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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지회의 끝
모용란은 몸으로 깨달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다.
남궁의 검이 모용의 칼보다 강한 건 아니지만, 남궁유린의 검은 모용란의 칼보다 더 강했다. 비록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한들, 그 차이는 명백했다.
초격.
처음 일격만 제대로 넣었다면, 만약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고 공격을 했다면 이렇게 졸전을 치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간 중간 제대로 공격을 넣을 수 있는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용란은 공격을 제대로 넣지 못했다.
천무명과 잤다.
그 말이 모용란의 칼을 흐트렸다. 칼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리게 만들었고, 남궁유린의 검은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자신감.
무공도 아니고, 가문도 아니고, 남자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으로 밀리고 말았다. 무기를 부딪힐 때마다 자긍심이, 그리고 여인으로서 가진 자존심이 무너졌다.
와아아아!!
남들이 보기에는 종이 한 장 차이 싸움이 정말 극적으로 보일 것이다.
남궁유린은 모용란을 진심으로 이기려고 들고, 모용란은 악착같이 버티면서 남궁유린에게 반격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중간중간 남궁유린에게 유효타를 날릴 '뻔' 했고, 그게 관중들에게는 백합이 넘어가는 비무 속에서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광경이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조금만 더 집중하면 이길 수 있는데.
천 공자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아주 조용히, 남궁유린은 입모양으로 모용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여자를 사랑으로 안을 줄 아는 남자야.
“!!”
칼끝이 또 흔들렸다. 남궁유린의 어깨를 향해 휘두른 칼은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아주 약간의 틈으로 닿지 않았다.
“크으윽…!”
“흐흥, 동요가 심하네.”
그에 비해 남궁유린의 검은 자신감이 넘쳤다. 검술이 자신감과 강함이 비례하는 것도 아닐텐데, 남궁유린의 검은 자신감 넘치게 휘두를 때마다 더 날카롭고 강했다.
카ㅡㅡ앙!
남궁유린의 검이 도신을 때렸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고, 그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내 거야.”
남궁유린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날렸다. 명치에 정확히 꽂히는 천뢰삼장(天雷三掌)의 수에 모용란은 뒤로 크게 물러나야만 했다.
“흐윽…!”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저 건방진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정말 짜증이나고 화가 났다. 그게 자신의 평정심을 흔들리게 만들려는 수작인 걸 알면서도, 순순히 넘어가는 자신이 화가났다.
천무명이랑, 잤단다.
강제로 취한 것도, 누군가가 실수를 한 것도 아니란다.
천무명과 둘이서, 심지어 어제, 용봉지회가 이루어지는 와중에 천무명이랑 살을 섞었다고 하더라!
“.......”
모용란은 자괴감에 빠졌다. 자신은 천무명이랑 살을 섞었나?
아니다.
살을 섞기는 커녕 빙색마인에게 당하여 처녀를 잃었을 수도 있다. 그에 비해 남궁유린은 ‘공식적’으로는 숫처녀나 마찬가지인 존재.
‘아니야. 그는 그런 것에 연연할 분이 아니야.’
천무명은 설령 홍루에서 몸을 굴리던 탕녀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정말로 천무명에게 연심을 품고 순수한 사랑을 가진다면, 그는 두 팔 벌려 받아줄 것이다.
“이제 슬슬 끝내자. 다음 경기 하는 사람들 기다리잖아.”
남궁유린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검법으로 끝장내기 위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
모용란은 칼을 다시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객석은 서서히 긴장감으로 폭풍전야와도 같이 고요해졌다.
“...큭.”
맞은편 객석. 하필이면 위치가 모용세가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과 마주보고 있었다. 얼핏 스친 부친과 쌍둥이 남매는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졸전을 비웃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라고 하지만, 직접 대어보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 한 번은, 저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게 만들고 싶다.
모용란은 이를 악다물고 칼을 쥐었다.
웅성웅성.
어디선가,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모용란은 슬며시 눈을 돌렸고, 진짜로 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천무명!
그가 관중석에 나타났다. 흐려진 무채색의 세상 가운데, 오직 그만이 색을 가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한 듯 보였다. 모용란은 또다시 자괴감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그는 남궁유린과 더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어제 살을 섞은 여자.
당연히 모용란보다 더 관계가 깊다.
왜?
천무명과 모용란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으니까! 색마를 피해 남장을 하여 모용세가의 남자로 인연을 맺었을 뿐, 실제로 모용란으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니까!
강호의 풍문으로 천무명이 자신을 눈치채기를 바란다? 그건 너무 요행이다.
“하….”
모용란은 칼에 힘이 빠졌다. 의지가 꺾인 이상, 더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이대로 그만둘까싶은 순간.
지지마시오, 용 형.
“!!”
그가, 자신을 불렀다. 온통 회색으로 물든 세상이 다시 환하게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모용란은 칼을 다시 들었다.
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않는다.
모용란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현검마망에게 연심을 품은 남자가 겁간을 당하던 날.
남자가 자신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현검마망을 상대로 몸을 던졌던 그 날.
꼴사납게 약해서 도망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여자는 이제 없어.’
그리고 모용란은 또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세가의 비고와도 같은 심처까지 들어온 빙색마인을 상대로 당당히 칼을 들어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사아아.
뭔가, 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용란은 정신이 맑아졌다. 칼을 든 손에 더이상의 떨림은 없었고, 전신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
“어, 어…?”
정면의 여자는 당황한듯 기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그 남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했다.
“왜, 왜…? 어제 분명-”
“남궁 소저, 고마워요.”
모용란은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대 덕분에, 저는 하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뭐-”
타ㅡ앗.
모용란은 앞으로 내달렸다.
겁간을 하려고 했던 야우오협을 상대로 이렇게 칼을 휘두르리라.
겁간을 하는 현검마망을 상대로 이렇게 칼을 휘두르리라.
겁간을 하러 온 빙색마인을 상대로 이렇게 칼을 휘두르리라.
그 날, 힘이 없어서 자신이 하지 못했던 때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고 실제로 할 수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해.
카ㅡ앙!
모용란은 남궁유린과 함께, 과거의 자신을 베어버렸다.
* * *
“...아니, 거기서 깨닫는다고?”
어처구니가 없지만 사실이다. 모용란의 참격에 맞은 남궁유린의 검은 하늘로 높이 빙글빙글 날아가기 시작했다.
“승자, 모용란ㅡㅡ!!”
무사가 검을 놓쳤다. 심지어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기까지했다.
“오, 오오….”
모든 무사들은 그런 모습을 꿈꾼다.
하수가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실력자를 상대로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다가, 마지막 일격으로 상대를 넘어서는 모습을.
열세인 비무를 하는 과정에서 무공의 성취가 비약적으로 높아져 상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워 간신히라도 이기는 모습을.
하지만 현실이 이상으로만 이루어져있다면, 누가 현실이 냉혹하고 차갑다고 할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용봉지회, 특히 육봉쟁패의 다른 조가 그렇듯, 압도적인 힘을 가진 여인들이 약자를 짓밟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누구 한 명 쯤은.
누구 한 명 쯤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올라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관중들의 염원이 통했을까.
남궁유린이라는 강자는 모용란에게 패배했다.
이미 예전부터 모용란이 연희봉에 올라선 때에도 ‘그래도 다음 용봉지회면 남궁유린이 누구 하나는 이길 것’이라는 풍문이 팽배했다.
푹.
빙글빙글 날아간 검이 바닥에 꽂혔다. 고요하던 관중석이 서서히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객석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ㅡㅡㅡㅡㅡ!!
모용란! 모용란! 모용란!!
모두가 모용란을 연호한다. 모용란은 자신이 승리한지 전혀 깨닫지 못한 듯 멍하니 남궁유린을 내려다보았다.
“내가...이겼어?”
“......하.”
남궁유린은 벌벌 떨며 몸을 일으켰다. 푹 숙인 고개 아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최선을 다했는데….”
객관적으로, 남궁유린의 검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일말의 방심도 없었다. 모용란을 상대로 철저하게 검으로 이기려고 들었다.
“어째서...내가 진 거야…?”
물론 그녀는 모용란의 정신을 건드리는 언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 소저, 당신은 강해요.”
모용란은 몸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천무명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그녀는 자신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이겼네요.”
모용란.
그녀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승리를 따냈다.
* * *
모용란의 승리.
이후에 이어진 경기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시아, 승.
독고연, 승.
유설라, 승.
제갈선, 승.
네 명이 모두 승리하여 결승전에 올랐다. 상대는 제각기 내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승리는 누구의 손에 있는지 자명했다.
“남은 건….”
“혈녀 뿐이로군요, 스승님.”
현아는 내 옆에 앉아 간식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그녀는 이미 역체변용술을 하며 정신연령까지 다듬은게 확실한지, 정말로 20살 여인처럼 행동했다.
“제자야.”
“네, 스승님.”
“나중에 혹시….”
“그럴 생각 없습니다.”
현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패자는 승부에 승복해야하는 법. 스승님께서 몸으로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크흠. 그래.”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천무명, 이제는 제자까지 건드리는 건가?
-젠장. 저런 예쁜 여제자는 또 어디서 찾은 거야? 꽃도감에는 없는데?
-스승님이 반려가 되고…어우야.
“.......”
사실 반대지만, 나는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혈소예의 본선 마지막 경기를 기다리는 사이.
“실례하오. 천 공자. 본인은 모용세가의 모용인이라고 하오.”
내게 모용란을 닮은 청년이 찾아왔다. 꽃뱀에게 당했던 남자로, 빙색마인 덕분에 오명을 조금이나마 씻어낸 남자다.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럼.”
“인사를 전하려고 온 것입니까?”
“그렇소. 모용세가를 대표하여 인사를 함과 동시에, 좋은 제안을 하나 하려고 왔으나….”
모용인은 옆에 있는 현아를 보며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곁에 또다른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 제가 함부로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아, 이 아이라면 제 제자입니다.”
“...제자요?”
“예. 제자입니다. 현아야, 인사하거라.”
“......스승님의 수제자, 현아라 하옵니다.”
현아는 깍듯이 모용인에게 인사했다. 모용인은 현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모습을 조금 바꾸었다고한들, 여선의 육신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란이는 힘든 싸움을 하겠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 이만….”
“모용 소저에게.”
나는 떠나가려는 모용인에게 여지를 남겼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해주시오.”
“...천 공자.”
“그리고 다음 번에는…. 용 형이 아닌, 본모습으로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시오.”
“......천 공자의 뜻은 반드시 전하겠소.”
모용인은 떠났다. 옆에서 현아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지만, 나는 그녀와 다시 앉으며 조용히 귀에 속삭였다.
“씨는 여러 밭에 뿌려야 하는 법.”
“......스승님.”
“뭐. 왜.”
그리고.
혈소예의 경기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아니, 미친.”
저벅, 저벅.
한 가지 분명히 말하자면, 혈소예는 지금까지 흑발로 경기를 나섰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불필요한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사아아.
비무대에 오른 혈소예는 시작부터 머리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상대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씩 웃었다.
“혈맹월교의 소교주, 혈소예.”
그녀는 자신을 향해 경악하는 관중들을, 특히 무림맹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품후기]
혈밍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