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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명, 죽다
용봉지회?
한 달도 전에 끝났지.
재미있는 다른 이야기 또 없냐고?
음....
옛날 옛 적, 어느날.
이름없는 무가의 한 소년과 유명세가의 소녀가 한 마을에 살았더라네.
무가의 소년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
소년은 의술을 연마했지.
어려서부터 의술의 신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은 점점 나이를 먹었다네.
소년과 소녀는 서로 인연을 맺었어.
소년이 스승을 따라 멀리 다녀오던 날이면, 소녀는 소년에게 인사를 하러 몰래 담을 넘었다고 했다네.
노부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구만.
...크흠.
그 뒤로도 소년은 소녀와 인연을 나눴지.
서로에 대해 생각하던 우정이 서로에 대한 연심이라고 금방 깨닫게 되었다네.
선남선녀의 이야기가 아닌가?
가문 내에서 그 누구도 몰랐지만, 소녀는 가주의 도움을 받아 소년과의 풋풋한 사랑을 키워나갔다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소년에게 큰 시련이 닥친 거야.
소년은 사실 신비문파의 계승자였거든.
단지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것이 싫어 의술을 연마하고자 했지만, 강호는 소년을 가만두지 않았네.
스승과의 약속을 어기고 소녀와 놀러 나간 날.
소녀를 집으로 보내고 문파로 돌아온 소년이 본 건 혈겁의 비극이었어.
소년은 절규했네.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나고, 소년에게 남은 건 스승이 남긴 의서 한 권 뿐이었거든.
소년은 자괴감이 들었어.
고아였던 소년을 보살펴준 건 스승이었고, 사실상 스승은 소년의 어버이 역할을 했지.
소년은 그 날, 조실부모를 한 것이야.
그리고 그게 소녀와 시간을 가졌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졌다네.
소년은 방황했어.
소녀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았지.
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소년은 약했지만, 소년의 의술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네.
그래.
자네가 알다시피, 소년은 '신의'의 제자의 제자였어.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신의가 비밀리에 키웠던 제자가 거둔 자식이었지.
신의와 마교의 비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마교의 천마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
그리고 천마는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신의와 그 제자들을 납치하여 불치병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 것.
소년은 스승을 죽인 자가 바로 마교의 대공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아버지 천마의 불치병을 고치고 그 공로로 천마가 되고자 했고, 그걸 거부한 소년의 스승은 대공자 주지에게 살해당한 것이지.
그렇게 소년은 혈혈단신으로 강호 곳곳을 돌아다녔네.
수많은 인연이 생기고, 또 악연이 생겼지.
하지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어.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의술을 펼치며 강호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지.
어느덧 소년은 청년이 되고 장성한 무렵, 청년은 멀리서 전해진 소식을 들었네.
하북팽가의 가주, 팽이왕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그래.
소녀는 팽가의 여식이었지.
당시에는 방계의 소녀였는데, 방계라는 것이 하필이면 화근이 된 것이야.
팽이왕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오직 천환단 뿐이었는데, 마침 천환단이 어떤 욕심많은 표국에 하나가 있었다더군.
그...소추표국이었던가?
아, 그래. 추소표국.
그곳의 소국주는 소녀, 아니 이제는 어엿한 여인이 된 자-팽유월을 상대로 매매혼을 시도한 것이야.
팽유월을 아내로 내놓으면 천환단을 주겠다고 했지.
청년은 급히 하북으로 달려갔다네.
하지만 이미 신부는 하북에서 안휘로 떠났고, 청년은 거지보다 더 한 몰골로 간신히 하북에 도착했어.
아주 우연히, 청년은 팽유월과 만났다네.
팽유월은 청년을 향해 원망을 퍼부었어.
왜 그랬을 것 같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아니야.
왜 자신의 정조가 짓밟히고 나서 나타났냐고.
며칠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팽유월은 청년과 함께 도망이라도 쳤을 거라고.
하북팽가에서 '팽'이라는 성을 버리고 평생을 쫓기는 유월이라는 이름로 살더라도, 청년과 평생 둘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고 하더군.
그러나 이미 늦은 것이야.
참으로 비극이 아닌가. 마음은 깨끗할지언정 몸이 더렵혀졌는데, 어찌 다시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보통의 남자라면 마음을 접었을테지.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
천무명은, 자신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 다른 남자의 손에 희롱당했다고 버리거나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네.
과거는 묻지 않고, 지금 나와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슬프게도, 둘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버렸어.
팽유월과 약혼을 맺은 남자가 천무명을 개패듯이 패고 쫓아낸 거야.
뭐?
천하제일룡인 자가 어떻게 그런 자에게 맞았냐고?
허허.
그가 강해진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당시에는 삼류무사만도 못한 수준이었네.
의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의원이 무슨 힘이 있어 표국의 소가주를 상대로 이겨낼 수 있겠는가?
먼지나게 맞고, 쫓겨났었지.
그나마 팽유월이 팽가의 무사들을 시켜 죽지 않도록 돌봤지만, 그걸로 인해 팽유월은 더 모진 일을 당했다네.
그리고 이 두 남녀의 비극을 본 하늘이 천벌을 내리신 걸까?
추소표국에 불이 났지.
뭐?
팽가에 많은 유산을 남긴 희대의 순애보가 아니냐고?
이 사람아!
그 얼굴에 그 덩치에 그 몸으로 순애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다 하북팽가에서 몰락한 추소표국의 '명예'를 위해 나름 추켜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지.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
하나의 잘 꾸며진 이야기인 줄 알았단 말일세.
하지만 그 뒤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이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팽유월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네.
추소표국의 일로부터 약 10개월 뒤, 어여쁜 딸을 낳았지.
흐흐.
그렇다네.
그 딸이, 천무명을 쏙 빼닮았다고 하더군.
이야, 대단한 남자야.
괜히 아미파를 상대로 그런 짓을 저지른 남자가 아니었어.
천하제일의 무공이 없던 시절에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몸을 내던진 사내였으니!
뭐?
다 조작된 거 아니냐고?
흐흐, 그런 소리 어디가서 함부로 하지 마시게.
어차피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추잡한 치정이 아니라, 영웅과 그 아내의 사랑이니까.
누구나 행복한 결말을 원하지 않나. 모두가 행복하고 즐겁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일세.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냐고?
그야 당연히 천무명의 첫번째 부인이 팽유월이기 때문이지.
그래.
지금이 용봉지회 끝나고 한 달 즈음 지났지?
하북팽가에서 방을 붙였더군.
천무명이 팽유월과 혼인을 맺기로 했다고.
놀랍지 않나?
자신의 곁에 있는 뭇 많은 여인들을 두고, 팽유월을 아내로 맞이하다니 말이야.
크흐, 내가 하북에서 들었던 일 중에 가장 슬프면서도 행복한 이야기야.
자네는 뭐 혹시 들은 이야기가 없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호북의 사공 소저와도….
* * *
"...정말 이걸로 괜찮겠소?"
"그럼요. 강호에서 이런 이야기는 흔한 일이랍니다."
팽유월은 내게 안긴 채 나를 다독이며 오히려 위로했다.
소문. 풍문.
강호에서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괜히 개방과 하오문이 거지나 하류층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알아주는게 아니다.
그들은 '정보'라는 재산이 있고, 소문이라는 형태로 마구 퍼뜨리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하오문과 손을 맞잡았다.
하오문이 변화하는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길을 제시하며, 동시에 나와 팽유월의 관계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를 퍼뜨렸다.
누군가는 팽유월을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누군가는 팽유월을 질투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대놓고 우리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천무명은 천하제일룡이며, 하북팽가는 팔대세가 중 무적이다.
"강호의 모두가 저를 오해해도 괜찮습니다. 상공만 제 곁에 있어주신다면, 저는 어떤 오욕이라도 이겨낼 수 있답니다. 그리고…."
팽유월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씩 웃었다.
"덕분에, 월아는 상공의 자식이 될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렇지. 덕분에 그대는 결혼식 전에 다른 남자와 통정을 한 여인이 되었고."
"괜찮아요. 원래 이런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있어야 지금이 더 돋보이는 거랍니다."
팽유월은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덮었다.
"결국 상공은 약속을 지키셨어요. 강호의 모든 위협을 없애고, 팽가를 위해 애쓰겠다는 제 고집도 받아주시고, 월아와 이월이에게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주셨죠."
"...마지막은 앞으로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팽유월의 옆에 앉았다.
"유월아. 그거 아니? 그 날, 내가 마차를 타고 가던 너를 본 날. 내가 너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 뭔지."
"한 번 떡치고 싶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그게 아니라…."
나는 팽유월을 마주보며 손을 붙잡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것 치고는 저 먹고 버리셨잖아요?"
"어허. 이야기 속에 나와있지 않느냐.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그랬다고."
어느덧.
이제는 팽유월과 이런 이야기도 우스갯소리로 농담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유월아."
"네, 상공."
"몇번이고 말해도 부족하지만, 사랑한단다. 그리고 나의 아이를 낳아줘서 고맙다. 진심으로."
"저도 상공의 아내가 되어서 고마워요. 그런 의미에서...부탁이 있어요."
"응?"
팽유월은 내게 속삭이듯 제안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진정으로 상공과 부부의 연을 맺잖아요."
"그렇지."
"정식으로 혼례는 제가 먼저 치르지만, 역시 저 혼자 화촉을 밝히는 건 치사하단 말이죠."
"......유월아?"
팽유월은 내 목에 팔을 걸었다.
"상공. 저는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난 시점이라, 그녀의 몸은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있었다.
"한 때는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그건 상공을 존중하지 못하는 짓이죠."
아니,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그러니 감히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낳으면 낳을수록 팽유월의 몸은 여인으로서의 미가 더욱 깊어졌다. 가히, 천하제일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 결혼식이 끝나면…."
속닥속닥.
"......."
팽유월은, 어느덧 마음까지도 천하제일미였다.
* * *
사각. 사각.
늦은 밤, 혈소예는 열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혈소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뒤에는 혈소예와 닮은 적발의 중년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만나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아빠."
"아직도 나를 아빠라고 불러주는 것이냐?"
"아빠는 아빠죠. 과거...아니 미래의 일은 일어나지 않은게 되었으니."
혈소예는 손가락 끝에 걸린 강기의 실을 전부 풀어헤쳤다.
"아빠가 마음을 바꿨으니, 저는 이제 괜찮아요."
"...혈겁."
혈교주, 금우성은 혈소예를 향해 나지막하게 웃었다.
"결국 네가 이겼구나. 그래. 혈겁이 일어나지 않아도, 무림은 멸망할 수 있었어."
"아빠가 원한 건 무림의 멸망이 아니라 중원의 멸망이 아니었나요?"
"...그랬었지. 네 어머니를 죽인 강호를, 중원에 피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금우성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지. 네 덕분에 나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빠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
금우성은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글쎄…. 남지중해 섬으로 가서 해수욕이나 즐길까."
"남지중해가 뭔지는 차치하고, 혈맹월교는요?"
"나중에. 지금은 혈맹월교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앞장 서야지. 문화침략이라는 말이 있단다. 미리 고맙다고 인사하마. 적어도 20년 정도 뒤가 되면...네가 물려받아야 하니."
"......."
중원을 떠나겠다.
혈교주의 말에 혈소예는 말문이 막혔다.
"...고마우면 부탁 좀 들어줘요."
"부탁?"
혈소예는 자신이 앞에 그린 종이를 금우성에게 건넸다.
"이거 좀 만들어주세요. 10벌."
"...누가 이걸 가르쳐 준 거지?"
"규령 언니가 택배 보냈을 때 같이 있더라고요. 히히, 아빠가 엄마한테 입혔던 그 궁극의 월녀복 말이에요."
금우성은 종이 속 그림을 보자마자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세상에. 진심이냐? 이걸 10벌?"
"당연하죠. 대신 아빠는 모른척 해주세요. 지금 유월 언니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계획이니까."
혈소예는 싱긋 웃으며 옆에 있는 옷을 들어올렸다.
"체형은 제가 다 알고 있으니까 아빠는 만들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네 남편."
금우성은 한숨을 내쉬며 실과 바늘을 들어올렸다.
"첫날 밤에 복상사해도 나는 모른다."
금우성은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서로 다른 하얀 의복을 훑었다.
"허니문 베이비 10명 레전드."
"...또 무슨 말이에요?"
"아빠가 이상한 소리 하는 거 하루 이틀이니."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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