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52화 (55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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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명, 죽다

해가 중천에 뜬 날.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날.

하북팽가에는 수많은 손님이 모였다.

강호에서 이름을 얻은 수많은 이들이 가득했고, 심지어 손님 중에는 마교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황궁조차도.

정사마, 심지어 관에서조차 손님이 모여 있으니, 이들이 과연 무엇을 하려고 모인 것일까?

"신랑, 천무명. 신부, 팽유월."

금우성은 팽가의 정문에 걸린 큼지막한 현수막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 이름이 천무명."

"뭐라고요?"

옆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금우성은 고개를 돌렸다.

"이보세요. 당신 이름은 어떻길래 천 공자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거죠?"

"...누구시오?"

"남궁유린이에요!"

"유린아! 크윽…. 죄송합니다, 대협. 동생이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좋아한다니, 오해할 말 하지 마. 결혼하는 사람한테 부정타게 무슨 소리야?"

"...남궁패? 남매인가?"

금우성은 두 사람의 얼굴을 훑었다.

"닮지는 않았군."

"저희...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는 사람 얘기일세."

"흥. 뭐야. 아무튼 사람 이름 가지고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지 모르는데 그런 조언을 하다니. 참으로 고맙군. 잘 알겠소."

금우성은 남궁유린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은 이만."

금우성은 두 남궁세가의 손님을 뒤로한 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신랑측의 하객으로 이름을 적고 들어온 터라,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많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무림맹의 맹주나 군사도 보이고, 마교의 소공녀도 보이고, 관의 무사들도 보이고, 심지어….

"연, 울지마요. 뚝."

"그치만…. 흑, 흐윽, 흐으윽…!"

천무명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여인들도 자리를 빛내고 있다.

빛내고 있다? 금우성은 등골이 싸했다.

"...허."

한 편의 잘 짜여진 각본을 보는듯한 느낌에 금우성은 괜히 어색해졌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나타나셨을까?"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마침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을가의 대모가 아니시오."

"그래. 을가장의 대모 을소소. 이번에 을가를 대표하여 하북팽가에 축하를 하러 왔어. 그런데…."

을소소는 부채를 펼치며 속삭였다.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그녀는 명백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엎으신 대 혈교주님께서 이렇게 강림하시다니."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뭘. 나를 범한 남자가 얼마나 행복하게 결혼하는지 보려고 온 거지."

"...너."

금우성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을소소는 눈웃음을 치며 금우성의 어깨를 부채로 톡 건드렸다.

"걱정마. 나도 포기했으니까. 천하 칠강 중 천마빼고 다 모인 자리에서 결혼식 망칠 강단은 없어."

"그럼 나중에라도 그럴텐가?"

"아니. 굳이. 오늘은 명복을 빌어주려고 온 것 뿐이야."

을소소는 부채를 접으며, 인사를 위해 다가오는 남자에게 싱긋 웃었다.

"결혼을 축하해요, 천 공자."

"...을가의 을소소 대모님?"

천무명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었다. 옆에 있는 금우성에게 눈짓조차 주지 못할 정도로 그는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네. 우리, 구면이죠? 이봉결정전 이후였나요, 용봉지회 이후였나요? 호호,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 아마 용봉지회가 아니었을지…."

천무명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후, 한 여인의 남편이 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나중에 을가에 한 번 들리시길. 부부지연에 대해서 제가 좋은 조언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결혼을 축하드려요."

"...예. 꼭 들리겠습니다."

천무명은 긴장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을소소는 배라도 부여잡고 박장대소 하고 싶은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쟤 봤어요, 교주님? 긴장한 거. 귀여워, 정말."

"...자네, 색마에게 범해진 거 아니었나?"

"화간인데요."

"뭐?"

을소소는 눈을 찡긋이며 옅게 웃었다.

"합의하에 범해진 거라서."

"...무슨 심보냐."

"뭘. 죽은 남편보다 더 대단한 자지를 만났으니, 한 번 정도는 더 껄떡거려보는 거죠."

"...이해를 할 수 없다니까."

금우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하객 분들은…."

"이거, 강호 역사상 처음으로 혈맹월교 식으로 이루어지는 혼례죠?"

"그래."

복장은 전통적인 복색이지만, 혼례는 혈교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아무튼 너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란 얘기지?"

"그럼요. 어차피 가만히 구경만 해도 복수는 이루어질텐데. 스스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걸 왜 말리겠어요?"

"뭐라?"

"후후. 당신께서는 아주 짧은 시간을 지내서 그렇지만…."

을소소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비웃었다.

"신혼 콩깍지 다 벗겨지면 그 때부터가 진짜 고생의 시작이랍니다. 호호호."

"...결혼은 무덤이다?"

"그럼요. 팽가의 아가씨, 척 보아하니 아닌 척 남자 휘어잡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겠는데요? 여차하면 몸으로…어머."

을소소는 근처에 다가온 작은 여아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아가씨?"

"......."

이제 갓 4살 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소녀는 금우성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우성도 소녀와 시선이 맞았다.

"......?"

"아, 아아…."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크, 크흠."

금우성은 이 좋은 날 괜히 난리를 일으킬 것 같아 조심스레 소녀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누가 울렸느냐? 이 아저씨가 아주 혼쭐을 내주마."

"......."

"어머니는 어디계시고? 아버지는?"

"저기…."

"월아야!"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며 누군가 달려왔다.

"팽신혜?"

"앗…."

팽신혜는 월아를 안아들었다가 금우성을 보며 놀랐다.

"어, 어…."

"걱정마라. 소란을 일으킬 생각 없으니. 오히려 소란을 일으키는 자를 어떻게 하려고 왔으니."

금우성은 엄지를 들어 자신의 목을 반쯤 그었다. 중간에 멈춘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 월아 때문이었다.

"월아라.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

"아저씨는 이름이...뭐예요?"

월아는, 옆의 팽신혜가 놀랄 정도로 똑부러지게 말했다. 금우성은 자신의 손바닥에 '금'자를 쓰며 상냥하게 웃었다.

"김우성이라고 한단다."

"김?"

지금부터….

악단의 음악이 멈췄다. 하객들은 저마다 자리로 모이기 시작했고, 금우성은 월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뒤로 돌았다.

"어머, 어디가요? 결혼식 봐야지."

"자리 잡으러."

금우성은 하객들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10번도 넘게 볼 결혼식인데, 내 딸 결혼식도 아니니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

금우성은 식당으로 향했다.

"...뭐지, 이 오한은."

그는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몸서리를 쳤다.

* * *

인사만으로도 정신이 이렇게 날아갈 수 있을까.

누가 언제 왔는지, 또 누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수준이었다.

"...정말 사람이 많이 왔군. 모르는 사람도 와서 아는 척을 하느라 진땀을 뺐어."

"다 알고 대처 잘 하시던데요?"

"미리 공부해서 알았지. 너와 나를 축하해주러 온 자들인데 무안을 줄 수는 없잖니."

나는 팽유월과의 혼례에 참가한 이들의 방명록을 훑으며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나중에 천가나 혈맹월교에서 크게 움직이더라도 이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 최소한의 도의를 다 하리라.

그게 우리의 성혼을 축복해준 이들에 대한 예의였다.

"...부인."

어색한 표현이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한다.

"그럼 할 일도 대충 끝났겠다, 이제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일만 남았구려."

이 날.

이 순간만을 위해 그간의 모진 시간을 견뎠다. 이미 나의 자지는 달아올라서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죠. 음...한 일 각 정도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뭐? 일 각이나?"

"저도 나름 준비가 필요해서."

"흐흐흐, 그래. 대신 기다리게한만큼 혼쭐을 내줄 것이야."

나는 팽유월을 위협했고, 팽유월은 옅게 웃으며 잠시 방을 나갔다.

일 각.

'이렇게 일 각이 길었나?'

누가 일 각이 여삼추라고 했던가? 시간은 좀처럼 빠르게 흐르지 않았고, 나는 괜히 조바심이 났다.

바지 아래의 자지는 불쑥 솟아 벌써 터질 것 같은데, 정작 이 열기를 해소해줄 아내는 자리를 비우고 없다.

아아, 이 슬픔을 어찌 해결해야한단 말인가?

또각, 또각.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뭔가 걷는 소리 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소리였다.

"부인?"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팽유월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선녀같다…!"

선녀가 여기에 있다.

일말의 더러움도 없는 순백의 선녀복은 마치 날개옷처럼 하늘하늘 나풀거렸다.

"그건 무엇이오?"

"소예가 오늘을 위해 만들어준 성혼선녀복(成婚璇女服)이에요.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옷은 꼭 입어야 한다고 혈교주님께서 그러셨어요."

"......."

감사.

압도적 감사.

역시 혈교주는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순백 이외의 색은 일절 없지만, 팽유월의 상냥한 마음가짐과 몸의 선이 여실히 드러나는 옷은 내 가슴을 터뜨릴 것처럼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분명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치마 아래에는….

"상공."

팽유월은 치맛자락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으로 말아쥐자, 매끄럽고 길쭉한 다리의 선이 여실히 드러났다.

다리 또한, 몸에 딱 달라붙는 얇고 하얀 비단천으로 된 내의가 있었다.

보온 때문에? 아니다. 저건 잡고 찢기 위한 옷이다. 바지처럼 되어있는 구조는-

"허억…!"

나는 절로 숨이 넘어갔다. 허벅지 중간 즈음에 걸쳐진 하얀 내의의 끝에는 둥근 홈에 끈이 고리처럼 묶여있었고, 그게 치골 즈음의 허리띠처럼 이어진 얆은 띠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순백의 속옷.

오직 하얀 가운데 팽유월의 살결의 색이 도드라졌다.

이 긴 치마를 들추고 보이는 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닐까.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저곳에 얼굴을 박고 죽고 싶어졌다.

"후후, 고개를 들지 못하시네요. 상공이 제 가슴보다 먼저 다른 곳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요."

팽유월은 치마를 내렸다. 나는 절로 아쉬워졌으나, 팽유월은 내게 손을 뻗었다.

"가요, 상공. 여기가 아니라...아주 특별한 곳에서."

"네가 원한다면."

나는 팽유월의 손을 잡았다. 팽유월은 나와 함께 마주걸으며 나를 인도했고,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팽유월이 이끄는 '지하'로 내려갔다.

"...허어, 세상에."

그곳에는 십수 명이 함께 누워도 거뜬한 하얀 침대가 놓여있었다.

넓은 방 전체에 푹신한 침대를 깔아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스륵, 스륵.

양쪽 벽에서 한 두 명씩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부 팽유월과 비슷한 하얀, 성혼선녀복을 입고있었다.

아주 섬세한 부분은 제각기 다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보는 것 만으로도 찍 쌀 것 같았다. 팽유월의 손을 잡고 있었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참지 못하고 바로 바지를 내렸을 것이다.

"저 혼자 결혼식 올리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공식적으로 그런 걸 상공이 원하는 이상, 그걸 꺾을 수는 없죠. 하지만...비공식적으로는 괜찮잖아요?"

"밖에서는 천무명이랑 결혼하지만, 여기서는 색마랑 결혼하는 거지."

혈소예가 내게로 다가왔다.

"색마님. 10명의 부인 감당할 자신 있어요?"

"...하."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감당 못할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런데 색마와의 결혼식이라…."

어폐가 있다.

"색마는 이제 죽었는데?"

"그래요? 저는 이게 죽는 걸 본 적이 없어서."

"......."

팽유월은 복도 끝으로 나를 인도했다. 10명의 여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공. 저희는 상공의 여자고, 상공을 존중하기로 했어요."

"결혼을 하더라도 예쁜 여자가 있으면 한 번 해보려고 하시겠죠. 이미...다른 이들도 엄청 많으니까."

"네가 색마짓 하는 걸 막을 수는 없을 것 같고, 대신 승부를 보자는 거야."

"저희 10명을 상대로 해서 이기시면...그 때는 저희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게요."

선녀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선녀들이 이끄는대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고, 10명은 나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제자야...10명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면...더이상 여자가 필요없겠지?"

"하지면 10명으로도 부족하다면, 그 때는 더 들이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을게요."

"10명이 안되면 11명으로, 11명이 안 되면 12명으로."

"그러다가 언젠가 서방님이 저희와 함께 쓰러지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 진정으로 색마가 죽는 날이 되겠네요. 흐흥."

선녀들은 나를 향해 입맛을 다시며 눈으로 말했다.

"그러면…."

"누구부터 하실래요?"

"......."

비천색마.

아직 색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작품후기]

11P는 천색록(2부)에서.

9일(화)는 휴재입니다.

이제 에필로그 조금 쓰고, 잠시 휴식 후 외전(30~150편 내외? 에피소드 생각나는 만큼) 연재합니다.

2부 비색천마도 연재 중이니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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