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천하십대고수天下十大高手이자 현경의 고수, 당천휘.
당문에서는 호탕하면서도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그의 성격 때문에 많이 애를 먹기도 했다.
당문 역대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후기지수 시절부터 선배들의 아우성에 도전했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오래 전부터 대단했다.
남궁세가와 함께 당문을 위로 끌어올림으로서, 급속도로 기울어가는 정천맹에 방지턱을 세워 막았다.
덕분에, 무림맹과 정천맹의 균형추는 얼추 나름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지금 86세라는 지긋지긋한 나이에도, 여전히 성격은 불같았으며 엉뚱한 곳으로 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그는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잘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당우민에게도 잘 웃는 법이 없었다.
당우민은 10살 이후로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거의 웃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당천휘는 과거의 명성이 무색하게 지금 너무나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려아야, 슬슬 남자한테 관심이 갈 나이가 아니니?"
"할아버지, 저는 아직 남자보다는 암기술에 더 관심있어요"
"그래그래, 암기술 좋지. 할아버지도 예전에는 그렇게도 암기술이 어려웠던 적이 있었단다-"
"할아버지가요?"
올해로 19살이 된 당가려는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문의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그 어떠한 당문의 무공도 막힘없이 배웠다고 한다.
그야말로 불세출의 천재였다고 들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암기술에 어려움을 겪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만천화우를 익히면서 '나는 왜 이렇게 재능이 없을까?'라고 많이 느꼈단다. 물론, 그 만천화우도 10일 만에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
"아-"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더니, 결국 본인 자랑이었다.
만천화우는 당문의 암기 비전 중 가장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역대급의 재능이라 해도 만천화우는 당연히 어렵게 배우는 것이 맞았다.
애초에 배우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할아버지의 말을 듣다보면 늘 비슷한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기승전 - 본인 자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런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많이 꺄르르- 웃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림도 없다.
"려아는 할아버지의 말이 재미가 없니? 할아버지 많이 속상해-!"
"아아-"
심지어, 이제는 애교까지 부리셨다.
당가려는 과한 할아버지의 편애가 그렇게 좋지 않은 건 아니면서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Level2 Monster Wave Start (사천) - 1:00:00]
괴물 군단의 침공 시간은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사천의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고, 당장에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쳐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맞춰 당천휘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다.
"려아야, 그래도 이 할아버지가 느낀 게 있다면 여자는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야 된단다"
"좋은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요?"
"할아버지는 려아를 생각하면서 과연 좋은 남자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었지"
당가려는 할아버지라면 충분히 저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 피로 얼룩진 무림에서의 좋은 남자는 무림 전체와 싸워도 지지 않을 남자, 바로 그런 천하제일인이 좋은 남자란다"
"천하제일인을 만나는 게 쉬울까요?"
"당연히 쉽지 않지!"
"그러면-"
"려아야, 그런 남자는 쟁취해야 하는 법이야"
"그런데, 전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암기술은 재밌는데-"
당가려는 들고 있는 수리검을 픽- 던졌다.
도약의 묘리가 담긴 수리검은 나무 앞에서 일순 사라지더니 나무 뒤에서 다시 나타나 바위에 꽂혔다.
"하하. 려아야 천하제일인이 려아의 연인이 될 수 없다면, 할아버지랑 이렇게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건 좀-"
당가려는 질색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에잇- 할아버지는 농담도 못 하더냐? 할아버지는 려아가 아주 참 좋은데-"
당천휘의 손녀 사랑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아쉽다, 아쉬워-'
당가려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후계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무공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하지만, 여자의 신체적 한계는 뚜렷했다.
아무리 내공이 그 차이를 좁혀준다 한들-
일류에서 초절정까지는 차이가 희석된다치더라도 화경으로 넘어가는 순간 남녀의 차이는 다시 현격하게 벌어진다.
가지고 태어난 바, 세맥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기强氣라는 강인한 내공의 정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강인하고 튼튼한 세맥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성의 가느다란 세맥은 주천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방대한 내공의 흐름을 쉬이 견디지 못했고 덕분에 화경에 이르더라도 강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화경이 그럴 진대, 현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정적으로 강기를 사용할 수 있을 때, 멀리 발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데, 강기를 발출하려고 한다면 반동에 의해 몸이 그대로 박살이 나버릴지도 몰랐다.
당천휘는 당가려가 여자로 태어나, 아쉬운 만큼 더욱 자신의 손녀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베풀어주었다.
그 덕에 당가려는 성격 모난 곳 없이 착하게 아주 잘 자라주었다.
더불어, 외모는 어떠한가?
'흠흠- 내 손녀지만 엄청 예쁘단 말이지'
"할아버지는 혹시 바라는 것 있으세요?"
"오냐, 이제 려아가 할아버지한테 효도하려는구나?"
"네, 그런데 할아버지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요"
"할아버지는 려아가 지금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구나.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천하제일인 같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겠지?"
"우으- 천하제일인은 너무 비현실적이네요"
"그렇겠지? 역시 할아버지랑 평생 같이 사는 게-"
"됐거든요?"
"할아버지 속상해!"
"..."
당가려는 과한 할아버지의 사랑과 애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각 지역의 고수들이 사천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당문과 친하게 지내는 정천맹의 가문들과 청성파와 아미파와 친하게 지내는 무림맹의 문파들이 그 예였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역시 천마신교의 공주였다.
그녀가 아미파와 청성파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인다는 소식은 이미 널리 퍼졌다.
과연, 천마신교 공주의 무공은 어느 수준일 것인가-
한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이렇게 모여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셀럽, 연예인, 유명인사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계의 침공과 무관한 일반인들도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기웃거리기도 했다.
[Level2 Monster Wave Start (사천) - 0:10:00]
사천으로의 이계 침공 10분 전.
당문은 당문의 세력지에 전투조에 따라 배치를 모두 마쳤다.
당문이 사천에서 관할하는 구역은 매우 방대했다.
그곳을 껴안듯이 전투조를 모두 배치했고, 당천휘와 당가려는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따로 위치를 배정해놓지는 않았다.
청성파와 아미파도 마찬가지로 배치를 모두 마쳤고, 천마신교의 공주 덕분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여기가 사천이구먼-"
"그렇습니다, 주군"
태수는 여자들은 모두 하운 마을에 두고, 길잡이 역할로 비류만을 데리고 왔다.
비류는 살수답게 나름 지리의 지식폭이 상당했다.
'사람들 엄청 많네?'
거미의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사람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사천을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직,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
"비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어차피, 괴물만 많이 잡으면 되니까"
"주군께서는 명성을 높이는 데에는 딱히 의의를 두지 않으십니까?"
"아니, 명성 높이는 것도 좋아하지"
"여기서 크게 활약을 하면 무림이 주군을 모두 주목할 겁니다. 그 어떤 단체에서든 주군을 얻기 위해 수많은 공을 기울일 겁니다"
비류의 말은 이곳에서 활약하여 무림의 존망을 쌓고, 대협이 되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림에 출타한다, 라는 표현도 쓰일 수 있었다.
태수로서는 무림에 처음으로 얼굴을 비춰주는 것이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비류, 그리고 난 누구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그 말씀은-"
"내가 새롭게 조직을 만든다"
"주군이라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현경인데, 누구 밑에 들어가. 못 들어가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현경이라 지칭하는 태수의 자신감 가득한 모습에, 비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주군-'
비류는 단언컨대, 주군의 주변에 쓸만한 인재가 많아지면 무림이 크게 뒤집힐 것이라 생각했다.
[Level2 Monster Wave Start (사천) - 0:00:10]
'10초-'
태수를 포함해 사천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하늘에 적혀있는 시간에 닿았다.
이미 한 번 경험했으면서도 긴장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Level2 Monster Wave Start(사천)]
-Start!
이계의 침공을 예고하는 시간이 끝났고, 우중충한 사천의 하늘은 곧 수많은 마법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 속에 수많은 이계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Level2 고블인(咽)]
...
...
오코보다는 덩치가 작은 수많은 고블인들이 떼거지로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블인은 판타지의 고블린을 배경으로 만든 몬스터로 다른 점이 있다면 입이 굉장히 컸다.
꺄아아아악-
사천에 살고 있던 평범한 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Level1 그 당시와는 달리 주변에 무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사천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은 다른 지역으로 잠시 대피를 가는 게 어떻나, 생각해보았지만 이렇게 무림인들이 많이 있는 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얼추 들어맞았다.
미리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무인들은 순식간에 고블인들을 도륙해나가기 시작했다.
"와아-"
"저게 천마신교 공주의 힘이란 말인가?"
홍희, 그녀의 힘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Level2 고블인이 약한 것도 한몫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무공은 확실히 차별점이 있었다.
'공간참空間斬'
그녀의 창이 기이하게 휘둘러졌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고블인들은 갈라진 균열 속에 몸 내부가 뒤흔들리는 걸 느끼며, 그대로 사지가 분해되어버렸다.
수십마리의 고블인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버리니, 사람들은 천마신교의 공주 곁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
괜히, 억울하게 휘말릴 수 있을 여지가 있을 정도로 그녀의 초식 범위는 상상초월이었다.
"려아야, 이게 만천화우란다-"
당가려는 매우 보기 드문 만천화우를 할아버지의 손 끝에서 펼쳐지는 걸 직접 볼 수 있었다.
사실, 만萬 가짓수가 넘는 암기를 모두 던지는 건 굉장히 과장된 표현이었다.
다만-
하늘 위를 가득 메운 암기는 실로 만萬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개미떼와도 같았다.
그 암기들은 하나하나가 강기强氣를 머금고 있었고, 주변의 고블인들은 저항도 없이 암기에 부딪치는 족족 몸통이 박살나버렸다.
단 하나의 암기가 네댓 마리의 고블인들을 저승으로 끌고갔다.
한 차례 모래폭풍과도 같은 암기의 폭풍이 고블인들을 쓸고갔고, 그 자리에는 잘게잘게 썰린 고블인의 흔적만이 남았다.
"할아버지, 멋지지?"
"엄청나네요, 만천화우. 저도 사용할 수 있을까요?"
"흉내내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할아버지한테 지금 배울래?"
"네, 배울래요"
당천휘는 암기술에 대해 무한한 흥미를 보이는 손녀가 그저 귀엽기만 했다.
한 차례 쓸어버렸으니 주변 일대의 괴물들은 없을 것이다.
자, 그러면 무공을 가르쳐주는 핑계로 손녀와 오붓한 시간을-
'이 감각은-'
순간, 당천휘의 감각에 찌릿- 하고 걸리는 게 있었다.
'최소, 현경의 고수잖아.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기척이 아니다'
당천휘는 천하십대고수라 불리우는 이들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마주친 적이 있었다.
심지어, 베일 속에 가려진 그 천마신교의 천마마저도 후지기수 시절,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충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쁘게 질척거리고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려아야, 할아버지를 따라오거라"
"할아버지, 만천화우는요?"
"그건 조금 이따 알려주겠다"
당천휘는 무림에 새롭게 등장한 현경의 고수가 궁금했다.
86세가 되어서도 고수의 만남은 언제나 그에게 그럴 듯한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흐음?"
당천휘는 갑자기 기척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기척을 읽어낼 수 없다고? 설마-'
현경의 고수라 추측되는 자의 기척은 갑자기 사라졌지만, 그 옆에 있던 자의 기척은 여전히 유효했다.
"려아야, 따라오거라"
"네, 할아버지"
당천휘는 곧 자신이 읽어낸 기척들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자력으로 찾았다기보다는 그 두 명이 걸음을 멈춰세운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뭘, 그렇게 쫓아오실까-"
주사만침蛛絲萬針으로 주변 일대의 고블인들을 대부분 독식한 태수는 곧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주사만침을 사용한 순간, 방대한 내공이 발출되는 바람에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 이후로 기척을 감추긴 했어도, 아마 옆에 있는 비류를 통해 계속 추격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후후- 네 놈이었구나. 무공의 경지를 읽어낼 수 없는 걸 보아하니,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구나-"
"그런데?"
"예의없는 녀석. 비무 신청이다"
"거절한다면?"
"끌끌- 정말 무림의 존장에 대한 예의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구나"
당천휘는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새파랗게 어린 고수와 싸워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미친 노인네, 갑자기 찾아와서는 뭐지?'
태수는 어이없다는 듯, 강기를 머금고 날라오는 암기를 바라보았다.
강기를 발출할 수 있는 걸 보아하니 의심의 여지없이, 이 노인네는 현경의 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