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진무의 목 주변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쌍욕이 목 근처까지 나왔지만, 태수가 눈빛을 보내자 그나마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가능했던 진무였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이성을 내려놓는 일이 자주 있으면 곤란하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지도 않고, 급한 마음에 나한테 뒤를 봐달라고 한 건 아니겠지?"
"하으읏-!"
"...!"
태수는 대놓고 보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혜수의 음부를 쓰다듬었고, 그녀의 달뜬 신음소리와 함께 진무의 눈에 그녀의 젖은 음부가 보였다.
진무는 표정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가 않았다.
태수가 이런 자신을 어떻게 보고있을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닙니다"
"괜찮아, 뭐든 익숙해지면 된다. 이제는 자주 볼 사이인데, 굳이 장소를 바꿀 필요는 없겠지?"
"그, 그건- 하아, 알겠습니다"
진무는 혜수 건에 대해 완전히 체념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년?
이제는 뭐,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자에게 붙은 시점에, 뭘 더 신경쓰랴-
살기 위해서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추잡하더라도 최대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것은 아버지의 연이 닿는 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음으로서 무언가 밝혀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복수심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그것이 밝혀지는 걸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이긴 합니다"
"진사가 죽음으로서, 내가 추후에 밝혀낼 수 있는 것들이 두렵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만- 아마 이 여자의 접근도 불허된, 오직 아버지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 문서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문서에 그들이 두려워 할 내용이 적혀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진무가 혜수를 힐끗 보며 말했다.
"너는 진사와 같이 일하면서, 진사가 뭔가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느냐?"
"그 사람에게서 늘 벽 같은 게 느껴지긴 했어요.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항상 차갑게 선을 유지하려고 했었죠"
'흐음-'
곰곰히 생각한 태수는 진사의 업무실을 가보지 않는 이상, 이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외에 더 말할 게 있나? 이것가지고는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며 찾아 올 이유가 많이 빈약하거든"
"결정적으로 그들의 뒷배경이 문제가 됩니다. 인맥이 넓으신 아버지는 여러 문파에 금전적으로 후원하며 연대해왔습니다. 덕분에 전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가 육합검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태수의 주사강막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던 절기, 대선차륜도 육합검법의 초식이었다.
"아버지의 친우들은 옆으로는 하오문과 전진파와 연대하고 있고, 위로는 청성파와 점창파와 연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의 아들들은 그 문파에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은원으로 엮이게 되면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호오-"
거대 문파의 이름들이 속속이 진무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들 개인을 처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문파 전체를 상대로 은원 관계에 얽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된다.
'내가 진사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진사와 연이 깊은 문파의 원수 관계가 되는 건가-'
"그러면 너는 그 문파들과 척을 지는 것보다도, 나 개인에게 복수하려는 것 자체가 더 두려웠다는 말인가?"
"부끄럽습니다만, 정확히 그렇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진무였다.
본인이 느끼고 있을 무력감이 상당한 듯했다.
"그렇게 자책할 것 없다. 오히려, 넌 선택을 잘하면 잘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 말에 진무는 그나마 괜찮아졌는지, 표정을 풀었다.
진무는 확신을 얻기 위해, 전부터 궁금해왔던 것에 대해 물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봐라"
"도대체, 당신의 무공 경지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공 경지라-"
태수는 자신의 무공 경지에 대해 확 집어서 표현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화경 이상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설정 상으로만 보면 현경이라고 해도 무방하긴 한데-'
"제가 지금껏 운이 좋아 초절정이라 불리는 많은 고수들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만- 단언컨대 당신처럼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화경의 고수는 보지 못했나?"
"화, 화경의 고수는 너무 드물지 않습니까?"
밤꽃무림 설정집을 참고하자면-
무공 경지는 간편하게 삼류 - 이류 - 일류 - 절정 - 초절정 - 화경 - 현경 - ???(자연경, 조화경, 생사경, 우주경)으로 나뉘고 있었다.
그 중, 일반적으로 일류부터 기氣를 다루는 게 가능했고, 화경부터 강기强氣를 다루는 것이 가능했다.
그 차이는 익히고 있는 심법의 소주천과 대주천을 얼마나 빠르게,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소주천을 완성하면, 기氣가 형성되었고
대주천을 완성하면 강기强氣가 형성되었다.
대략 밤꽃무림 세계관에 존재하는 화경 고수의 숫자는 대략 오백인五百人.
현경으로 좁히면 그 숫자는 현격하게 줄어든다.
현경 고수의 숫자는 대략 십인十人으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하십대고수天下十大高手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경지는 과연 어떨까?
사실, 밤꽃무림 설정집에서도 따로 이것에 대해 정확한 설정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어느 성향인지에 따라 자연경, 조화경, 생사경 혹은 우주경으로 나뉘고 있었다.
즉, 무공 수준이 낮을 때는 비슷비슷하지만, 무공 수준이 심후해질수록 특색이 두드러진다는 것이었다.
공식 설정 상으로는 현경을 뛰어넘는 경지에 오른 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제작자의 언급은
-밤꽃무림을 플레이하는 많은 유저 분들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셔서 밤꽃무림의 수많은 히로인을 주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러했고, 이 멘트는 수많은 유저들에게 환호를 받기도 했었다.
"흐음-"
태수는 축기의 목적이 아닌, 발기發氣의 목적으로 청독각마공을 대주천으로 운용했다.
자연스레 태수의 기세가 끌어올려지며 근처에 있던 진무가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비교적 멀리 있긴 해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혜수는 압박감에 이불을 뒤덮고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이, 이건-'
지금껏 긴가민가 했지만, 이걸 보고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화경의 고수 이상임을.
구결에 따라 내공이 혈도를 지났고, 순식간에 소주천, 2주천, 3주천.. 대주천이 완성되었다.
태수의 몸에서 발현되는 기운은 더욱 강력해졌고, 태수는 그 기운을 손바닥 위로 끌어올렸다.
"이걸 강기라 부르겠지? 강기를 형태 변환하거나 도검창의 몸신에 두를 수는 있지만, 멀리 발출하지 못하는 수준까지가 화경일테고-"
'순수한 내공의 결정체- 아, 아름답다'
진무는 몽롱한 눈빛으로 태수의 손바닥 위에 형성된 푸른색의 강기를 넋놓고 봤다.
수많은 무인들이 저걸 다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던가?
저걸 다루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무공을 배우는 무인들이 산더미처럼 깔려있었다.
그 중, 진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현경의 고수는-"
태수의 몸 속에서 강기를 머금은 두꺼운 실들이 출사되었고, 실들은 태수의 몸 주위에서 바람에 의해 넘실거리는 풀처럼 살랑살랑거렸다.
"이렇게 멀리 강기를 발출하는 것이 가능할테고-"
쾅-!
강기를 머금은 실은 숙소 밖에 저 멀리 있는 바위로 순식간에 출사되어 단번에 박살내버렸다.
"말, 말도 안돼-"
진무는 박살난 바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무려, 현경의 고수였다.
자신은 지금 천하십대고수와 버금가는 고수를 직접 눈 앞에 두고 무공 시연까지 보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복수 이전에 무인으로서 태수에 대한 동경심이 마구마구 일기 시작했다.
"물론, 현경의 고수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겠지만 일단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이 정도면 현경 초입에서 중간 단계로 볼 수 있으려나.
태수는 자신의 경지에 대해서는 현경의 고수를 직접 만나 겨뤄봐야 그 단계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조금 도움 되었나?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의심 할 필요도 없겠지. 네 판단에 확신을 가져라"
"충, 충분합니다. 아니, 너무 넘칩니다. 현경의 고수는 겨우, 변방의 네댓 문파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무림 전체와 싸워도 말릴 수 없는 게 현경의 고수라 들었습니다!"
진무가 신이 난 듯 말했다.
마치, 어린이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만화를 보고 좋아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후로 너는 몸조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그래, 그들이 널 노릴 수도 있다"
"그래도, 제 숙부나 다름없는 분들입니다. 단지, 심증만 가지고 저를 어떻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꺼림칙한 일이 있을 때, 살수 부르는 걸 엄청 좋아하더군. 내가 밝혀내는 걸 그들이 두려워하는 정보 중, 유력한 하나는 자신들이 관의 정보력으로 살수 단체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다는 흔적들일 거야"
"살, 살수 단체까지야-"
진무는 설마 그렇게까지 아버지가 손을 벌려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친우들이 무언가 뒤에서 모략을 하긴 해도, 마을 뒷돈이나 굴리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깊게 파고들면 무림맹과도 연결되어 있는 일들이니, 나도 대놓고 무력행사 할 생각은 없다. 그들도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오겠지-"
"알, 알겠습니다. 몸조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군. 은원 관계가 얽히고 얽혀있어-'
태수의 머릿속이 얽히고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은 채, 꼬여있었다.
단순히, 진사의 친우들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뒷배경인 수많은 문파들이 얽혀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이 일을 공식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낸 후, 정파무림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무림맹에 보고해 처분을 맡기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이런 전개가 두려워 분명 어떻게든 방해를 해오거나, 심하게는 암살까지 감행해올 게 분명했다.
"진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문파에 금전적으로 후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
광서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하운 마을 몫인 마을지원금이 하사되었다.
그 마을지원금에는 다양한 품목들이 존재했는데, 마을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과 먹을 수 있는 식량 등이 대량으로 있었다.
사치품인 금은보화 같은 경우는 소소하게 담겨있었다.
'진사는 마을사람들한테 이런 걸 나눠준 적이 거의 없었지-'
전부 다 진사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문파에 금전적으로 후원했던 게 가능했던 것이겠지.
"이제는 모두 주인님 것이에요, 후훗-"
형식적으로 하운 마을의 대리인은 혜수였고, 혜수 이름으로 마을지원금이 하사되었다.
당연히, 혜수는 자신의 직책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주인님, 태수에게 주기로 했다.
"마을사람들 쓰라고 나눠준 건데, 내가 가질 수는 없겠지-"
"역시, 주인님은 착해"
혜수는 다시 한 번 반했다는 듯, 눈에 하트 모양을 띄웠다.
마을지원금을 받는 광서에서의 마지막 일정이 끝났고, 이제 하운 마을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날씨가 좀 그렇긴 하네"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긴 한데-
그런 것과 별개로 하늘은 매우 우중충했다.
"설마-?"
이계의 침공.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침공은 언제 시작하나? 라는 생각도 최근 들어 자주 하곤 했다.
"혹시 모르니, 광서에서 더 지내고 가는 건 어떻겠나?"
철영을 비롯해 마을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출발 준비를 다 마쳤지만 갑작스레 변한 날씨에 의욕을 상실했다.
괜히 비라도 오면 출발부터 분위기가 암울해지지 않겠는가-
"아뇨,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
"불길합니다. 어서 하운 마을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뭐 우리는 믿고 따라야하겠지"
마을의 어른이나 다름없는 철영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을사람들도 그에 응했다.
'만약에, 정말로 이계의 침공이 시작된다면 소혜와 달자가 위험해져-'
광서 같은 번화가는 어차피 자신이 없어도, 무림맹 광서지부에 속해있는 무림인들로 인해 피해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운 마을 같은 외진 구석에 있는 마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광서지부 무인들이 곧 지원을 오겠지만, 이미 마을은 큰 피해를 입고 난 이후일 것이다.
"저, 저기 하늘에 무슨 글자 같은 게 보이는데?"
"어, 정말이네. 뭐지?"
광서에서 하운 마을로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마을 호위대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에 계속 신경쓰고 있는 나머지, 하늘에 갑자기 생긴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수도 계속 하늘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하늘에 생긴 글자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Level 1 Monster Wave Start - 2:00:00.. 1:59:59.. 1:59:58]
"괴물 군단 1단계 시작 2시간 전?"
"시,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어"
비록 영어로 되어있지만, 사람들은 이 언어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이계 침공의 때가 왔나보다.
우중충한 하늘에 글자가 적혀있는 장면은 디아블로 사가 '밤꽃무림 - 이계편'을 프로모션하고 처음으로 홍보했을 당시 보여주었던 장면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 시간이 0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만 합니다"
끄덕끄덕-
대재앙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에 호위대는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타고 있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Level 1 Monster Wave Start - 0:02:00]
"이, 이제 2분밖에 남지 않았어-!"
"마, 마을은 아직인데!"
태수는 착잡한 심정으로 지금 현재 위치를 가늠했다.
이 속도라면 대략 1시간은 말로 더 달려야만 했다.
'애초에, 3시간 만에 광서에서 하운으로 간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지-'
[Level 1 Monster Wave Start - 0:00:10]
설상가상으로 이계의 침공 10초 전, 태수의 일행을 막는 자들이 나타났다.
야행복과 복면을 착용하고 있는 이들은, 오랫동안 이 길목에 매복해 태수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광서 안에서는 일을 처리하기 곤란하니, 이렇게 인적이 드문 길목에서 일을 벌이려는 걸까.
태수는 이들을 누가 보낸지 알 것 같았기에, 욕지꺼리가 입에 터져나왔다.
"니들은 상황파악도 안되냐! 바보 같은 새끼드라아아아-!"
그리고-
[Level 1 Monster Wave Start - 0:00:00]
-Start!
눈 앞에 살수들을 두고, 마침내 이계 침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