠지 모를 상실감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훗... 서희는.. 그냥.. 김민서의 딸이었군......'
[띠리리리~... 띠리리리~]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 액정화면에 [현주]의 이름이 적혀있다.
차에 시동을 켜고.. 무겁게 악셀을 밟았다.
마치 어제와 오늘.. 잠깐동안 꿈을 꾼듯 하다.
모든게 꿈이었으면..했지만.. 그저 씁쓰름한 내 인생의 현실일 뿐이다.
[김민서]는 그렇게 나에게 떠나가 버렸다.
'허무하고.. 바보스럽구나..'
[띠리리리...띠리리리...띠리리리...띠리리리...]
몽롱한 꿈속 사색을 느끼며 운전을 하는데 자꾸 귀찮게 울어대는 핸드폰을
차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리고만 싶을 뿐이다.
[띠리리리...띠리리리...]
"여부세요..."
[너 어디야??...]
"그냥.. 밖에 잠깐..."
[머야???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않고..나.. 아까부터 니네집에 와있었단 말이야..]
"나 집에 일찍 못가......"
[....뭐????....]
"미안해.. 나중에 가서 얘기할께.."
[..............]
"현주야??....."
[.............]
"............."
[.............]
휴대폰 너머로 [현주]의 울먹임이 또 들려왔다.
지겹다.. 그리고 이런 [현주]의 답답한 마음은 언제나 나를 지치게 만든다.
다음날..
잠에서 눈을 뜨니.. 왠 모텔안이다.
숙취로 인한 어지러움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제 얼마나 술을 퍼마셨는지.. 머리가 무거울 뿐이다.
흐릿한 기억으로 포장마차에서 미친놈처럼 술을 퍼 마시다가
그만.. 택시를 잡아타기전 삐끼에 걸려들어..유흥업소를 가게 되었는지.. 룸싸롱안에서 업소아가씨와
미친듯 노래부르며 놀던 기억과.. 이곳에서.. [먼저갈께..옵빠~]라는 그 아가씨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으휴....... 씨이~발..... 이런 실수를...!!...."
서둘러 옷가지를 챙겨입고 모텔방문을 나섰다.
지난 모든걸 한꺼번에 다 털어버리기 위해서 술을 택했고.. 진짜 원없이 마셔본것
같았지만..나에게 돌아온건.. [현주]에 대한 미안함과.. 자켓안 구깃한 카드전표뿐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김민서]는 저세상으로 가버렸고...
[김서희]는 내 딸이 아니었고......
며칠후
서해안 고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시원스레 서해대교위를 달리고 있다.
추석전 이맘때쯔음.. 올해도 어김없이 큰집으로 벌초를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전화연락을 받았고 예년처럼 추석때 내려갈껀데 왜 가야 하냐며 짜증섞인 말투를
수화기 너머로 내뱉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고모들이 태어나셨고 큰아버지가
큰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큰집이다.
네살즈음 용접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가기전까지
살았다는 곳.
어릴적부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추석과 설날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삿날..
일년에 두세번씩 그렇게 이곳을 찾았었다.
길다란 산자락 아래로 넓은 저수지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져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그리고 나즈막한 야산아래에는 큰집앞 연못과 엉클린 머리칼을 길게 드리운
수양버드나무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떠오르는 얼굴...
김민서..
[민서]..
너무 보고싶다.
'젠장할...결국 이렇게 또 보게 되는거였군.......'
무척이나 아름다운 두눈..
웃을때 유별나게 커다란 덧니와 보조개가 귀여웠던 여자..
그리고 너무나 비쩍 말랐던 몸매..
검고 길다란 생머리..
나보다 두살터울의 [민서]누나는 내가 아주 어릴적 갓난아기때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우리 작은아버지의 큰딸이었다.
운전을 하며 담배를 입에 하나 문다.
어쩌면 지금의 이 벌초가 나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연하게 맘을 다잡고 힘차게 악셀을 밟아 어릴적 누나와의 추억들이 녹아스며든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해 후 돌아가셨고.. 큰어머니는 홀로 지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편찮으셔서 이미 큰집의 큰형이 큰 병원이 있는 광주의 집으로 모셔갔다.
내후년쯤.. 가족납골당을 만들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조상님들을 한곳에 모신다는
계획은 있긴 한데..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직 없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휴대폰의 액정을 보니 [현주]다.
"여보세요.."
[뭐냐? 너??...]
"나?? 김희준이다...."
[지금 장난해??.. 너 어디야??..]
"전라남도 함평군..손불면.."
[월천리..에 벌초하러 간다고??......]
"하하..이번주 아니면 안될꺼 같아서...."
[이번주 약속 펑크내면 죽는다 그랬지??..]
"하여간 운전중이니까.. 끊어.. 이따 도착하면 전화할께.."
[됐어..!!.. 전화도 하지마??...]
내 친구.. 어느덧 조심스레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내애인.. [최현주]
정말 징글징글한 여자이다.
노처녀로 늙어가는게 뭐가 그리도 좋다고 시집도 안가고 여지껏 나를 괴롭히고 있는건지..
나란 인간은 어쩔수 없다해도.. [현주]는 나만 바라보다 지금의 저 지경이 되어 있다는게
너무 불쌍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역시.. 내맘대로.. 내뜻대로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이미 노처녀의 습성이 몸에 배어 버려.. 지금의 상황을 그냥 즐기며 혼자 사는게
편해서 저러는걸지.. 또 누가 알겠는가..
따지고보면 [현주]는 [민서]누나와 나의 잘못된 사랑의 희생양을 스스로 자처한
멍청한 녀석이다.
그리고 참 웃긴 녀석이다.
이번 벌초만 끝내고 올라가면 꼭 [현주]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결혼을 하고만 싶다.
'그래.. 최현주.. 너랑 나랑은 잘살수 있을꺼야.. 우리 행복하자..'
어느덧 큰집에 도착했다.
큰집의 남아도는 텃밭을 세작하는 이웃 농가에서 그나마 관리를 해주어서 그런지
주인없는 큰집은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담배를 하나 물고.. 고추 밭고랑을 뛰어 넘어 소나무 언덕으로 향한다.
참.. 간만에 이곳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저멀리 보이는 우거진 갈대숲과 드넓은 저수지위로 가을의 금빛햇살이 반짝거린다.
[민서]누나와 나와의 사랑을 지켜봤던 소나무..
그리고.. 그 아래 시든 국화한다발...
[서희]가 이곳에 왔었던게 분명하다.
'결국..예감대로 여기였군...그래~김민서.. 너는 나를 사랑했었던게 맞아...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이곳에 오기전 [재준]이 녀석에게 전해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긴가민가.. 무척이나 심란했었는데.. 왠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꼭..
지금은 널 만나러 가고 싶어도.. 눈에 밟히는 녀석이 있어서 못간다.. 이해해줘라..'
수줍게 우리를 바라보던 야심한 초승달 아래의 이 언덕위에서 [김민서]와 함께
뜨겁게 타올랐던 섹스..
그리고 너무나 철없었지만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들..
씁쓰름한 기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게으른 민준이형은 분명히 또 이번 벌초에 안올것 같은데.....'
그때였다.
"선생님..??..."
"......!!!...."
뒤를 돌아다보니.. [서희]가 놀란 두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전 이곳에 수목장을 하러 다녀갔을 녀석이 아직까지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지만.. 내가 여기에 왔다는걸 이녀석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순간.. 난감하기만
했다.
"...선생님...여기.. 어쩐일로..??..."
"아니..!!.... 너야 말로.. 여긴 왜??...."
[서희]와 함께 소나무 언덕 아래에 앉아 머나먼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평소 말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묻어 드렸어요.."
"....그랬구나..."
"호호... 흐음... 엄마랑 선생님이랑.. 같은 동네 사셨어요??..."
"하하... 뭐.. 나는 여기서 태어나기만 했지.. 사실 서울에서만 자라서..
니네 어머니 전혀 몰랐지.. 아마.. 니네 어머니도 나를 전혀 모르실꺼야.."
"..........."
"근데.. 너 왜 안올라가고.. 여지껏 여기에 있었냐??.."
"어차피.. 이번주까지 학교 안가도 되는데요.. 그냥.. 혼자 올라가 있기도 그렇고 해서요.."
"그럼.. 저 밑에 집에서 계속 혼자 잔거였어???..."
"그저께까지는 삼촌이랑 같이 있었는데... 어제부터는 혼자있었어요.."
"하하..그랬구나..너가 자던..니네 엄마 큰집..그집에서 예초기랑 낫좀 얻으려 했었는데
잘됐네....."
[서희]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제 [현주]를 통해 전해들은 얘기로는 우악스럽게 생긴 [서희]네 삼촌이 학교로 들이닥쳐
[서희]를 목포쪽으로 전학을 시키겠다며 서류절차를 밟아갔다는 것이다.
[서희]는 아마 그런문제로 이곳에 혼자 남아 있는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해서 큰집을 혼자 지켰던 [서희]의 의아스러운 눈빛을 피해 농기구가 쌓여있는
창고안을 뒤적거려 예초기와 갈퀴, 낫 등을 챙겼다.
장비를 챙겨 산으로 오르려 하자 [서희]가 괜찮다고 해도 자꾸 돕겠다며 따라 나선다.
뒷산 중턱까지 올라야 하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데.. 심심해서 그런다는데
궂이 말릴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수풀을 해집고 바위위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서희]가 난감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여 손을 뻗어 [서희]를 잡아 올려주었다.
이동네 야산들은 높이가 낮은데반해 인적이 드물어 산길이 전혀 없다.
[서희]는 엄마의 상을 치루느라 생고생을 했을텐데 비교적 활발한 표정이다.
내가 오기전까지 무척 외롭고 심심했나 보다.
덮수룩한 잡초가 수북히 덮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조상님묘-1 이 눈앞에 나타났다.
[부따따따~ 부르릉~!!!!]
"서희야!!... 돌튀니까.. 절루 가..!!.."
"네에??... 안들려요..."
"돌튀니까..!!.. 절루 가라고..!!..."
"네!!!...."
예초기의 커팅날이 힘차게 돌아가며 잡초들을 순식간에 베어내기 시작이다.
[서희]는 멀찌감치에 서서 갈퀴를 든 채.. 내쪽을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는 나와 자기네 엄마 사이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따따따~....]
뒷산쪽의 묘소들의 벌초가 끝나고 하산을 하고난 후 큰집 창고안에서 장비를 챙기고 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이시간에는 언제나.. 그냥 갈까.. 내일갈까.. 망설였지만
오늘은 그냥 서둘러 올라가야만 할 것만 같았다.
[서희]와 단둘이 있는 왠지모를 불편함도 있고 지금쯤 잔뜩 뿔이난 [현주]를 달래주고
하려면 어쩔수 없어 보인다.
"저.. 선생님.. 제가요.. 저녁 금방 차릴께요.."
".... 그냥 올라가면서 휴게소 들려서 때울께.."
"...오늘 올라가시려구요??...."
"...그럼..가야지..."
"오늘 주무시고 내일 올라가시면 안되여?? 선생님??..."
"............."
[서희]가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 내가 여지껏 보아왔던 [서희]의 표정들 중에 가장 슬픈 천사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 진짜.. 왜 이럴까...'
[민서]누나의 딸이니까..
[민서]누나를 닮은 얼굴 때문에 여지껏.. 저런 모습을 보며 주체하지 못하고 빠져들었지만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그런류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시무룩한 [서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수학문제 안풀리는거라도 있어??...."
"네에~!!!..."
[서희]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하얀 얼굴에 보조개가 금새 생기면서 어금니쪽 덧니가 보일듯 말듯한 환한 미소가
내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