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38화 (53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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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의 피

어슬렁, 어슬렁.

출전 전에 한 발 빼려고 했던 나는 좀처럼 기회를 엿보지 못했다.

독고연, 그녀는 독고자영의 곁에 딱 달라붙어있다. 독고자영이 독고연의 곁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있어 떨어질 새가 없었다.

화장실로 불러내서 몰래 따로 취한다?

'선녀는 화장실 안 가.'

그러므로 화장실은 불가. 그렇다고 독고연을 으슥한 창고로 끌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그녀의 근처에는 무림맹의 호위 무사들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독고연은 안 된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도 되냐하면 조금 그런 것이….

'어째 죄다 다들 보호자가 하나씩 딸려있구만.'

제갈선은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길과 함께 객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뭔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지나가는 길에 엿들어보니 '마교'를 화제에 두고 있었다.

제갈길.

무림맹의 군사가 배신자라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놀랍게도 배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갈세가의 방계들이 배신자였다. 제갈선은 납치사건을 통해 제갈세가의 어둠을 밝혀냈다.

군사 제갈길.

그는 그저 비극에 희생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의 아들인 제갈건담 또한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뿐이었다.

'잘 됐네, 잘 됐어.'

혈겁난세가 일어나지 않는 지금, 제갈건담은 앞으로 평범한 무가 후계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검제의 무공, 지금까지 잘 사용했소이다.'

나는 제갈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짧게 목례를 했다.

'제갈선은 안되니까 마교 쪽이라도-'

젠장.

젠장.

젠장.

염마 당서희는 당가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참가자는 아니지만 관중석에서 뭔가를 예의주시하는 그녀는 누군가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륵.

"......."

나는 중려신화정의 불씨를 피워 신호를 보냈으나, 당서희는 그저 눈을 감으며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안된다고? 도대체 왜?'

내가 근처에서 하고 싶다는 신호를 받았음에도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결국 나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빙마 유설라는 아미파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옆에 있는 여인이 누군가 했더니, 류서시더라.

이미 탈락한 이상 '조금 늦게 하북에 도착한 아미파 장문인'정도로 위장을 해도 큰 문제는 없을 터.

'쟤들도 심각하네.'

둘은 다른 이들을 물리고 정말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각, 검마 왕소현도 마찬가지.

그녀는 다른 조에서 출전 중인 제자들을 상대로 엄숙한 얼굴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완전 전쟁터네.'

왕소현도 그렇고 왕소현의 제자들도 그렇고 다들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있다.

'그 사이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연붕으로서 현녀를 납치해 그녀를 팽가에 집어넣은 뒤, 나는 용봉지회 밖에 있던 두 아이엄마들밖에 만나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은 혈소예, 사공희, 팽유월 뿐.

다른 이들이 그 사이에 어떤 상황에서 움직이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할 바가 없었다.

뭔가 아는 사람이 없을까.

나는 이시아를 찾아봤지만, 이시아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자리를 비웠다.

마교 소공녀가 자리를 비울 일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발자취를 살펴보니 그럴만한 곳으로 이동해있었다.

'다시 연이 근처에 있네?'

이시아는 무림맹주 독고자영에게 호출되었다. 그녀는 독고자영과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길이 잠시 엇갈렸던게 아닐까? 진작에 이시아를 찾아갔으면 빠르게 한 발 빼고 갈 수 있었을텐데.

"끙…."

조금 이르지만, 나는 별 수확없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쉽지만 그냥 참아야지.'

아직 비무를 치르기까지 반 시진 가량 남았지만,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며 혈기를 억누르기로 했다.

대신.

끝나고 나면 허리를 마구 흔들 것이다. 본선 비무도 어느덧 3차전으로, 이제 나와 상대할 이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며 시간을-

저벅, 저벅.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의아함을 느꼈다.

'여기 남자 대기실인데?'

여자가 올 일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하물며 절정급 고수가 있다면-

"실례해요."

"......."

내 앞에는 미래의 위루화, 남궁유린이 나타났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째진 눈매로 나를 노려보며 내 앞에 섰다.

'원래 저런 눈매라 더 앙칼져보이는 건가?'

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복이 아닌 평복을, 하늘색으로 된 옷을 입은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내게 허리를 숙였다.

"우리, 구면이죠?"

"구면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저를 치료해줬잖아요. 지난 용봉지회 때."

"......."

의붕의 이야기다. 나는 그녀를 치료했다.

도마에게 겁간 당한-실제로는 내가 그랬지만-그녀를 상처가 없게 말끔히 치료했었다. 내가 병을 주고 내가 약을 준 셈이지만, 적어도 원인을 제공한 건 남궁유린이다.

남궁유린은 당시 남궁패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불러, 이시아를 강간하려고 했다.

남을 범하려는 자, 자신이 범해질 각오를 하는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범했을 뿐이다. 이시아의 색마가 될 자로서, 나는 미리 남궁유린에게 색마로서 벌을 내렸다.

"...그런 일이 있었나."

"일부러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은 저랑 공자...둘 뿐이니까."

"...상처가 될까봐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 건만."

나는 남궁유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만나서 반갑소, 남궁 소저."

남궁유린.

나는 그녀를 취함에 있어, 혈족의 촌수를 따졌다.

'증조부도 고조부도 아닌, 현조부가 같더라.'

촌수를 따질 이유가 없을 정도로 먼 사이. 같은 남궁의 씨족 내에서도 10촌 이상 벌어질 정도로 나는 남궁유린과 관계가 몹시 멀었다.

'직계랑 방계의 차이지.'

내가 남궁의 혈족이지만 방계에 내놓은 자식이라 그런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준.

남궁에서도 혼약을 추진한다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멀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애초에 그녀를 취하지 않았으리라.

'예쁘긴 하잖아.'

사납게 생기기는 하지만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훤칠한 미인이다.

'솔직히 진가장 들어와도 손색은 없지.'

이국적인 모습까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얼굴과 체형은 확실히 육봉의 자리를 감히 넘볼만한 존재였다.

'괴롭히기 딱 좋게 생겼어.'

앙칼진 저 눈매가 양물에 절여졌을 때 반달처럼 쳐지며 풀리던 그 눈빛은 정말이지, 그런 취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능욕하고 싶게 만드는 가학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저기, 천 공자…?"

"...실례했습니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 같아서."

"......4년 전의 저와는 달라요."

남궁유린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몸을 떨었다.

"그 때의 저는 아집에 가득 차있었죠. 지금은-"

"지금도, 달라보이지 않습니다만."

"......."

나는 칼같이 남궁유린의 말을 잘랐다. 실제로 그녀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건 강한 자신감이었다.

"남궁 소저."

근거 없는, 강한 자신감.

"지금도 아집에 차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 검이죠. 남궁의 검에 있죠."

"유감이군요. 그런 상태로는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겁니다. 설령 기적적으로 육봉이 될 수 있다고 해도...당신은 말석을 차지하여 언젠가 밀리게 되겠죠."

"악담을…!!"

악담이 아니다. 진심어린 충고다.

내가 처녀를 가져갔고 내가 더 취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고집을 부리다가 좌절하여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러다 위루화 되면 어떡해?'

위루화는 자신의 무공적 한계에 괴로워하다가 남자와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남자에게 버림을 받아 흑화하게 된 것이다.

남자를 태생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한 몫 하고.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당신보다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하는 충고이자 조언입니다. 귀담아 들으세요."

"...저는 공자에게 잔소리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남궁유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왜 다들 내가 진다고 하는 건데…! 하필이면 왜 공자...당신마저 내가 진다고 생각하는 건데!"

"다른 이들의 실력을 잘 아니까."

"왜? 전부다 초절정 이상이라도 되나?"

"......."

침묵이 곧 답이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남궁유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런 거,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알고 있지만…."

남궁유린의 몸에서 잔 떨림이 느껴졌다.

"아니까 더 발버둥치려고 하는 거잖아…!"

"...남궁 소저."

어설프게 끌어안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선 채로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어디서 날 속이려고.'

위루화.

그녀에게는 눈물이 곧 무기다. 나는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남궁 소저. 이거 하나는 분명히 얘기하겠소. 당신은 육봉이 아니더라도 아름답소."

나는 그녀에게 잔혹한 현실을 알렸다.

"만약 육봉이 아니라 십봉이었다면 그대는 필히 열 명의 여인 중 한 명으로 자리를 차지했을 터.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법이오. 생각해보시오. 남궁세가 말고도 구룡육봉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명문세가나 문파가 얼마나 많소?"

"......남궁은, 언제나 누구보다 위여야 해요."

남궁이라는 걸 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위에 있는 걸 두고볼 수 없는 핏줄이죠. 남궁은 곧 하늘이니까."

"괜히 남궁의 대표 검법이 제왕검형이 아니지."

"...공자가 저를 신경써주려는 건 알겠어요. 잔혹한 말로 저를 일깨워주려고 하는 마음도 알겠구요. 하지만…저는 그래요. 모두들 안된다고 해도."

남궁유린은 당당히 고개를 들어올리며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눈물은 뚝 그친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직접 검을 맞대고 박살나더라도, 부딪혀보겠다고요…!"

"......."

아아.

그랬구나.

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제서야 이해했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의 자신을 간혹 잊고는 한다.

나는 이미 가정을 이루고 성공했다고 여기었기에, 나는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오고자 한 나의 근원.

포기하지 않는 것.

앞에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모두가 안 된다고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던 그 때의 나를 잊어버린 듯 했다.

누가 감히 한계를 정하는가?

누가 감히 시작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고 단정 짓는가?

"...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남궁 소저."

나는 남궁유린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대의 말 덕분에 이 천 모, 다시금 깨닫게 되었소이다."

"......후."

남궁유린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울컥하여 쏘아붙이듯 말하기는 했지만, 막상 화를 내고 나니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셈.

"...공자가 한 번 객관적으로 얘기해봐요. 모용란이랑 나, 누가 이길 것 같아요?"

"6:4로 소저가 유리하오."

"...그런데 나보고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한 이유는?"

"10:0이 아니니까."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풋. 뭐야. ...좋아요. 공자. 한 가지 약속을 하도록 하죠."

"갑자기?"

"제가 모용란에게 이겨서 육봉이 된다면-"

저벅, 저벅.

멀리서 성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남궁유린은 그 소리에 몹시 당황했다.

"젠장…!"

"소저?"

"왜, 왜 벌써…!"

남궁유린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뒤로 밀었다.

끼이익.

대기실에 놓인 목재 수납함 안. 무복을 걸어두기에 딱 적당한 길쭉한 수납함 안으로 남궁유린은 나를 밀어넣었다.

"소저, 지금 이게 무슨-"

"쉿. 조용."

남궁유린은 자신도 수납함 안으로 들어와 숨을 죽였다. 그녀는 내 몸에 바싹 붙으며 내 입술에도 검지를 올렸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공자를 구하러 온 거에요."

구하러 왔다?

"......이쪽이냐?"

"예, 아버님."

멀리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자관계인듯, 그들은 닮은 목소리로 나의 대기실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없는 듯 하군."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궁유린은 속삭이듯, 내 쇄골에 대고 말했다.

"...아버지, 당신에게 독을 쓰려고 해요."

"!!"

남궁산이 나를 암살하려고 한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근, 두근.

"......공자, 배에 손 대지 말아주세요."

"그거 손 아니오."

"......."

남궁유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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