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36화 (53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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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현녀

구천현녀.

신화 속 존재인 그녀는 여신(女神)이면서 전쟁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삼황오제 시절, 황제가 구천현녀에게서 병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치우를 물리쳤다고 하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서왕모와 동격인 여신으로, 상당한 신격을 가진 여신이다.

그런 그녀가 한 번 지상에 내려온 적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에는 월녀(越女)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월나라의 '구천'에게 자신의 검술을 전수했고, 이 검술을 배운 월나라 군대는 여러 열국 중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하늘이 내려보낸 진정한 검선(劍仙).

월녀에 대한 구전은 지금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중간 과정이 없네요. 월녀는 그 전부터 있었던 사람인데."

혈소예는 각종 서적 중에서 오월춘추를 집어들었다.

"월녀는 이전부터 있었어요. 하늘에서 월나라를 구하기 위해 내려보낸 사람이 아니라, 월녀가 튀어나와서 검술을 전해준게 월나라의 설화가 된 거죠."

우리는 구천현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온갖 방면으로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알아냈다.

"월녀가 바로 곤륜파의 장문인, 현녀에요."

천화현녀.

그녀는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에 자신의 검법을 전수했다.

본인에게 확인은 해봐야하지만, 전승에 따르면 월녀가 휘두르는 검세가 지금의 현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전의 사람이라니. 충격적이로군."

"왜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진짜 선녀를 취한 거 아니냐. 후천적 선녀가 아니라 진짜 선천적 선녀를."

나이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외형만 중년미부까지도 괜찮은데, 반백살이든 천살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지."

겉으로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은 법.

안이 상했다면 모를까, 내부도 싱싱하고 맛도 좋다면 먹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수많은 강호행을 통해 그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좋잖아. 수천년 동안 간직해온 처녀를 내가 취하고, 그런 여자를 내가 범하고 임신시킨다는 건데."

"으으...좋네요."

혈소예도 눈을 반짝이며 큰 관심을 보였다.

"다시 월녀 얘기로 돌아와서. 월녀는 검술을 가르치는 것에 큰 흥미가 있었죠. 그래서 자신이 기거하고 있던 곤륜산에 머물게 되었고, 곤륜파를 창시한게 아닐까 싶어요."

"곤륜파의 창시자는 남자 도사가 아닌가?"

"모르죠. 여자가 만든 문파라고 하면 괄시할게 뻔하잖아요. 적당히 키운 제자 하나를 겉으로 내세우고 개파조사 하라고 한 다음, 어느순간부터 자기가 장문인을 수 대에 걸쳐 갈아치운 걸수도."

"답답하면 본인이 하는 부류의 사람인 것 같기는 하지."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여인이 수많은 장문인들을 묻으며 큰 상처를 받았으리라. 그래서 스스로 장문인의 업을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빠, 정말 월녀로 끝일까요?"

"응?"

"만약 월녀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한다면? 오빠도 봤잖아요. 그...성교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방의 흔적을."

혈소예와 곤륜의 절벽 아래에서 비동을 탈출하던 날.

우리는 그곳의 양식을 조사하고 확인했다. 그리고 금방 결론을 냈다.

하은주시대.

태공망 강자아가 은주 혁명기에 주나라의 무왕을 도와 은의 폭군을 물리친 시기.

그곳의 양식은 당시의 고대 시절 모습을 상당히 닮아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착안할 수 있었다.

"선인이 만약 실존했고, 당시에는 살았다가 모두 등선하여 사라졌다고 한다면?"

"천화현녀가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선인이다? 일리가 있군. 다른 자들은 모두 죽었을테니."

본인에게 직접 듣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천화현녀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현녀와 '똑같은 몸'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

"개인적으로 저는 구천현녀의 딸이 아닐까싶어요. 자기 딸이 죽었는데 어떤 어머니가 눈이 안 돌아가겠어요?"

"그런 것 치고는 죽은 시점과 죽이러 내려온 시점이 너무 차이나지 않나?"

"내려오는데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겠죠. 뭐...아님 말고. 죽은 시체에 구천현녀가 빙의해서 죽이러 온 걸 수도 있잖아요? 생각은 정말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죠. 진실은 뭔지 모르지만."

혈소예와 나는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천화현녀는 구천현녀의 화신(化身)이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다.

"사실 그녀가 내려온 계기는 그걸 지도 몰라요."

"그게 뭔데?"

"월녀의 강림. 월영신교에서는 월녀(月女)라고 부르는...월궁 항아의 재림."

월녀(越女)와 월녀(月女)는 다른 존재다.

"미래의 저는 중원 전체의 피를 모아 월녀를 부르려고 했어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거죠."

"그래도 실패했잖아."

"네, 맞아요. 실패했죠. 마지막 순간에...."

혈소예는 볼을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지금까지 오빠한테 말하지 않았던게 하나 있어요."

"일단 듣고 용서할지 말지 대답해야겠는걸."

"......지금의 혈교주, 아빠가 왜 혈겁에 대한 계획을 전면 철회했는지 짐작하시나요?"

"......."

김우성이 왜 무림인 학살에 대한 계획을 철회했는가?

그가 황궁과 인연이 있기에? 아니면 전 무림인을 표사보다 못한 수준으로 끌어내려 무림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든 무림에 대한 복수로 가득차, 아내를 반드시 지상에 다시 불러오겠다는 광기에 차있던 자가 왜?

분명히 고작 나의 피를 통해 기억을 읽었다고 포기하는 건 뭔가 이상했다.

"짐작하는게 있다면 두 가지."

나는 혈소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혈교주보다 강하니까. 너는 혈겁을 원하지 않을테니."

"네. 맞아요. 그럼 두번째 이유는요?"

"...중원 전체의 피를 모아 제물을 모으고 인신공양을 해도, 결국 월녀를 다시 부르는게 실패해서 그런 거 아닌가?"

"정확해요."

그렇다.

미래.

혈겁난세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대규모 학살극이 되어버렸다.

태극검후, 미래천마, 파천신검, 검황, 검제, 기타 등등 수많은 현경 고수들을 쓰러뜨리고 무림 전체를 피로 물들였지만, 전대 혈교주로부터 이어진 혈교의 숙원은 이루지 못했다.

무림 정복이라는 야욕은 달성했다.

하지만 월녀를 다시 지상으로 부른다는 의식은 실패했다.

"수십 만의 피를 흘리고도 실패한 미래를 봐서 나는 포기한 줄 알았지."

"그래요. 아빠는 의외로 포기가 빠른 사람이죠. ...그리고 구천현녀가 내려오는 조건도 수십 만을 학살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혈소예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천살성과 자미성의 결합. 제가 기를 쓰고 오빠랑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 ...최소한 둘 중 한 명은 구천현녀가 내려오더라도 상대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저는 아예 오빠랑 앞으로는 할 생각이 없었어요."

"......."

생사경이 되길 잘했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나는 평생 혈소예의 안에 싸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했던 건가.... 잠깐, 그러면 미래에는-"

"네. ...그, 부끄럽게도."

미래의 혈교주.

"미래의 저는 천살성과 자미성을 하나로 합치는데 성공했답니다."

그녀는.

"이미 죽은 강시나 다름없던 존재를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피를 잇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 거죠."

나와 살을 섞고.

"그래서 구천현녀가 내려올 수 있었던 거예요. 천살성과 자미성이 합쳐지면 천기를 뒤흔들 존재가 태어날테니. 대영웅이 될수도, 대악당이 될수도 있는."

......나의 아이를 가졌다.

"와.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그러니까 스승님은...."

"본인이 한 건 아니죠. 하늘에서 내려오신 여신님이 하신 거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혈소예는 우울한 목소리로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천현녀는 그 날, '세 명'을 죽였어요."

"......."

스승이 말하지 않았던,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그녀가 가진 나에 대한 죄책감의 근원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미래의 자신이 제자의 마음을 꺾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심하게 범할 걸 그랬나?"

"말했으면 오빠, 분명 목을 잘라버렸을 걸요."

"......."

그럴 것 같다.

아마 눈이 돌아가서 혈소예를 구한다는 생각도 못한 채, 중원에 있는 나의 처자식을 생각도 못한 채, 현녀를 죽이기 위해 모든 전력을 쏟아냈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

"소예야. 어떻게 하지? 나 지금 너무 머리가 아파. 당장이라도 곤륜으로 처들어가서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참아요. 그리고...산을 내려오면 죽이죠."

"...응?"

죽인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혈소예까지 현녀 죽이기에 동참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곤륜의 현녀가 어떤 존재든, 그녀를 아무튼 선녀도 타락한 인간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거잖아요? 선기만 빼면."

"그렇긴 하지."

"그럼 간단하네요. 우리에게는 정말 쉬운 방법이 있잖아요?"

혈소예는 자신의 열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죽이고 혈강시로 만들죠. 아...완전히 죽으면 안 되니까, 죽기 직전 상태로 만든 다음 혈강시로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선기를 천천히 오빠의 피로 밀어내는 거죠."

"내 피를 현녀의 심장에 붓는다?"

"네? 뭐하러 아깝게 그래요. 질내사정해서 오빠 색으로 가득 채워버리면 되지."

"......소예야, 역시 네가 옳다."

용봉지회가 열리기 전 어느날 밤.

천가장에서 현녀에 대한 대책을 세우던 날, 나는 혈소예와 뜻을 정했다.

그리고.

지금.

"......소예야."

"네."

"왜 이런 식으로 묶었냐."

내가 아주 손쉽게 쓰러뜨린, 아니 스스로 쓰러져 준 현녀는 지금 혈소예의 혈강사(血罡絲)에 의해 전신이 구속되어 있었다.

"혈교식 구속, 귀갑묶기랍니다."

"......알몸으로?"

"그럼요. 당분간 선기 빼려면 이게 최고라구요. 몸에서 땀 빼는 거랑 마찬가지에요."

"......."

현재. 현녀는 하북팽가의 지하 창고에 알몸으로 구속되어있다.

기절한 상태로.

* * *

현녀를 포획했다!

포획이라는 말은 다소 어색할지 모르지만, 기절시키고 구속하여 창고에 가둔건 분명 포획이 맞다.

"설마 이걸 이렇게 다시 써먹는 날이 올 줄이야."

혈신혜의 취미실.

그러니까 과거, 학혈마녀 팽신혜가 지하에서 여인들을 숨겨 괴롭히고 가두던 지하감옥에 우리는 현녀를 가뒀다.

"........"

현녀는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과도한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것도 한 몫을 했다.

"여기 근데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월이가 새롭게 단장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 잠깐 쓰라고."

"무슨 일로 쓰는데 이렇게 침대가 감옥 방마다 하나씩 설치되어있는건데."

"......."

팽유월이 설치한 것이다. 나는 모른다.

"...하아. 그 언니도 참. 좋아. 일단 저렇게 묶어놨으니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뭘?"

"오빠가 하고싶은 대로 하라 이거야. 예전에는 죽이려고 했다며?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야. 손 하나만 살짝 당겨도 목이 꺾이지. 어떻게 하기를 바라?"

"......."

막상 현녀를 붙잡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내 머릿속으로, 지금, 뭔가 팟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절한 동안 하는 건 재미없지?"

"응?"

"이왕이면 제정신일 때 범하고 싶다."

"...깰 때까지는 봐주겠다는 거네. 좋아. 그럼 그 아이에 대한 복수는?"

그 아이.

혈소예로부터 진실을 전해받은 이후로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한 가지 문제.

새삼스럽지만, 미래의 혈교주가 죽던 마지막 순간.

그녀는 한손으로는 나를 쓰다듬으며, 다른 한손은 자신의 배를 만졌던 것 같다. 그 때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빠는 혈교의 방식대로 무림에 복수의 은원을 끊고자 했지. 그런데...아무리 미래라고 한들, 처차식에 대한 복수는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법이야. 설령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혈소예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복수를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어. 미래의 혈교주보다도 더."

"...아니. 네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처는 다시 되찾았고, 아이는.... 아이에 대한 복수는 하나 뿐이지."

임신.

"미래에서 내 아이를 죽게 만들었으니, 스스로 내 아이를 낳게 만드는 것 뿐."

색마답게, 복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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