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가문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가주의 아들이 가주직을 세습받는다.
그렇기에, 가문 전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부자 세습에 의해 가문의 역사가 이어져왔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조기 교육과 각종 영약을 통해, 천재가 아닌 자식들이더라도 가주직을 잇는 최소 조건인 초절정 혹은 화경의 고수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러나, 가문과 달리 문파의 장문인은 당연히 부자 세습 같은 건 없었다.
문파마다 방침이 다르겠지만, 보통 문파의 원로회의를 통해 장문인을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문파 장문인의 성씨가 바뀌는 것도 일상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속가제자가 아닌 직속제자로 적을 두었다면 그들의 자식들도 대부분 문파의 직속제자로 남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한 번 화산파는 영원히 화산파'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산파 내부적으로 유력 가문들이 혼재하여 재능과 능력에 따라 장문인을 번갈아하는 식의 형태였다.
마찬가지로 섬서 위가의 사람들은 화산파에 적을 두고 있었고, 위지운도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 화산파에서 조기 교육을 받아 성장해왔다.
그의 딸, 위지화 역시 화산파에서 조기 교육을 받아왔고 현재 화산파의 유력한 후지기수로 성장했다.
'흐음-'
태수는 맹주의 집무실 밖으로 나오며, 위지운이 건넨 대환단이 들어있는 단갑을 살펴보았다.
-하하, 이건 우리 화산파가 청사파와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게
위지운은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태수의 등을 붙잡았다.
족히, 대환단 대여섯 개가 들어있을 것 같은 크기의 단갑이었기에 태수는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점잖은 미중년인 줄 알았는데, 사실상 속은 시커먼 능구렁이였군-'
사실, 태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림맹주의 상황 판단 덕분에, 피를 적게 흘려도 되었다.
무림맹주를 비롯한 화산파는 무림맹에 새로이 합류한 청사파의 존재가 매우 껄끄러웠을 것이다.
분명, 청사파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고 다시 원래대로 점창파를 구파일방의 대표로 내세우는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청사파의 존재를 인정했고, 오히려 청사파와 친하게 지내기를 택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청사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아직은 노골적으로 그런 상하관계를 드러낼 때는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맹주를 믿을 필요는 없지만, 뭐 이렇게 나온다면야'
호의를 의심으로 점철하여, 대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 정도로 나온다면, 그 진심을 어느 정도 믿는 것도 예의이지 않겠는가.
태수는 나름 기대하는 눈빛으로, 단갑의 뚜껑을 열었다.
단갑의 뚜겅을 열자, 대환단 특유의 향긋한 내음이 태수의 코를 찔렀다.
단갑에 들어있는 대환단의 갯수는 총 8개.
설마, 맹주나 돼서 진품이 아닌 가품을 보낼 일은 없겠지.
'단약 속에 품은 내공을 보아하니, 확실히 진품이군-'
태수는 인벤토리에 대환단갑을 챙기고는, 숙소로 되돌아왔으나 곧 다른 자리로 불려나갔다.
자유로운 사교 모임 속에서, 태수는 그야말로 연예인급 인기인이었다.
구파일방의 대표들은 눈치를 보며, 맹주가 태수와 만남을 가진 이후 곧 바로 만나자며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곤륜파의 무가희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아줌마라 부른 태수에게 여전히 얄미운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사소한 감정에 불과했지만, 앞으로의 있을 미래를 생각하면 청사파와의 교류는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이른 밤.
무가희는 태수와 함께 기루로 들어왔다.
물론, 여자의 성을 파는 홍루는 아니었으며,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청루에 속했다.
"이름이 무가희라 했소? 무 소저, 뭐 아줌마라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에?, 아니에요. 호호-"
자리에 앉은 후, 무가희는 태수가 대뜸 사과부터 건네자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사실, 섭섭한 감정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진정성 있는 듯한 사과를 들으니 그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곧, 주문을 한 음식들과 술이 상에 차려졌다.
술은 매화주에, 음식은 탕국과 화채 및 고기 요리들로 풍성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한잔 하세요, 태수 대협-"
"아, 고맙소. 무 소저"
무가희가 뇌쇄적인 자세로, 술잔에 매화주를 채워주었다.
일부러 노린 것인지는 몰라도, 무가희의 자세는 볼 만했다.
무림인이 아니었다면, 술을 따르는 기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무가희는 자신의 몸을 향한 태수의 시선을 느끼며, 그윽한 표정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태수는 피식- 웃으며 겉으로 여유로움을 내비쳤지만, 속으로는 조금 그녀의 뇌쇄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쁘긴, 엄청 예쁘네-'
광야에게 듣기로, 색기 하나로 곤륜파의 수많은 남자들을 울렸다고 하는데 그 말은 지극히 사실인 듯했다.
"나도 따라주겠소, 무 소저"
"소녀를 향한 대협의 마음만큼, 잔을 따라주세요. 호호-"
넉살도 좋다.
태수는 피식- 웃으며 잔에 매화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무가희는 넘칠 것 같은 매화주잔을 보며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마실까요? 태수 대협"
"마십시다"
쭈욱-
무가희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기분좋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술기운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야릇한 표정으로 태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색色에 미친 여자'
색향色香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아무래도 이 여자한테서 그 향을 풍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고혹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그나저나, 무 소저는 왜 나를 보자고 했소?"
"청춘인 남녀가 만나는데,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호호-"
"농담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농담 아닌데요?"
자꾸, 선을 넘는 듯한 그녀의 분위기에 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 오늘 작정한 듯했다.
"알겠어요, 호호. 너무 그런 표정짓지 마세요. 사실, 저희 곤륜파는 청사파와의 교류가 절실해요"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소?"
"혹시, 무림맹 내에 경쟁구도에 대해 잘 아시나요?"
"아니, 모르오-"
무림맹 내에 경쟁구도가 있었다니.
정천맹이 남궁가와 당문으로 세력구도가 나뉘듯, 무림맹에도 그런 세력구도가 있는 듯했다.
"사실, 곤륜파는 천산파와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아요. 그 외에 아미파와도 그닥 좋지 않구요. 그렇다고 해서 딱히 교류가 깊은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화산파는 어느 위치에 있소?"
"화산파는 굉장히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요. 아무래도 중재자 역할을 맡기 위해, 스스로 그런 위치를 자처한 것 같아요"
"호오-"
역시, 정천맹과는 다른 걸까.
무림맹 내에서 제일 강했지만, 계파를 만들지 않고 중재자로서 중립을 자처하는 모습은 확실히 존중받을 만했다.
"그런데, 왜 곤륜파는 교류하고 있는 문파가 없소? 딱히,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부터 그래왔었는데, 최근 제가 대표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 더욱 급격히 안 좋아진 것 같네요-"
태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가 사상임에도 색色으로 승부를 보려는 무가희를 좋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특히, 색을 멀리하는 아미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고.
"정말,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무림맹에 적을 둔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사실, 알긴 알지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문파 사이의 교류를 소홀히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흐음-"
이 여자, 색色에 매우 관대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지 않은가.
"태수 대협이라면 절 도와줄 수 있겠죠? 도와주세요오-"
"아줌마가 그렇게 애교를 부리면 못 씁니다"
"또또또-!"
하다 못해 이제 앙탈을 부리는 무가희에 태수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다시 아줌마 소리를 들은 그녀는 발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태수를 바라보았다.
"부탁이니, 애교를 좀 줄여주시오. 보는 입장도 고려해줘야 하지 않겠소?"
"..알았어요-"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사실, 그녀가 작정하고 유혹을 해서 안 넘어간 남자는 거의 없었다.
모든 남자들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질펀하게 즐겼었다.
태수 역시, 그녀의 마음에 들었었고 대놓고 유혹을 했으나 쉽질 않았다.
이 정도로 튕기는 남자는 처음이었으려나.
'아,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무가희는 태수의 외모를 조목조목 살펴보았다.
잘난 것 없는 외모 가운데, 무언가 이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강호를 호령할 수 있는 무력도 그 매력을 더하는 듯했다.
무언가 무심한 듯한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저희 곤륜파도 맨입으로 청사파와 교류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태수 대협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스윽-
그녀는 품 속에 단약갑을 꺼내들었다.
설마?
"대환단 다섯알이 들어있어요. 이거 엄청 귀중한 것 아시죠?"
"흐음-"
알다마다.
맹주는 이걸 8개나 줬거든.
5개 줘놓고, 생색하는 그녀를 보며 태수는 피식- 웃었다.
비웃는 듯한 태수의 모습에, 무가희가 왜 비웃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태수는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에휴, 고마워 할 줄도 모르고. 제가 괜히 선물했네요. 태수 대협은 저한테 줄 선물 없어요?"
"없소"
"그렇다면, 차라리 몸으로-"
"그게 무슨 말이오"
"아, 아니에요"
무가희는 태수의 아랫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본인이 말해놓고, 은근히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이 여자도 제정신은 아니야-'
태수는 일단 무가희가 건넨 대환단갑을 받아들고는, 인벤토리에 챙겨넣었다.
아무래도, 무림맹 사람들은 주고 받는 걸로 '대환단'을 많이 사용하는 듯했다.
대환단은 무림인이 내공 증강, 내상 치유 등 다양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범용성이 뛰어났다.
그러니, 선물용으로 자주 쓰일 수밖에.
대환단갑을 받아든 태수는 곤륜파가 천산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떠올렸다.
왠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무 소저, 혹시 유해령 소저를 잘 아시오?"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거에요?"
"아니, 천산파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길래 물어봤소"
"그 재수 없는 년,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흥-"
아줌마라고 놀렸어도, 무가희는 지금처럼 대놓고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왜,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여자 이야기를 그것도 하필, 유해령의 이야기를 꺼내냐고 묻는 듯했다.
"유 소저의 가슴이 참 큰 것 같던데-"
"지금 제 가슴 작다고 놀리시는 거에욧-!?"
공교롭게도 무가희와 유해령. 무無 소저와 유有 소저.
C컵의 무가희는 무려 G컵의 유해령에게 치욕스러운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가슴은 대충 그럭저럭 볼 만했으나, 유해령과 비교하면 까마득히 부족해보였다.
"아니 뭐, 작은 건 작은 거고. 어차피, 무 소저에게는 유 소저에게 없는 다른 매력이 있지 않소"
"그게 뭔데요"
"매력적이지 않은데, 본인이 매력적일 것이라 착각하는 그 태도가 매력적이오"
"..칭찬 맞죠?"
무가희는 자꾸 자신을 놀리는 듯한 태수의 태도에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친해진 것은 좋지만, 이런 식으로 친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몸으로 대화를 나눠도 모자랄 판에, 이런 식으로 허울만 벗겨진다면 몸으로 대화할 확률이 계속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유해령 소저와는 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오. 정말 궁금한데, 이유 좀 알려줄 수 있겠소?"
"정말,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태수 대협이 그렇게 궁금해하니 말씀드릴게요."
무가희는 자신이 굉장히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무림 출타 연차로 치면, 유해령 그 년보다 까마득히 선배였어요. 그런데, 무림맹 대표로 비슷한 시기에 왔다고 저에게 그냥 툭 반말을 까는 것 있죠?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 외에 하는 짓도 정말 재수 없었는데, 대놓고 툭 반말을 해버리니 정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화나는 일이었나?"
"태수 대협! 지금 제 앞에서 유해령, 그 새파란 년의 편을 드는 거에요옷!?"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지금도 저를 봐도 인사도 안하는데, 언제 한 번 제대로 복수를 할 날이 오겠죠-"
'흐음-'
태수는 머뭇머뭇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사교 모임 약속은 유해령과의 자리였다.
"난, 이만 가보겠소. 뭐, 청사파로서도 곤륜파와 활발히 교류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오-"
"자, 잠시만요. 왜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으세요?"
"아, 유해령 소저에 관한 이야기? 안 그래도, 그 다음 약속으로 유해령 소저와의 자리가 있소"
"마, 말도 안돼-! 태수 대협, 정말 이러기에요?"
스윽-
착-
자리를 떠나, 등 돌린 태수의 어깨를 무가희가 붙잡았으나 태수는 가볍게 그녀의 손아귀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무가희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태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이좋게 지냅시다, 난 이만 가보겠소. 무 소저, 또 사적으로 볼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이오-"
"태수 대협, 정말 실망이에요. 어떻게 저를 두고, 유해령 그 새파란 년을 만나러 갈 수 있죠?"
무가희는 자존심 상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태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뭐, 태수에게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으나, 푸념 섞인 듯한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답답할 것만 같았다.
"말했잖소. 사이좋게 지내자- 응?"
"서, 설마"
사아아악-
쿠르릉-
[Level4 Boss Monster Wave Start (청해) - 48:00:00]
이른 밤.
아직, 햇살의 기운이 남아있던 하늘은 순식간에 우중충하게 변하며, 폭풍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이계 괴물 침공 장소는 청해.
대표적으로 곤륜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아주 방대한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