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
태수의 말에 플라모르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실, 그녀도 이 부분에 대해 태수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넘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왜, 이것도 말해줄 수 없나?"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어-"
이번에도 말을 아끼는 플라모르에, 태수는 그나마 그녀의 말에 '미안하지만'이 추가되었다는 것에 위안을 두었다.
처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식이 괜찮아졌으니까.
"뭐가, 미안한데?"
"어어ㅡ?"
플라모르는 태수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뭐가 미안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답을 제대로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 자연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 정말 바보네-'
그런 감정이 들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절로 자조적인 표정을 짓게 되었다.
늘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게 신이었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여신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인간남자 말 한 마디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있으니, 체면을 구겨도 아주 제대로 구겼다.
'문제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는 것이지-'
플라모르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점소이가 가지고 온 화주를 잔에 가득 채우고는 그녀에게 건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인간의 술은 마셔봤나?"
"물론-"
신의 유희란 것은 다양했지만, 그 역시 제일 가는 것은 먹고 즐기는 것이었다.
신 기준으로 태어나지 얼마 안된 플라모르는 우화린을 통해, 이곳의 문화와 술을 접한 적이 있었다.
"캬아~"
"잘 마시네?"
"······."
한 번에 화주잔을 입 안에 털어놓은 플라모르가 화주맛이 괜찮았던지, 조금 과장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은근한 말투로 말하는 태수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렸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나, 자꾸 왜 이러는 거지-'
단순히, 밥을 먹으러 온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 이상한 묵광색의 방도 아니었으니, 주책맞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이후로, 태수는 턱을 괴고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플라모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왜 자신을 저렇게 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선을 마주치면, 두근거리는 마음에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이제 곧 빙의할 시간이 끝나가는데-'
태수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단, 자신이 질문하는 것 외에도 플라모르가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빙의를 해서 우화린의 몸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그게 제일 궁금했다.
그래야, 차후의 일에 대해 계속해서 꼬드겨 물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여신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나답지 않게 쓸데없이 걱정을 늘여놓는군-'
무표정한 눈빛을 짓고 있는 가운데,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던 태수는 피식- 웃고는 거의 고개를 처박듯이 하고는 음식을 먹고 있는 플라모르를 바라보았다.
음식에만 집중해서 그런지, 그녀가 먹고 있는 음식은 금방 바닥이 나버렸다.
"신도 먹을 것을 탐하나?"
"그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고개를 처박고 있는 거지?"
"그, 그건-"
그것에 대해 제일 답답한 것은 플라모르 자신이었다.
머리 위로 무슨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인간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으로, 마치 미지의 세계로 끌려들어갈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리라.
플라모르가 부끄러운 나머지, 제대로 대답하고 있지 않을 때ㅡ
"이제 30분 남았다. 괜찮겠지? 섹스를 하는 방으로 가도-"
태수는 플라모르에게 조교의 방에 갈 것을 권유했다.
태수가 시간을 재는 것은 딱히 문제가 없었다.
게임 시스템으로 게임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거부해야 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어-'
태수의 말에 머리 이전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듣자마자, 세차게 가슴이 뛰었고 울렁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꽃잎은 젖어들기 시작했다.
"응-"
얼마 고민하지도 않던 그녀의 입 밖으로 순순히 '응-'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푸핫-! 이제 딱히 거부하지도 않네?"
"어, 어차피 강제로라도 끌고 갈 생각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만-"
자꾸, 자신을 갖고 노는 듯한 태수에 플라모르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렇게, 발작적으로 외친 데에는 스스로도 모르게, 그렇게 자신을 갖고 노는 듯한 태수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감정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던 탓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아- 어어ㅡ"
플라모르는 어떻게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몰라 버벅거렸지만, 곧 그녀의 세계가 바뀌었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느 그곳.
묵광색의 방이었다.
라인하트의 제 ll성전 앞.
"플라, 왜 이렇게 표정이 멍해-"
"내가?"
"어, 하루종일 멍해있잖아."
우화린의 몸으로 빙의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난 후 플라모르는 다시 라인하트로 돌아왔다.
금발에 적색빛이 섞인 듯한 몽환적인 긴 머리카락이 등까지 내려왔다.
빛처럼 느껴질 법한 백옥과도 비슷한 피부색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묘하게 대칭되어 굉장히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여성치고는 키도 172cm 정도로 굉장히 큰 편이었고,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것은 들어간 전형적인 모델미를 갖추었다.
'내가 멍해있었다고-?
필히스의 말에 플라모르의 멍해있던 눈빛에 불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계속 지금까지 멍해있었어. 의기소침해보였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필히스가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단순한 동료 이상의 감정이 섞여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플라모르의 반응은 다소 냉소적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필히스는 그나마 걱정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원래 옛날부터 필히스를 대하는 플라모르의 태도는 굉장히 새침맞았고, 냉소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그러했다.
플라모르는 매우 여성스럽게 아름다워졌고, 언뜻 보이는 인상은 굉장히 차가웠다.
새침하고 냉소적인 성격도 더 심해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필히스는 플라모르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아ㅡ'
플라모르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히스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지난 날, 라인하트의 영광을 위해 매일같이 살아온 나날들.
그 가운데, 그녀는 프로비타 차원의 자원화 계획을 맡고 있는 여신이었다.
신의 유희라 하여 색色을 즐기는 신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보다도 라인하트의 영광을 위해 앞다투어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자신에게 명예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자라왔고-
그런데,
'그게 무슨 행복이고, 영광이었을까-'
보고를 하기 위해, 라인하트의 성전 앞에 서있는 그녀는 라인하트의 영광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날들이 너무나 의미없게만 느껴졌다.
우습게도, 그녀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태수-'
Prov.1 세계의 인간남자, 태수.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가진 남자.
무엇보다도, 지난 나날들이 무색하게 느껴지게 할 정도로 섹스로 자신을 완전히 망가트린 남자.
'하아-'
꿀렁-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음부에서 보짓물이 질질 새고 있었다.
빙의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본체인 자신의 몸에도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다.
"플라, 뭐해? 이제 들어가야지ㅡ"
"아, 미안."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말해줘.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테니까-"
"아, 괜찮아. 난-"
"플라모르-"
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남자, 필히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플라모르의 손을 붙잡았다.
'잘할 수 있을까-?'
조금 쑥쓰러운 듯한 표정이 필히스의 얼굴에 감돌았지만, 힘든 일이 있어보이는 그녀를 보고는 오늘 기회라 생각하여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할 생각이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 우리는 그래도 동료긴 해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었잖아.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좀 의존해도 돼-"
"필히스, 그런 것 아니야."
필히스의 진지한 말에도, 귀담아 듣지 않는 듯한 플라모르였다.
그런 그녀에, 답답한 그는 잡은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꽈악-
"왜, 나한테 의존해도 된ㅡ"
하지만,
"놔ㅡ!"
플라모르는 정색하며, 필히스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프, 플라모르"
필히스는 아무리 플라모르가 냉소적이고, 새침하다고는 해도, 그건 미움이라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본래 그녀의 성격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매우 입체적이었다. 매우, 분노해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정말 최악이야. 앞으로 말 걸지 않아주었으면 해-"
플라모르는 필히스와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지만,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딱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태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심한 말을 듣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필히스는 다소 충격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해-'
하지만, 플라모르는 그런 필히스를 외면하고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며, 동료로 함께 활약했던 둘은 감정이 엇갈린 상태로 라인하트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너, 누구한테도 쉽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구나?"
플라모르의 빙의가 끝나자, 우화린은 본래 그녀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새침한 척, 재수없는 척하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본래 분위기.
하지만, 이제는 태수 앞에서는 그런 척조차 할 수 없게 된 그녀였다.
빙의로 인해, 영혼이 구석으로 밀려난 우화린은 플라모르와 태수가 하는 작태들을 모두 다 관조할 수 있었다.
자기가 숭배하고 있는 신이, 그의 밑에 깔려 '주인님'이라며 앙앙- 거리고 있으니 어떻게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뭐, 이제 다시 맹주의 비밀호위로 돌아가나? 맹주 본인도 모르는ㅡ?"
스윽-
태수의 말에 우화린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긍정의 의미를 담은 듯한 그 몸짓에, 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뭘 하자고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네-"
Monster Wave.
이것이 천상교와 플라모르가 말하는 프로비타 자원화 계획과 아주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건 분명했다.
우화린을 돌려보내고 난 후, 태수는 숙소로 돌아가 광서지부 복귀 일정을 잡았다.
"가가, 이제 돌아가는 건가요?"
"응."
선하가 태수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들은 태수가 낮에 일정이 있는 동안, 서로 비무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태수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은 나름대로 태수에게 피해가 끼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태수 일행은 숙소에 있는 짐을 정리하고, 모두 마차 위에 실었다.
그 후, 무림맹을 떠나는 태수 일행을 맞이하는 이가 있었으니-
"태수 형, 이제 가는 것이오?"
"그래-"
개방의 광풍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나타나, 특유의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태수에게 말을 건넸다.
"뭐, 조만간 볼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너도 잘 지내라."
"알겠소, 태수 형."
광야와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하려고 하던 순간 태수 일행을 다시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태수 공자님ㅡ!"
'여자 목소리?'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의 것이었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맹주와 무림맹 중진들과 모두 작별인사를 했으니 개인적으로 이렇게 따로 찾아올 사람은,
"왜, 인사도 없이 그냥 가세요오옷-!"
곤륜의 무가희, 그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아니, 왜 찾아왔소."
"급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야박하게 대하실 거에요?"
"아줌마랑 나랑은 그닥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소-"
"아, 아줌마- 그런 말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오옷ㅡ!"
"알겠소, 푸핫-!"
객관적으로 그녀는 누가 봐도 아줌마스럽지 않았지만, 태수는 그저 그녀의 반응이 웃겨서 계속 말하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녀 역시 어렴풋이 그런 태수의 분위기를 읽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의 관점으로는, 곧 미래의 연인 관계가 될 사이인데 언제까지고 아줌마라 불릴 순 없지 않겠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하고 싶은데-'
색기가 넘치는 뇌쇄적인 눈빛.
무가희는 태수를 이대로 보내기는 아쉽다는 생각에, 일부러 후줄근하게 입은 야한 복장으로 요염하고 은근한 눈빛을 태수에게 보냈지만ㅡ
"뭐 작별인사를 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겠소, 그럼 이만ㅡ"
태수에게 돌아온 것은 말그대로 작별인사였다.
타다닥- 타다닥-
"쳇, 가다가 마차나 뒤집어지던지, 흥ㅡ!"
이후로, 그녀는 들려오는 마차의 말 발굽소리와 시야에서 멀어지는 태수를 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그녀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고-
'태수 공자님, 다음에는 반드시 그 고고한 태도를 완전히 무너트려줄 테니까ㅡ'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미래를 기약했다.
"흐음?"
마차를 탄 태수 일행은 광서지부에 도착했고,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천마신교의 수뇌부급 인사가 한 명 찾아왔습니다. 여자인데, 예쁘긴 엄청 예쁩니다. 그 천마신교의 공주를 찾아오겠다고 여기에 왔다고 해서, 딱히 반박할 거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첫 설명을 듣고는, 조금 인상을 쓴 듯한 태수에 진무가 겁을 지레 먹고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태수와 익숙해지고, 친해졌다지만 그 근본적인 두려움은 어디가는 것이 아니었다.
"공주는 지금 어디있지?"
"아마, 그 수뇌부와 같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불과 1시진 전.
광서지부로의 복귀시간과 이렇게 맞닿다니.
우연스러운 일이긴 했으나, 천마신교로 오랫동안 복귀하지 않는 공주를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아마, 이 방이겠구나.'
거미의 초감각으로 느끼건대, 주홍희의 방에 그녀의 것으로 추측되는 호흡과 그 외에 처음 느껴보는 것으로 추측되는 호흡이 있었는데 숫자가 비교적 많았다.
'대략, 6~7명?'
아무래도, 그 수뇌부의 개인호위일 확률이 높았다.
태수는 천마신교의 일이기 때문에, 딱히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해줄 말도 딱히 없었다.
그런 가운데,
콰아앙ㅡ!
그녀의 객실의 문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열렸고, 그 사이로 울먹이면서도 화가 난 듯한 주홍희가 밖으로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