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광서지부를 향한 정천맹의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천맹으로 복귀한 그들은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없었다.
-건물을 조금 불태우고, 몇몇 주요 인물들을 살해했지만 정확히 출신성분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정천맹 수뇌부들은 작전 일행의 보고서를 들은 후,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들은 임무의 성공 여부보다도 작전 일행이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것에 안타까워했고, 이에 대한 무한한 의심을 보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적당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곧, 사천당문의 동맹세력들은 한 자리에 모여, 이에 대해 자세히 토론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계속 이대로 정천맹을 등에 업은 남궁가의 횡포를 고스란히 받아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팽우막은 회의장에서 광서지부에서 태수와 있었던 일들을 말했고, 혀를 끌끌- 차며 회의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당천휘는 팽우막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태수는 널 도와준다고 말했더냐?"
"아닙니다. 오히려, 태수 대협은 살려주는 대신, 저희에게 무언갈 요구했고 저희는 태수 대협이 힘이 필요할 때 도와드린다고 했었습니다-"
"에잉, 역시 그 놈이 그럴리가 없지. 도와주기는 무슨-"
태수를 잘 아는 당천휘는 그리 쉽게 태수가 사천당문의 세력들을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기대조차 하질 않았다.
처음에 당가려와 인연을 맺을 때, 태수가 그토록 강조하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태수가 당문에 장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당가려가 태수에게 시집을 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억지로 자신을 당문과 관계를 맺게 하지말라는 등, 지금껏 그런 모습을 보여줬었기 때문에 당천휘는 태수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 말은 그렇게 해도, 명색이 남편인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어느 정도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에잉, 그건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난 할 말 없다"
당우민이 아쉬운 듯, 당천휘를 꼬드겨보았지만 당천휘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당 의장, 어떻게 되었든 간에 대책을 촉구해야 하지 않겠소. 이번 사건을 보아하니, 남궁가는 우리를 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반을 무너트려 강제로 자신의 밑으로 고개를 숙이게끔 했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사천당문 동맹 가문으로 그나마 힘이 가장 강한 팽가의 가주 팽철우가 이 사태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직접 손 대지도 않고, 코풀기식으로 남궁가가 일처리를 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이런 식으로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확실히, 남궁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하긴 했지-"
"후우,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소. 등봉조극의 고수는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오. 과연, 현경 초입의 고수를 몇 명이나 동시에 상대할 수 있소?"
팽철우의 거대한 몸집이 화가 난 덕분인지, 요란하게 들썩였다.
팽가는 도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으로, 특히 '거대도' 같은 박도를 다루었다.
오랜 기간동안 무림에서 활약을 해온 만큼, 그들은 대대로 매우 큰 몸집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아보이는 팽철우에 당철휘가 대답했다.
"이곳에 현경 초입의 고수가 나 말고, 누구 있더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팽철우가 힘없이 대답했다.
남궁가의 동맹세력으로 유명한 제갈가와 혁련가는 모두 현경 초입의 고수가 한 명씩은 있었다.
당연히, 현경 초입의 고수가 있고 없고의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매우 큰 간격이 있었다.
현경 초입의 고수 한 명은 능히 화경의 고수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질 수야 있겠지만, 그만큼 강기를 멀리 발출할 수 있는 능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흐음, 등봉조극의 고수는 현경 초입의 고수 세 명을 동시에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허억-"
술렁-
회의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하물며, 태수 그 놈은 같은 등봉조극의 고수 중에서도, 가진 바 능력이 특별하다. 그 놈이라면 일반적인 현경 초입의 고수 5명도 능히 상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 녀석의 전투력은 나로서는 측정 불가다"
"그, 그렇게 강합니까?"
"내가 이 상황에 거짓말을 해서 뭣하나-"
화경의 고수인 팽철우는 당천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태수를 직접 마주한다면, 자신은 그야말로 태산 앞에 선 먼지와도 비슷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할 말을 정리한 팽철우는 정신을 추스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이런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직, 청사파는 무림맹에 공식적으로 소속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저희 세력들이 청사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대신 조건으로 남궁가와 그 동맹세력을 물리쳐주는 대가로 말입니다"
"...!?"
다소 파격적인 팽철우의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소란스럽게 들끓었다.
그의 말은 수백년 간 이어져왔던 정천맹의 역사를 한 번 뒤엎자는 말과도 같았다.
청사파의 밑으로 들어가, 남궁가를 무너트린다는 건 새로운 지배체계를 만든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이에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황은 팽철우의 의견이 괜찮았는지 합세했다.
그 역시, 반골의 기질이 강했는데 남궁가의 횡포에 여태껏 참으며 살아온 설욕을 잊지 못했다.
"팽 가주의 의견이 저 역시 확실히 괜찮다고 봅니다. 여태껏, 남궁가에 당하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지금 작태를 보아하니, 남궁가의 동맹세력들은 조만간 저희 세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그 태수라는 사람이 저희 후지기수 일행들을 살려두지 않았다면 저희는 매우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황보대산"
"나는 뭐- 자네들 의견에 따르겠네"
옆에 있던 황보대철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이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사실, 그는 이 사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듬직한 몸집과는 다르게, 그저 가문의 안위와 자식들의 안위가 제일 중요했다.
그것만 잘 풀린다면, 어딜 가든 딱히 상관이 없었다.
일단, 이 회의장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의장인 당우민의 생각이 아니라, 당천휘의 생각이었다.
제일 연장자이기도 하고, 현경 고수의 입김은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천휘는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말 청사파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꾸며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예전에 녀석과 약속했던 걸 그대로 저버리는 행태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언젠가 무림통일을 한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기회에 잘하면 정천맹을 얻을 수도 있을텐데, 한 번 꼬드겨볼까. 녀석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무림통일을 꿈꾸고 있던가-'
당천휘는 태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는 짓을 봤을 때는, 절대로 많은 피를 흘리며 강제로 통일을 이룰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최대한 적은 피를 흘리고, 힘을 한군데로 모아 이계의 괴물 침공을 막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일단, 지켜보자꾸나. 그리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로 인해, 남궁가 및 동맹세력들이 우리를 안좋게 보고 있다는 건 늘 있어왔던 일이었지만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남궁가 이상으로 새외무림과 천마신교가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흔들리면 무림맹도 우리를 넘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무림맹도 흔들릴 것이고 정사무림 전체가 위태롭게 된다"
당천휘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팽철우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팽가야, 네가 성격이 화끈한 건 알겠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정천맹 내부가 흔들리면, 무림맹이 우리를 넘볼 것이고 이후로 새외무림과 천마신교가 때를 보아 바로 침략해온다는 것을. 이것은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외인을 끌여서는 안된다. 그것이 가장 전략의 기초이지 않느냐"
"아아-"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말에, 팽철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푹 숙였다.
당천휘의 말은 수많은 전략 중에 아주 기초가 되는 말이었다.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인을 불러들이면 급격히 망조의 길로 들어선다.
당천휘는 그런 팽철우의 모습에,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혈기란 건, 때로는 부정적일 순 있어도 무인이었기에 대부분 좋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당천휘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걸 느낀, 의장 당우민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면 지금은 일단 남궁가의 눈치를 계속 보며 정천맹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동시에, 청사파와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진행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으신 분은 이 자리에서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의 의견을 수용한 듯한 당우민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이후, 당천휘는 따로 당우민을 불러들였다.
둘 밖에 없는 곳에서, 당천휘는 담담하게 당우민에게 물었다.
"아들아. 넌 무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이자 혼돈의 시기입니다.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회의장 안에서는, 일단 지켜보자고 말했다만. 언제까지고 모용가, 황보가, 팽가 녀석들이 우리의 말을 들어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
사천당문이 이 세 가문을 전적으로 믿지 않듯, 세 가문도 사천당문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단순히,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는 말로는 이 세 가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다.
사실 이번 사건에서도 사천당문은 피해를 볼 일이 없었다.
세 가문만 피해를 보는 입장이었고, 팽가는 그것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사천당문에 따지고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때가 오면 본격적으로 움직일지도 몰랐다.
"적당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해왔던 대로-"
"예끼!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격동의 시기이자 혼돈의 시기라고. 그게 과연 계속 통하겠느냐"
당천휘의 호통에 당우민의 입술이 오므라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호통은 여전히 겁에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너는 태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말, 그대로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엄청 강한 건 알겠습니다."
"에휴, 내가 자식교육을 잘못했구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화가 나겠지만 이건 너무 어이없어 화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일일이 다 떠먹여줘야 하는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손녀 사위를 보고 오면서, 느낀 점이 많다. 네 말대로 무림은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주인공은 난 태수라고 확신한다. 무림은 녀석에 의해 재편성될 것이야. 우리 사천당문이 그 격류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녀석이 만들려는 세상의 개국공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걸까, 아버지는.
당우민은 당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아버지의 속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해주겠다, 못난 아들아. 조만간, 기회를 봐서 사천당문은 태수가 이끄는 파천회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공식적이든, 공식적이든."
"파천회가 무림통일이라도 한다는 것입니까?"
"무림통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너무나 운이 좋게도, 려아를 녀석한테 시집 보내는 행운을 얻어냈다. 이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넘겨서는 안된다. 이것을 이용해 우리는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만 해. 녀석도 지금은 그걸 그렇게까지 꺼려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사천당문은 수백년 간, 지금껏 그 누구한테도 직접적으로 지배를 받지는-"
당우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듣다 못한 당천휘가 그의 말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아들아, 넌 정사무림과 새외무림, 천마신교가 왜 탄생했는지 아느냐"
"그, 그건-"
"원래, 무림은 하나였다. 혼원混元이라는 이름 하에, 정권이 세습되어왔고 모든 세력가와 문파는 이에 굴복해왔지. 하지만, 차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혼원 제국 말기에 저항하기 시작한 이들로 인해 세력이 분할된 것이었다"
"아버지, 그렇다면 그 말씀은"
"그래, 난 녀석이 이 분열된 무림을 옛, 혼원 제국처럼, 다시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
아버지가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이 정도로 높은 점수를 준 적이 있었나?
당우민은 시대의 주인공으로 태수를 채택하는 당천휘의 말에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태수의 무공을 한 번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다소 충격을 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태수를 향한 아버지의 믿음은 다소 맹목적이긴 해도-'
선언하는 듯한 아버지의 말에 당우민도 가주로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선택이, 사천당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