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밤꽃무림 세계에 갇히다
여인은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는 듯 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였고, 거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아마, 체력을 보충할 장소로 이곳을 정한 듯 싶었다.
문제가 있다면 무공을 어느 정도 익혔음에도 너무 정신없는 나머지,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태수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무 밑 그늘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태수는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상처입은 여인에 침을 꿀꺽 삼켰다.
멀리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다.
희고 고운 백옥 피부에, 붉은 입술.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 굴곡진 몸매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지금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괜히 자극하다가 칼침을 맞을 수도 있기에 태수는 조심스러웠다.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기회다! 하고 기습적으로 다가가서 섹스를 시도해볼 수도 있겠지만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상태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볼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만, 나 이런 생각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데. 여긴 게임이 아니라고'
그리고, 자신이 방금 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곧 깨달은 태수였다.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엄연히 현실이었다.
현실 속에서 여자와 강제로 관계를 맺으면, 어느 곳을 가나 문제가 되는 건 당연했다.
함부로 몸을 굴리다간 고추가 잘려버릴지도 모르는 일.
'그래, 현실처럼 생각하자, 현실처럼.'
'그런데,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쫓아오고 있다면?'
생각대로라면 지금 이곳은 굉장히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 여인이 추격해오던 상대를 완전히 떨쳐냈는지 오랫동안 그런 일은 없었다.
'어떻게 다가가지? 말을 걸면 엄청 경계하겠지? 일단, 언어는 통하려나-?'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한국어 패치 버전으로 이세계에 접속했으니까, 배경은 무림이어도 한국어로 소통하겠지.
일단,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인이 자신을 엄청 경계할 것만 같았다.
태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
"저기요. 아, 전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경계 안하셔도 돼요"
스윽-
"..?"
태수가 '저기요'라는 소리를 내자마자, 풀숲 바닥에 축 늘어져있던 여인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벌떡 일어났다.
상처를 입은 여인은 반사적으로 태수가 자신을 추격해오던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수가 두 손을 들며 적이 아니라는 의사를 표현했고, 여인도 태수의 생김새나 분위기가 자신이 상대하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인지했다.
여인은 품 속에 꺼내들려고 했던 비수를 스윽- 내려놓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긴장의 끈을 풀 수는 없었다.
태수의 어투는 무언가 굉장히 어색했다.
말하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억양이 좀 특이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눈에 수상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와, 대박.."
"뭐가 대박이라는 거죠?"
"아, 아닙니다"
태수는 벌떡 일어난 그녀의 몸매에 자연스럽게 감탄을 표했다.
속으로 해야 할 말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입으로 바로 나올 만큼 그녀의 몸매는 비현실적이었다.
원래도 타고난 몸매였겠지만, 수많은 무공 훈련으로 다져진 그녀의 몸매는 그야말로 굴곡의 세계였다.
풍만한 가슴에 희고 고운 백옥 피부. 그 밑으로 펼쳐지는 굴곡들. 자로 재보고 싶은 골반.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히야, 저 몸을 쟁반 삼아 회 올려놓고 먹고 싶다..'
태수는 최근에 보았던 일본 야동이 떠올랐다.
여배우가 나체로 누워있고, 그 위에 갖가지 회를 올려 먹는 장면이었는데 정말 군침이 돌았지.
유두에 올려진 회를 남배우가 아예 입을 가져가 젖꼭지를 빨며 후루루- 회를 먹는 장면은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다.(젖꼭지를 빨 때, 여배우의 신음소리도 꼴림에 한몫했다)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잖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정신을 잠시 못차린 태수는 포커페이스를 하며, 자신이 굉장히 안전한 사람이란 걸 어필하기 위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그 미소는 굉장히 어색해보였다.
여인은 더더욱 태수를 수상하다고 여겨, 처리를 어떻게 할 지 고민했다.
아직, 자신은 추격을 완전히 떨쳐낸 상황이 아니었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잠시 쉴 곳을 찾아 이곳에 누워있었을 뿐이었다.
'무공을 익히진 않았어. 뭔가 수상해보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아. 흐음- 이 남자를 어떻게 하지?'
"저기요. 혹시, 길 좀 물을 수 있을까요?"
여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태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길?"
"아, 네. 길을 잃어버려서요"
"길을 왜? 아, 아니에요"
"사람이 있는 마을을 가고 싶은데, 혹시 방향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여인은 태수에게 길을 잃은 이유를 굳이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딱 좋게 흘러가는 듯 했다.
태수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여인은 태수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우고는 대답했다.
"이쪽 방향으로 가면 아마 사람이 살고있는 마을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태수는 여인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 믿을 순 없겠지만, 어차피 믿져야 본전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대충, 립서비스를 한 태수가 여인을 몇 번 살펴보더니 이내 등 돌려 가리킨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인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태수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완전히 속인 건 아니니까-'
태수가 가고 있는 방향은 실제로 사람이 살고있는 마을이긴 했다.
다만, 자신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그 남자에게도 딱히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녀는 정파 무림인으로서 갖는 도덕성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다.
다만, 그녀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굳이 태수에게 최악의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사실, 그런 일이 일어나든 말든 자신은 책임질 생각이 없지만 말이다.
태수는 여인이 가리킨 방향대로 걸으며, 느낌이 별로 좋지 않음을 느꼈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추격당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어. 혹시 시간을 벌기 위해, 나한테 추격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보낸 걸 수도-'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아주 조금의 단서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정말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대책이 없다.
남이 파놓은 함정이라고 해도, 일단 웃는 미소로 그렇게 안내를 해주었으면 가는 게 상책이었다.
사아악-
태수가 그렇게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젠장-'
태수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대한민국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비록 '밤꽃'이라는 단어가 붙긴 해도 무림이지 않은가?
위험한 분들을 만나면 괜히 칼침을 맞게 될 지도 몰랐다.
예상대로 여인을 쫓던 추격대는 울창한 숲을 이용하여, 몸을 은신하듯 속보로 걸으며 거리를 좁히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추격 도중 여인의 놀라운 타개 능력으로 거리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추격대 인물 중에, 추적에 능한 능력을 갖고 있는 자가 있어 지속적으로 여인을 추적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마저 여인이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힘들어질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무공을 익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군. 정말로, 일반인이거나 무공을 숨겼거나. 둘 중 하나겠군"
"직접 심문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사사삭-
추격대의 대장, 우태를 비롯한 추격대원 6명이 태수를 에워쌌다.
그 일은 태수가 느끼기에 체감상, 단 1초도 안되어 일어났으니 겁 먹은 태수는 두 발로 서는 것조차 힘들어할 정도로 전신이 떨렸다.
'아니, 갑자기 뭐지-?'
검은 복면인의 사내들이 갑자기 자신을 에워쌌다.
설마 했는데, 정말 생각했던대로 추격해오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방향을 이곳으로 알려주었나?
"물을 게 있다. 제대로 대답하면 이걸 주지"
우태는 벌벌 떠는 태수 앞에 다가가 품 속에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태수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우태가 건넨 책으로 향했다.
책은 굉장히 낡았는데, 책 표지에는 '청독각마공(靑毒蛛魔功)'이라고 적혀있었다.
해석하자면 푸른 독거미 마공이었다.
"너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도 이것만 보면 강해질 수 있겠지. 자, 대답해라. 약관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여자를 보았느냐? 적잖은 부상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을텐데-"
태수는 복면인의 사내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분위기가 뭔가 꺼림칙하긴 해도, 진실을 말하면 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알 수 없는 저 무공비급까지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태수는 복면인의 사내에게 여인이 도망간 방향을 알려주었고, 복면인 사내는 태수의 눈을 몇 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자가 한 말은 사실이다. 다시 추격 준비에 나서도록"
"알겠습니다!"
"저, 혹시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태수의 말에 우태는 그저 말없이 서있었다.
그런 태도에 태수는 물어보는 걸 허락한다는 것으로 여겼다.
"혹시,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은 어느 방향인가요?"
"걷고 있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광서의 작은 마을이 나올 것이다"
우태가 그렇게 말하며, 아까 말했던 청독각마공 비전서를 태수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태수는 반사적으로 고맙다고 말했고, 우태는 그런 태수에 피식 웃으며 다시 추격에 나섰다.
'흐음- 이 사람들 생각보다 괜찮은데?'
순식간에 멀어지는 우태의 등을 바라보며, 태수는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목에 붙어있던 머리가 날라가는 건 아닌가 했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공비급을 얻었고 마을 위치와 이름을 비교적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게 과연 쓸만한 무공비급인지는 모르겠지만'
복면인들이 절대로 좋은 무공비급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당장에라도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 뭐라도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란 말이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의 첫장을 넘기자, 영혼에 각인되듯이 청독각마공에 대한 정보가 태수의 머릿속으로 주입되었다.
[청독각마공]
-청마산에 서식하고 있는 요괴 청마지주의 호흡을 본따 만든 호흡법.
-무림인들은 청마산 근처 방대한 정기를 흡수하며, 막대한 내공을 지닌 청마지주를 보며, 저 호흡법을 따라한다면 내공 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호흡법을 시도해보았으나 모두가 미라가 되버리는 참혹한 결과만이 남았다.
'뭐야, 이 말도 안되는 무공은..'
게임 시스템 덕분에 가감없이 청독각마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더 강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심과 호기심으로 인해 청마지주라는 괴물 거미의 호흡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나름대로 호흡법이 창안되었으나 그 호흡법을 시도해 본 무림인들은 모두 몸 깊숙히 살이 타들어 미라가 되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그 복면인들은..!'
조금은 좋게 본 걸 완전히 수정하겠다.
완전히 천하의 개쓰레기 같은 놈들 아니던가?
정보가 궁금했으면, 정보만 물을 것이지. 왜 아무 잘못 없는 사람 죽일려고 이런 라면받침대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책을 준단 말인가?
태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청독각마공에 대한 정보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주입되었다.
-청독각마공을 인간이 익히지 못하는 이유는 성취가 낮을 경우, 몸이 타들어가는 증상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단번에 성취를 대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청마지주의 방대한 내공에 대한 비밀을 엿보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청독각마공을 대성하게 되면 몸이 타들어가는 부작용이 사라지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거미 특유의 감각이 활성화되며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호오-?"
'완전히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태수의 얄팍한 잔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