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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서로
날이 되었다.
연붕으로서 나는 정체불명의 존재, 백천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스승일까?
현녀일까?
아니면 구천현녀일까?
어느쪽이든 나는 잘 모른다.
차라리 혈소예의 예측이 그저 헛된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는게 편할 것이다.
아무리 내가 생사경에 올랐다고 한들, 생사경으로서 싸워본 적이 없다.
생사경이 없었기에.
그리고 이제 나는 생사경일지도 모르는 여인과 싸워야한다.
저벅, 저벅.
나는 비무장 위에 올랐다.
걱정은 많다. 이미 혈소예를 비롯한 모든 육봉, 그리고 나의 여인들은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상황은 모두 전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할 수 없지만, 곤륜의 현녀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정도만 언급했다.
-아니, 상공을 왜 노리는 거죠?
-내가 천살성이라서?
-끙….
다행히 회귀니 뭐니 머리아픈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천살성.
곤륜의 현녀는 천살성을 죽이려고 한다.
정확히는 곤륜산에 가두고 평생동안 정기를 탐하며 영생을 누리려고 한다.
미묘하게 현실과는 다르지만 큰 틀은 차이가 없다.
현녀가 나를 잡아다가 모진 (성적) 고문을 하는 건 마찬가지고, 나의 기억을 조작하여 다른 여인들에 대해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결국 중요한 건 내가 현녀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오냐 하는 것 뿐.
준비는 만전.
전날 밤, 나는 두 명의 여인으로부터 힘을 건네받았다.
사공희와 팽유월.
나의 아이를 가진, 나의 아이를 낳은 여인들로부터 힘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인연의 힘이 내 몸속에 깃들어있다.
채음보양이지만.
저벅, 저벅.
비무장 반대편.
드디어 그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 다음 호흡을 골랐다.
"...미친."
욕지기가 나오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젊어보이려고 이상한 짓을 하는 건 류서시로 끝인 줄 알았는데, 천외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나의 상대, 백천화는 머리를 한쪽으로 묶었다.
남자들이 머리를 말총처럼 묶은 걸 따라하되, 그녀는 묶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빠져나오게 묶었다.
어려보이긴 하다.
젊어보이긴 하다.
하지만 그 실체가 수백, 아니 수천년도 전의 존재라고 한다면.
조금 생각을 달리해봐야하지 않을까?
"본선 6조!! 좌 연붕, 우 백천화!!"
심판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백천화현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그러게요! 우리, 초면인가요?"
"......."
쓸데없이 발랄하고 활발하다. 반대편에 보이는 혈소예의 표정이 제대로 썩어들어갔다.
"초면이긴한데...여기서 대화를 나눌 건 아닐 것 같고."
나는 발을 앞으로 내딛은 뒤.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하고 올까요?"
나는 단숨에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백천화의 멱살을 움켜쥐고 비무대의 끝을 밟았다.
"자, 장외?!"
나는 비무장 끝을 밟고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단숨에 관객석을 뛰어넘은 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하늘을 밟고 한 번 더 뛰어올랐다.
"허공답보?!!?!"
관객석의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다. 백천화 또한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나, 그녀는 일말의 당황도 동요도 없었다.
여유가 흘러넘쳤다. 나는 전력으로 다시금 허공을 밟고 달렸다.
운룡대팔식.
"......."
나의 성취를 보이는 동시에, 하늘을 달릴 때마다 나의 몸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천혈세."
백천화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있었다.
"...호오."
백천화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옅게 웃었다. 여덟번째 걸음을 디디는 순간, 나는 한 번 더 하늘을 박차고 더 높이 날아올랐다.
아홉번째 걸음으로.
운룡대구식.
"!!"
단 한 걸음차이지만, 그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반인, 삼류, 이류, 일류, 절정, 초절정, 화경, 현경.
한 걸음에 한 단계로 나아간다고 비유하자면, 나는 아홉번째 발걸음으로 하늘을 딛고 날아오른 셈이다.
휘릭.
인적이 드문 산. 나는 백천화를 공터에 내던지며 가볍게 착지했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둘 다 장외로 패배하는게 아닐까요?"
"애초에 남자가 여장을 하고 경기에 나간 순간부터 탈락은 마음먹고 있었던 지라."
철컥.
나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안개는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혈검.
곤륜에서 익힌 무공을 태극혈영신공으로 펼친다.
나는 검을 백천화에게, 현녀에게 겨눴다.
"긴 말 필요없습니다. 검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승부를 보도록 하죠."
"...후."
백천화는 옆으로 묶은 머리끈을 풀었다.
우둑, 우두둑.
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천화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완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예쁜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건만."
"지금도 예쁘십니다."
"...그런가."
입발린 소리는 아니다. 스승, 현녀는 현녀인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
"제자야."
"네, 스승님."
"너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예.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스승으로서. 여인으로서."
내 말에 현녀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단."
나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스승님께서 수많은 제자를 들이신 것처럼, 저 또한 수많은 여인을 들일 겁니다."
"그거랑 이게 같으냐?"
"예, 같습니다. 제게는 제 여인들이 곧 사랑하는 제자이며,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입니다."
"반려라는 말이 그럴 때 쓰는 건 아닌 듯 한데."
"상관없습니다."
고오오.
대나무 사이로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허공에 흩날리고, 우리의 사이에 작은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셋.
"제자야. 내가 이기면 너는 곤륜으로 와야겠다."
둘.
"스승님. 제가 이기면 천가장에서 평생동안 나오지 못하실 겁니다."
하나.
"이기는 쪽이."
"다 가지는 겁니다."
나는 전력으로 앞으로 뛰었다.
스승 또한 검을 들고 나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카ㅡ앙!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생사결이 시작되었다.
* * *
웅성웅성.
갑작스레 사람이 사라졌다.
연붕은 백천화를 납치하듯 비무장 밖으로 들고 사라졌고, 관객들은 연붕이 보인 무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공답보…?"
"아니, 그러면 도대체 경지가 어느정도야?"
"그보다 저러면 장외 아니냐?"
혼란.
객석은 전부 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참가자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곳에서도 시비가 갈렸다.
장외인가?
장외가 아닌가?
과연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장외요!!"
누군가가 내공을 실은 사자후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붕이라는 자의 실체가 어떻든, 비무장 밖으로 나갔으니 장외요!!"
남궁산.
남궁세가의 가주는 뻔뻔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가 왜 장외를 주장하는지 알고 있던 이들은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남궁산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연붕은 비무를 방폐했소이다! 이곳을 찾은 수만 관객들과 무인들을 조롱하고 능욕했소! 그러니 장외로 처리해야하오! 하지만 먼저 밖으로 나간 건 곤륜의 여제자니, 둘 다 실격패!"
"하, 하지만 그러면 곤륜의 신예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
남궁산은 침묵했다. 현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한 와중에, 피해자를 구제하지 않는다?
"...쳇. 지 딸이 질 것 같으니까 바로 둘 다 떨어뜨리려고."
어디선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남궁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지만,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둘 중 누가 올라가든 남궁유린이나 모용란은 이기겠지?"
"허공답보를 쓰는 고수잖아."
"곤륜의 여제자는 용봉지회에서 나왔다 하면 우승 아니었어?"
이미 곳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남궁산은 특정 누군가를 콕 집어 일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남궁세가의 가주라고 한들, 명분이 적고 속보이는 와중에 당당히 호통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그만."
객석에 앉아있던 맹주, 독고자영이 몸을 일으켰다.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였으나, 우리는 냉정하게 판단해야합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둘이 싸우기에는 이 비무대가 너무 좁다는 것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관객석의 사람들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독고자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저들은 객석에 피해가 가지 않게 싸우고자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전력을 내기 위해서는...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무예를 다투려고 하는 걸수도 있지요.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짝!
독고자영은 심판을 향해 손벽을 치며 소리쳤다.
"계속 그들을 기다릴 수 없는 바! 다음 경기를 속개합시다! 둘의 비무는 다음 일전의 상대 앞에 서는 자가 승자로 생각하겠소!"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폭거를…!"
"모용은 찬성입니다."
"네놈…!"
남궁산은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승자의 다음 경기는 이틀 뒤. 그 전까지 맹주의 앞에 먼저 나오는 자가 승자가 되겠지요. 물론 상대를 강제로 들고 밖으로 나간 연붕 소저의 행동은 문제가 되나...정말로 피해를 주기 싫어서 나간 거라면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왜 말이 되지 않소? 그럼 저들 중 누군가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한단 말이오? 다음 경기가 언제 시작될 지 알고?"
웅성웅성.
여론은 점차 독고자영이 제시한 제안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황녀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고자영은 황녀를 향해 허리를 푹 숙이며 의견을 구했다. 황녀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의 뜻이 옳습니다. 하지만 남궁 가주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하도록 하지요. 만약 다음 경기에 둘 중 누구도 나타나지 않을 경우, 둘 다 실격패입니다. 승자는…먼저 주최측에 귀환을 알리는 자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모두 들으라! 이 경기는-"
와아아아아!!
놀랍도록 별다른 문제없이,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카앙, 카앙!
검과 검이 부딪힌다. 검강이 서로 깎여나간다.
"고작 그 정도로 나를 이기려고 했느냐?"
스승은 담담히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별다른 초식은 없었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그녀의 검은 누구보다도 짙은 살기가 느껴지는 살검이었다.
파천신검의 검세보다도 더 검기가 날카로웠다.
"곤륜의 초식은 전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 거 없다. 상대를 죽이고 제압하는데는 세 가지면 충분해."
베고, 베고, 찌른다. 나는 스승의 검을 똑같이 받아쳤다.
"이거 삼재검법 아닙니까?!"
"삼류 무사가 익히기 쉽다는 말은, 즉 검술의 근원적인 기본기라고 할 수 있지."
카가각.
검강이 단숨에 깎였다. 나의 핏빛 강기는 현녀의 검에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크으윽…!"
역시 검으로는 이길 수 없는 걸까.
"한 가지 말하자면, 나는 딱히 검에 재능이 없었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도요?"
"시간이 해결해줬지."
현녀는 담담히 말하며 웃었다.
"일년이 안 된다면 십년을, 십년이 안된다면 백년을. ...반만년 동안 응어리진 검기란다."
"스승님, 5천살 쯤 되는 겁니까?"
빠득.
스승은 이를 갈며 검을 휘둘렀다. 단숨에 내 강검이 박살났고, 나는 뒤로 크게 뛰어 거리를 벌렸다.
"사실 곤륜의 개파조사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곤륜의 개파조사는 원시천존이시다. 나는 그분의 아래에 있던 제자 중 한 명에 불과했지."
"......선녀가 진짜였네."
"선녀라기보다는, 선인이지."
현녀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내가 검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한 듯 조용히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인이 어떻게 이곳에 내려온 겁니까?"
"목숨을 걸고."
현녀는 담담히 말했다.
"지상의 공기가 내게는 독처럼 작용한다면, 독을 감내하면 되는 것이지."
"...예?"
"간단한 이치다. 나는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으니."
현녀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제자야. 이미 그 대답은 네가 직접 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느냐."
현녀는 담담히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은게 있을 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