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7)

"아!!... 씨발...."

충격적이었다.

[민서]누나가 여지껏 나를 이토록 그리워 했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일병휴가 때 만나볼껄 그랬었나 보다.

편지를 서둘러 접어 품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영하의 날씨에.. 소중한 [민서]누나의 편지지가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한동안 잔잔했던 호수였는데..

그만.. 또.. 점하나가 그 호수에 떨어지더니.. 동심원의 작은 물결을 만들고..

그 물결들이 퍼져나가 너울이되고.. 파도가 되더니.. 어느덧 해일이 되어 나를 집어 삼킨다.

"후아......"

K-1소총, 대검, 5.56mm실탄, 세열수류탄.. 온갖 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비무장지대내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군바리의 가슴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상병휴가!!!...'

이번 GP작전만 끝나고 후방으로 빠질 때 상병휴가를 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때 가서 [민서]누나를 만나면 된다라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씨발... 그래!!.. 답장부터 보내야지!!.. 우후!!!!!...."

그렇게 눈덮힌 얼어붙은 비무장지대의 계곡에서 단 한통의 편지가 군바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버렸다.

1997년 1월

**산 **GP 인근

무월광의 어두운 산속.. 사주경계를 하며 매복지로 향하는 수색대원의 두 눈빛만이 총구끝에 

반짝이며 순간 분대장의 수신호에.. 일사분란하게 자세를 낮춰 몸에 익은 즉각조치의 사격자세를

잡는다.

[바스락....]

순간 전방 1시방향 15M 에서 칠흙같이 어두운 정막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을 삼키며 숨죽이는 소리마저 부담스러운 순간이다.

[처컥!!!!...]

순간.. 내옆에 머저리같은 누군가의 노리쇠 전진소리가 산통을 다 깨어버렸다.

나역시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천천히 전진시키며 탄알하나를 총열에 박아넣었다.

안전모드위 엄지손가락을 걸치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캔우드무전기가 속삭인다.

"어떤 씹쌔가 방구꼈어??..."

"큭큭......"

"어우..냄새...씨발.."

"큭크크...."

"조용안해???...."

".........."

쾌룡호를 타고 파란 물결을 가르며 강을 건너.. 춘천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민서]누나가 있는 광주의 주소지로..

지난 며칠동안 [민서]누나의 편지를 받은 후 지금까지 GP철수 후 휴가를 나가서

누나를 만난다는 들뜬 생각에 하루도 쉬는 날 없는 수색과 매복작전의 피곤함에도 

지칠 줄 모르고 있다.

역시 사람은 떨어져 있어봐야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건가를 뼈져리게

느낄 수 있나보다.

[민서]누나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그런생각을 했었다.

이제는 더이상 [민서]누나를 놓지 않을 것이다. 

백두산부대의 일당백정신으로 무장된 수색대용사의 머리속은 온통 [민서]누나와의

사랑을 꼭 이루고말겠다는 각오와 의지만 불타올랐다.

전쟁이 나면 꼭 백두산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야 말겠다는 우리부대원들의 각오처럼..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우리중대가 대대 주둔지인 도사리로 철수하자마자 소대장과 면담이 있었지만 나의 상병휴가 

계획은 징그럽게도 훈련이 많은 우리산악사단의 일정때문에 차질이 있어보였다.

"시키얍!!.. 지금 휴가자 대기중인 인원이 몇인줄이나 알아??.. 넌 빨라야 다다음달이야..!!.."

"네??...."

"다음달에 *연대 지원훈련 끝나면 GP철수자 포상외박일정 있으니까.. 그거나 기다려 임마..

넌 특별히 1패쓰로 끊어줄테니까..."

"............"

[민서]누나를 만나고 싶은 심정은 내속을 새까맣게 태워놓으며 발만 동동구르게 할 뿐..

일개 병졸이 군대라는 조직을 상대로 내 의지를 표출 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1997년 2월..겨울 ** 훈련이 한창이다.

[부따따따따따!!!!!!!!......]

시끄러운 UH-1H 안에서 수신호에 맞춰 스냅링을 고리에 건다.

40M 아래를 내려다 보니 헬기의 프로펠러의 기류가 레펠 하강지인 **의 흙먼지땅위에 동그란 

미스테리 써클을 만들고 있었고 총기를 견착하고 역레펠로 하강하였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는지..

꽃피는 춘삼월이라지만.. 겨울과 여름밖에 없는 강원도의 군생활은 아직도 야간에는 방한복을

껴입지 않으면 야외에서의 생활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주둔지옆 백두유격장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개끌려오듯 끌려온 불쌍한 백두부대원들의

구령과 PT체조소리가 요란하고 이 추운 날씨에도 보통 한달에 보름이상은 야외에서 

생활해야 하는 힘든 수색대 훈련일정들과 지긋지긋하고 힘든 행군들의 군생활이 짠밥을 먹으면 

먹을 수록 왠지 더 힘들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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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 민서

김민서.. 안부는 생략할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보고싶다며 미칠때는 언제고 왜 편지 안해?

나 다음달 정도에 휴가가면.. 그 주소지로 가면.. 볼 수는 있는거니??

제발 전화라도 달라고 했잖아..

아니면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주던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이번에 나가면 꼭.. 너에게 사랑한다고 미안했다고..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게

지내자며.. 남자답게 너와 나의 앞날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해..

.

.

저번에도 말했듯.. 내가 군대와서 가장 후회하는게

입대전 너랑 단 하룻동안만이라도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거.. 그거 하나야.

사랑해

그리고 보고싶어..

1997.3 쭈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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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오늘도 **교육대에서는 연일 선착순과 PT체조에 **연습이 한창이다.

[삑!!...]

[앞꿈치!!!!!....]

[삑!!...]

[장따리!!!!!....]

[삑!!...]

[엉덩이!!!!....]

[삑!!...]

[떼구르르.......]

[반대편어깨근육!!....]

[찌이잉..!!...거기 89번 교육생!!.. 요령피우면 ?아가서 밟는다???....]

연단위의 교관의 스피커가 나를 지목하고 있었다.

'씨파... 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 교육대에서 **훈련과 **연습으로 팔꿈치와 등이 다까지고 허벅지에 멍이들어 

온몸이 만신창이 개걸레가 되어가는 개고생을 할 때 즈음.. 어느덧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한 봄이 왔다는게 느껴졌다.

[민서]누나에게 그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썼건만.. 처음 받은 편지 외에.. 아직도

답장 하나 받질 못했다.

그리고 [민서]누나의 첫 편지지의 주소가 그전.. 미용실 주소지가 아니어서.. 왠지

더욱더 불안감이 커지고만 있었을 시기였다.

[민서]누나에 대한 애닳는 심정도 힘든 훈련들처럼 점점 나의 몸과 마음을 지쳐가게 만들즈음.. 

드디어 중대행정병으로 부터 이번주 토요일부터 시작된다는 나의 외박 일정을 알게 되었다.

벌써 한달전에 갔어야 할 외박을 이제서야 가게 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이놈의 상병휴가는 언제쯤이나...ㅠ

암담한 현실이지만 바쁜 훈련일정속에 그런걸 계산하고 슬퍼할 시간조차 없어보였다.

드디어 1박2일간의 짧은 포상외박일정의 아침이 밝았다.

주말에 훈련이 없어서인지 토요일 오전부터 면회자들이 PX에 많아 보였다.

부대앞.. 빈 택시가 눈에 보인다.

넘버를 보니.. 광주택시이다.

순간.. 뭔가에 홀린듯.. 쫄따구들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내일 외박복귀시간 두시간전에 도사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리고는 이 광주택시를 얼른 잡아탔다.

"아저씨!!.. 광주에 전대후문쪽으로 가주세요..!!..."

"네???.. 여기서 광주요???...."

"네... 이거 광주에서 온 택시 맞죠??..."

"핫..하하.... 그라죠...어제 오늘.. 제가 봉잡는 날이네요.. 오늘 여그부대 면회온다혀서

새벽녘에 아가씨 하나 태우고 왔었는디.. 내려가는 길에 또 돈벌게 생겨부렀네에......"

"진짜..급해서.. 시간없으니까.. 그러는데.. 최대한 빨리 좀 가주세요..."

"옴마... 쉬지도 않구 와뿌렀는디... 또 쉬지도 않고 가게 생겼구만이라.."

택시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낯익은 풍경들이 차창밖을 지나친다.

지난날 무거운 무장을 매고.. 힘겨운 행군 복귀를 하며 지나쳤던 곳이다.

순간.. 머리속에.. 아차!! 하며 떠오른게 있었다.

"저... 근데.. 아저씨....."

".....네....."

"저.. 사실.. 제가 일박이일 외박나온거라.. 이 일대에서만 있어야 하거든요..."

"그라요???...."

"그러니까.. 가다보면 하리검문소나 광치검문소에서 헌병들한테 검문받을지 모르는데...."

"허허....제가.. 여그 길을 잘 몰라서.. 우회길은 좀.. 힘들겄는디???...." 

"그러면.. 아저씨.. 저좀 검문소 지날때 까지.. 트렁크에 실어주면 안되나요??..."

"네????????????......"

"아저씨.. 제발 부탁드려요..."

"아니.......그... 근디요.. 여그서 광주갔다가... 내일 어떻게 또 오실라구..."

"여자한명만 만나고.. 내일 아침 일찍.. 또 택시타고 일루 올꺼에요.."

"어허...참....."

"제발 부탁좀 드려요..."

"차비는 있소??......."

"그럼요..보여드려요???..."

"후우.... 이거.. 이러면 안되는디...."

택시가 한가한 도로위에 멈춰섰고..

열려진 뒷트렁크에 새우처럼 구부려 누웠다.

트렁크문을 닫기전.. 택시운전수가 나에게 입을 열었다.

"저그... 근디.. 진짜.. 외박나온거..맞지라??...."

"그럼요... 빨리 출발이나 해주세요..시간없으니까..."

이윽고 트렁크문이 잠기고.. 차가 출발했다.

비좁은 트렁크안에서 새우잠을 자듯.. 옆으로 누워있지만..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고 있다.

검문소만 지나면.. 나는 자유의 몸이다.

오늘밤.. [민서]누나를 만나 함께 하고.. 내일새벽녘..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택시가 멈춰선듯한 기분이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듯 하더니.. 밖이 좀 시끄럽다.

'씨바..... 뭐지???....'

알수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어감을 때 즈음... 그만.. 트렁크의 문이 열리며 밝은 햇살이

나를 덮쳐왔다.

그리고 놀란 헌병들의 눈빛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 헌병 구치소

여기까지 나를 인솔해온 검문소 헌병장교가 돌아가고..

여러가지 조사를 받았다.

우리부대의 인사계가 다녀간 후.. 나는 지랄같은 나와 [김민서]의 운명에 허탈감이

안겨준 커다란 충격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김민서 만나러 가는거였냐???..."

"........네.."

"너 외박나가자 마자.. 면회 신청했다더라.. 이자식아!!..."

"......!!!!!......"

부대앞에서 광주택시를 보고 난 후.. 한번만이라도 PX의 면회객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이윽고.. 조사실의 문이 열리고 헌병하나가 훈련복하나를 책상위에 던진다.

"옷갈아입는데.. 10초..."

".............."

그렇게 보름간의 헌병대 구치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겨운 PT체조와 목봉체조..

그리고 지긋지긋한 평좌세심[양반다리]과 정좌세심[무릅꿇기]..

헌병하나가 유치장 안에 설치된 카메라에 뭔가 수신호를 보내자.. 헌병들이 유치장문을 따고

들이닥쳐.. 유치장안에 있던 나와 다른 입소생들을 사정없이 구타하기 시작이다.

정좌세심자세에서 졸았다는 이유이다.

나와 [김민서]의 운명이 원망스럽다.

바보같은 내가 원망스럽다.

여지껏 편지한장 없다가 급작스레 찾아온 [민서]누나도 원망스럽다.

1998년 2월..

드디어 전역이다.

대한민국의 최정예 명품사단의 수색대대원으로서 자긍심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깐이나마 얼룩졌던 나름대로의 고달픈 군생활의 끝은 오고야 만 것이다.

상병휴가도.. 병장휴가때도..

[민서]누나의 편지지의 그 주소지를 찾아갔건만.. 그런사람 여기에 없다라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 복학해서 낯익은 복학생들과 함께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고

다시금 시작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방황의 시간을 가끔 맞이하기도 했었다.

서강대 철학과를 휴학하고 군대를 갔던 [현준]이 녀석이 첫휴가를 나왔을 때..

잔뜩 술에취해.. [현준]이를 잡아세운 후.. 울먹이며 [민서]누나를 찾아달라는 말을 했었다.

"형... 미안해.. 나.. 휴가나온 군바리잖아..."

"씨발...딸꾹!!!... 개색꺄!!.. 군바리정신으로 찾아내란말이야!!!...."

밖이 시끄러웠는지.. 오밤중에 주무시다 깨어난 부모님들이 [현준]이방으로 ?아오셨다.

"아니!!.. 이자식은.. 술취해서.. 지금 휴가나온 동생한테.. 왜 욕이야???..."

"....으허헝!!!...아빠!!...엄마!!!...이새끼가... 사람을 좀 찾아줘야 하는데..말을 안듣잖아.."

"희준이 너 미쳤냐??? 이자식.. 어디서 술은 이렇게 잔뜩 취해가지고..!!..."

"하하...아빠.. 아무것도 아냐... 엄마 그냥.. 들어가서 주무세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잊을만 하면 생각되고.. 잊을만 하면 기억나고..

도대체 어디에서 뭘하며 지내는 건지..

궁금하지만 않으면.. 이렇듯 내 삶이 힘겹지만은 않을 텐데..

1,2학년때는 성적이 좋아 장학금까지 타먹던 놈이.. 복학을 하고나서는 완전 폐인이

되어.. 힘겨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3학년이 지나.. 4학년이 되고.. 어느덧 졸업을 해야 하건만..

전공 몇개과목이 빵꾸가 나서 쌍권총을 차게 되더니만..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해의 가을이 

찾아올 때 즈음..씁쓸히.. 낙엽을 밟으며 졸업장을 받아갔다.

그동안 서울시에 있는 모 여고에서 선생질 하는 [현주]도 가끔 만났었다.

[현주]는 졸업후에 임용고시를 통해 교직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대기업이나 증권사 은행.. 공무원.. 교사등등...

졸업생들 대부분이 그래도 괜찮은 자리에 하나씩 차고 들어가면서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저.. 망가진 백수의 삶을 살고 있었다.

[현주]와 간만에 학교앞에서 만나 술을 푸고 있었다.

"딸꾹!!!....아줌마!!!..여기 술 더줘여어!!!!...푸하아...."

"쫌..천천히좀 마셔임마!!..."

내 앞.. 길다란 웨이브머리에 정장을 입은 [현주]의 못마땅한 얼굴표정이 퉁명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히히..!!... 최선생!!..딸꾹!!... 학교생활은 할만하냐??..."

"그냥 그렇지 머.. 벌써 3년짼데.. 작년까지는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거 같애.."

"헤헤... 내가 고3때... 딱.. 너만한 여자 교사를 하나 작업했쥐..."

"그놈의 미스홍 얘기 또 하려구???...."

"하하!!!... 너 그얘기 기억하는군하...짜식... 딸꾹!!!!..."

"치이... 학교에서 보니까.. 너시절에 딱..너만한 넘들 널렸더라...."

"그래... 시집도 가야지...딸꾹!!!... 얼굴이쁘고 착한 최현주니까...."

"누가 데려가는 사람이나 있어야지.. 그나저나 너.. 취직안해??......."

"짜식은... 잘나가다 분위기 깨는 소리하고 있어..."

"내가 우리동네 학원 수학강사자리 하나 소개시켜줄까??..."

"시러....딸꾹!!!...."

"으휴!!...싫음 시집이나 가..."

"짜식... 내가 임마.. 남잔데... 어떻게 시집가냐??..."

".............."

술자리가 짙어지고.. 나처럼 [현주]역시 술에 취해버렸다.

부담없는 토요일밤이라 그런지 [현주]는 평소보다 더 많이 마신것 같았다. 

[현주]가 테이블위에 팔꿈치를 기대어댄채 앞머리를 넘기며 입을 연다.

"후우... 딸꾹!!!.. 너.. 이 병신.. 아직도 그.. 김민서 못잊냐??..."

"헤헤..... 훗......"

난 대답대신.. 그냥 웃어줬다.

왠지 그냥.. 허탈한 웃음만이.. 내가 해 줄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윽고 [현주]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고 있다.

단둘이 노래방을 온건 실로 처음이었지만 워낙 사심없는 친구사이라서 그런지

그냥 망가져 분위기로 한껏 술에취해 놀고만 있었다.

[현주]가 모니터 앞에서 왁스의 오빠를 불러대고 나는 그 옆에서 탬버린을 쳐댔다.

"그냥..편한 느낌이 좋았어..!!...예에!!..."

"우후!!!...." 

"하지만 이게 뭐야.. 점점 남자로 느껴져..!! 아마 사랑하고 있었나봐...!!.."

"와아!!!!...."

"오빠 그녀는 왜 봐!!!..거봐 그녀는 나빠!!.."

"앗싸!!!!!...."

"왜 날 여자로 안보는 거니...자꾸 안 된다고 하는 거니...!!..."

"우후..!!...."

한창 신나게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던 [현주]가 마이크를 넘기더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테이블로 걸어들어가 앉아버린다.

화면을 보니.. 현란한 영어문구가 지나가며 남성랩퍼가 불러야 하는 부분이 된 것 같다.

"..아유필미..아유필미..브렉유어브레인..크랙유어마인..어쩌고..저쩌고..왁스!!..우후!!!.."

"............."

[현주]가 다시 불러야 하는 부분이 왔는데도.. 무슨일로 새침해진 건지.. [현주]는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위의 캔맥주잔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터덜터덜.. 축쳐진 [현주]의 한팔을 어깨에 감은 채 노래방 밖으로 힘겹게 걸어올라왔다.

"야.. 너 괜찮아??..."

"후우... 아니......."

"택시태워줄께.. 가자.."

"싫어...."

"왜 싫어??.. 싫으면 시집이나 가던지...."

"..재워줘..."

"뭐??......."

"그냥..재워달라고..."

[현주]와 함께 택시를 타고 우리동네 근처의 모텔로 향한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한 후.. 내 옆에 앉은 이 여자와 여지껏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다.

왠지.. 오래전.. 이 여자와 하룻밤 첫경험을 갖기 전.. 그 때의 그 심정이 다시금 머리속에

떠오르고 있다.

'분명히 또 후회하게 될꺼야...'

술에취한 [현주]를 부축해서 방문을 열고 키를 꽂자 은은한 방안 조명이 켜졌고

[현주]는 침대위에 풀썩.. 주저앉더니 바로 뒤로 누워버렸다.

오래전 피서지 동해안 민박집에서의 아찔한 동거가 있은 후 실로 오랜만이다.

단 둘이 방안에 함께 있다는 게..

방금까지 술에 취해있었는데 노래방에서 실컷 놀다보니.. 지금은 술기운보다는

피곤함이 더 느껴지지만 단 둘이 모텔방에 들어왔다는 상황에 약간의 긴장감과

어색함에 어쩔줄 모르고 있다.

[현주]는 눕자마자 잠을 청할 것 처럼 한팔을 두눈위에 댄채 꼼짝도 않고 있다.

리모컨을 찾아들고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켠다.

TV의 화면보다는 TV뒷쪽 어정쩡한 침대위의 상황이 반사되어 보이는 거울로

눈이간다.

'이러면.. 안되는건데.. 진짜.. 안되는데..'

[현주]가 부담스럽다.

나에게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애정을 갖고 있는게 분명하다.

오래전.. 나와 첫섹스를 나눈 그 해 여름부터.. 군대가기전까지 [현주]는

나의 적극적인 공세를 원하고 있었다.

단지 친구로 선을 그어놓고.. 그 어떤 대쉬를 하지 않는 내가 항상 못마땅했고

지금 이순간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는 [김민서]라는 뼛속 깊숙히 새겨진 상처때문이라지만..

지금에와서 저 여자를 단지 친구라는 보기좋은 허울을 뒤집어 씌워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맘속에서 [김민서]를 잊고 다른 누군가와 새로 시작한다는건 

여전히 쉬운 결정만은 아니다.

혹시.. 아직도 [김민서]를 만나 사랑을 다시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서

였을까??..

"흐음.... 아.. 쉬마려..."

"........"

[현주]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화장실로 걸어간다.

불투명한 화장실의 유리문 안으로.. 양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현주]의 모습이

비춰진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타불을 땡긴다.

군대 제대하고 한동안 끊었던 담배였는데.. 요근래들어 다시금 피워대고 있다.

[현주]가 볼일을 보더니 나오지 않고 옷을 벗는듯 하다.

유리문 안으로 불투명한 살색 몸뚱이가 선명하다.

그러더니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이다.

속에서.. 성적 욕구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성인군자인척.. 지고지순한 척.. [김민서]만 생각하고 살려고 해도

이.. 빌어먹을.. 수컷의 본능적인 성적욕구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씨발... 진짜.. 미쳐버리겠구나...'

샤워기의 물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윽고 멎어져 버렸다.

[현주]가 길다란 타올로 온몸을 칭칭 감고.. 옷꾸러미를 챙겨든 채 휘청휘청.. 걸어나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이 곳에 오기전까지의 그.. 술취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샤워 한방에 아까의

취끼에서 다 깨어났는지..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표정으로 무표정으로 TV를 바라보는

나에게 슬그머니 입을 연다.

"흐음...!!... 안.. 씻어?..."

"..........."

대답대신 무척이나 난감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현주]를 바라 보았다.

"..흐음!!... 왜에??.......나.. 화장지우니까.. 이상해?..."

"훗... 아니.. 이뻐..."

민낯의 [최현주]

화장을 해도.. 안해도.. 이쁜 얼굴은 여전하기만 하다.

".......안씻어??.."

"..후우~...그래..현주야... 우리 씻고 자자..."

밝은 모텔의 방등 아래.. 다짜고짜 훌렁훌렁 웃옷을 벗었다.

거울로 비쳐지는 [현주]는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 얼굴만 내민채.. 발가벗는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이윽고 바지를 내리고.. 양말을 벗어던지고 팬티도 내려버렸다.

[현주]는 아무말도 없이 숨죽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축쳐진 자지와 부랄을 단 알몸으로 당당히 화장실로 걸어들어갔다.

온통 뿌연 습기로 가득찬 거울을 손으로 쓱~ 문질러버리니 거울속에 왠 나체의 폐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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