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 / 0052 ----------------------------------------------
[부인함락]
12시.
오늘 부인과 한 점심 약속을 위해 나는 최대한 깔끔한 옷차림으로 부인의 댁, 현관 차임벨을 눌렀다. 그러자 딩동 하고 여느 평범한 가정집의 차임벨 소리가 복도 가득 울려 퍼졌다.
그래,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차임벨 소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게 있어서, 이 차임벨 소리는 폭풍우 속에서 치는 천둥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우렁찬 천둥소리 말이다.
“후우.”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숨을 들이켜고 내쉬고를 반복하는데, 문득 인터폰을 통해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세현 씨.]
이 말과 동시에 안쪽에서 서두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
“오셨어요?”
그러자 내 눈에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청초한 얼굴에 하얀 살결의 풍만한 가슴이 내 시선을 흐려놓았다. 나는 옅은 푸른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부인의 모습에, 시선을 어디다가 두어야할지 몰라 본능적으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아, 역시 아줌마가 이렇게 입는 건 좀 별로죠?”
이처럼 내가 시선을 피하자, 부인은 왠지 모르게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행동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내가 무어라 입을 열려하는데, 부인이 재차 입술을 벌려 말을 이었다.
“저도 참 주책없게……. 얼른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러면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잘 어울립니다.”
“저, 정말로요?”
“정말로요. 당장에라도 예나 씨에게 청혼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네?”
“아…….”
급한 마음에 그만 말실수를 해버린 나는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획 하니 돌렸다. 그리고는 혹여나 부인이 날 밉게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눈동자를 슬쩍 부인 쪽으로 돌려보니, 다행스럽게도 이런 내 우려와는 반대로 부인은 무척이나 기뻐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현 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뻐요.”
라면서 수줍게 웃어 보인 부인은 나를 은근하게 바라봐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내 옷차림을 위에서 아래로 한번 훑어본 부인은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현 씨도 오늘 정말 멋져요.”
그 칭찬에 속으론 미칠 듯이 기뻤지만, 나는 애써 겉으론 담담한 척 하며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례적으로 서로의 옷차림을 칭찬한 나는 부인과 함께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옷은 왜 갑자기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 부인과 단둘이 있으려니 온갖 망상이 떠오른다.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바람에 구조될 때까지 부인과 질펀하게 섹스를 한다던가,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피해 부인의 엉덩이를 주무른다던가 말이다.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망상에 나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이러한 화제를 꺼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동창회에 가게 되어서요. 조금 점잖은 옷을 입고 가고 싶은데, 대학시절에 입던 옷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남편은 일로 바쁘다보니 아무래도 부탁할 사람이 세현 씨 밖에 없네요.”
이리 말한 부인은 살짝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진한 분홍빛 입술을 벌렸다.
“……혹시 제가 세현 씨에게 실례를 한 걸까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마침 회사에 휴가도 냈고, 할 일도 없었던 참이었으니까요. 심심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차였습니다.”
이 말에 부인은 그제야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라고 말하던 부인이 돌연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다시 물었다.
“……아! 그런데 휴가를 내셨다는 건, 뭔가 따로 약속이 있으셨단 게 아닌가요?”
“있긴 있었습니다. 그런데…….”
“……?”
잠시 내가 말을 멈추자 부인은 이 다음이 무척이나 궁금하단 듯이 호기심이 짙게 서린 시선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소동물을 연상시켜, 내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이 고양된 기분을 한껏 맛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취소되었습니다. 같이 휴가를 내기로 한 친구 녀석이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휴가를 못 냈거든요. 덕분에 이번 주는 시간이 널널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나 씨.”
이렇게 말한 나는 부인의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혹시 뭔가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세요.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바로 옆집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죠.”
“세현 씨…….”
이런 내 말에 감격한 모양인지, 부인은 물기가 서린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홍조를 그렸다.
그 솔직한 모습이 굉장히 사랑스럽다.
“고마워요, 세현 씨.”
부인은 진심을 담아, 내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 태도에서 강한 신뢰가 느꼈다.
그렇다, 부인은 지금 나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옆집에 사는 좋은 이웃이 아닌 남들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한 이웃으로서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군요. 옷을 고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요. 게다가 동창회에 입고 나갈 옷이니까, 남들 눈에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면 비싼 옷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들 눈에 얕잡히다니요! 괜찮아요. 다들 동창이고, 아줌마가 비싼 옷을 입어봤자 괜히 주변에서 흉만 볼 거예요.”
부인은 무척이나 곤란해 하는 표정을 띠우며 말했다. 이에 나는 무척이나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예나 씨,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게다가 남편 분의 체면도 생각하셔야죠.”
“그 이의 체면이요?”
“그렇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어느덧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부인과 함께 내 차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나 씨의 옷차림이 후질구레하다면 분명 남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남편 분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이죠. 속된 말로 돈 못 버는 무능력한 남편이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단 겁니다.”
“아…….”
“하지만 예나 씨의 남편 분은 잘 나가는 대기업의 사원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이런 식으로 얼토당토 않게 오해를 받게 된다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 그렇군요…….”
이런 내 말에 일순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어둡다. 또한 그 눈동자에는 우울한 기색이 가득해, 뭔가 굉장히 무기력해 보였다.
그런 부인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재차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해보세요, 예나 씨.”
이런 내 말에 부인은 잠시 고민어린 기색을 띠워 보이더니, 이내 용기 내어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사실 통장을 그 이가 관리하고 있어요. 카드 같은 것도요.”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합니까?”
“필요한 생활비만 남편이 따로 제 통장에 넣어줘요. 그런데 지금이 월말이라 통장에 남은 돈이 얼마 없어요.”
“신용카드는 안 쓰십니까?”
“네, 아무래도 체크카드가 있다 보니…….”
부인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존감이 아래로 떨어지다 못 해, 바닥에 내리 꽂힌 모습이었다.
이 모습에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어째서 남편 분이 통장을 관리하는 겁니까?’라던가 ‘남편 분에게 전화해서 돈을 더 달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것을 꾹 참았다. 구태여 이런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만약에 내가 이 문제를 건드려서 좋게 해결이라도 된다면, 이들 부부 관계만 더 좋아질 뿐이었다. 나에겐 하등 도움이 될 게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질문을 하는 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나는 슬쩍 웃으며 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런 내 갑작스런 행동에 부인은 앗!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 안에는 놀람과 어렴풋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그걸 본 나는 확신했다.
부인은 지금 내게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내가 풀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예전처럼 말이다. 나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부인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옷값이라면 제가 대신 내드리겠습니다.”
“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리 말한 나는 여러 변명들을 늘여놓으며 부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자기 아내한테 신용카드 하나 쥐어주지 않는 남편이라니…….’
완전히 가정부나 다름없는 취급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가정부보다도 더 심한 처사였다. 월급도 주지 않으면서 부부라는 이유로 잠자리까지 강요하니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거의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자기 아내를 무급여로 부려먹는 가정부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돈 걱정 말고, 마음껏 골라보세요.”
“아뇨, 아무리 그래도……. 돈은 다음 달에 꼭 갚을게요.”
라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부인의 태도에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어보이며 차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내 친절에 부인은 사양 않고 차에 올랐고, 나는 곧장 차문을 닫으며 운전석에 탔다.
쌜 님 : 전 항상 해피엔딩을 지향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