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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강호의 도리는 지켜졌다.
20대까지 출전 가능한 경기에, 심지어 이전에 한 번 용봉지회에서 육봉의 좌에 이름을 올렸으면서, 어딜 감히 또 한 번 청춘을 구가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사기꾼을 잠시 객잔으로 불렀다. 그녀의 앞에 당당히 본모습을 드러낸 채, 핏빛 강기의 실로 의자에 전신을 구속하여 앞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이름."
"......."
그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취조당하는 무림 여고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생각 없다. '그 어떤 모욕에도 나는 실토하지 않겠다!'하는 생각이거든 집어치워라."
"...류서시."
그녀, 류서시는 뚱한 얼굴로 본명을 말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애완동물마냥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다. 그러면 묻지. 왜 네가 직접 출전한 것이냐?"
"...나도 희생된 것이다."
"희생?"
"그래. 그...삼존녀께서 자신들이 출전하겠다고 하신 걸 말리고, 아미파에서 내가 대표로 출전한 것이야."
순간, 나는 삼존녀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띵하게 울렸다.
"삼존녀라고 하면 그 노모파 여고수들…?"
"그래. 반로환동을 하시고 난 뒤,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시어 용봉지회까지 나간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직접 검으로 그분들을 꺾었다. 아미파에서는 단 한 명만 대표로 출전하겠다고 했지."
"......."
류서시는 주책이 아니었다.
더 큰 주책을 부리려는 자들을 억제하려고 스스로 희생한 여인이었다.
'안쓰럽군.'
60~70대 노인이 20대 여인을 연기하는 것을 두고보지 못한 나머지, 40대 여인이 20대 연기를 해야했단 말인가!
"미안하구나. 아미파의 대표가 본선 1차전에서 탈락하게 되어."
"괜찮다. 아미파의 대표는...아직 한 명 더 있으니."
"아."
빙백봉 유설라. 그녀는 아미파를 떠났을지언정, 여전히 아미파의 검을 사용하며 아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그래서 류서시가 쉽게 경기를 포기했을 터.
"그런데…벗이여. 그 모습은 무엇인가? 천무명도 아닌 것 같은데."
"내 본모습."
"......."
류서시는 멍하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살핀 뒤, 손가락을 튕겨 내 머리색도 본색을 드러냈다.
사아아.
"천마를 쓰러뜨린 자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 그게 나다."
"과연…. 평범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그런데 왜 연붕이라는 여인으로 출전한 건가?"
"내 여인을 욕보이는 자들을 단죄하기 위해서."
내 여인들. 류서시는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말이야."
나는 류서시의 턱을 위로 들어올렸다.
"설라는 따지고보면 북해빙궁의 사람이지, 아미파의 여자가 아니지 않나? 지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구파일방 팔대세가에서 한 명씩 내 집으로 끌어들이고 있단 말이지."
"......."
류서시는 이해가 빠른 여자다. 나는 류서시의 턱을 붙잡고 나와 얼굴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아미파에도 한 명 있었으면 하는데, 혹시 아는 여자 있나?"
"...천서아?"
"틀렸다."
톡.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려, 류서시의 하복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부르르.
류서시가 몸을 떨었다. 필히 하단전 너머에 있는 것이 떨렸을 터.
"천서아가 아니다."
"그러면...류미아는 어떤가?"
톡.
"아흣…."
나는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고문은 아니지만, 한 번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그녀의 몸은 점점 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나의 무공은 피와 조법.
상대의 혈기를 들끓게 하는 동시에, 손가락을 고리처럼 만들어 적을 현란하게 유린하는 것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묻지. 아미파에서, 나의 여인이 될 여자가 있나?"
"......정말, 괜찮겠는가?"
그녀는 눈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욕심을 부려도 되는 건가?"
"욕심? 아니지, 아니야. 욕심은 내가 부리는 거지."
"벗이여, 그러면 내가…."
"틀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꾹 아래로 눌렀다. 류서시는 파르르 몸을 떨며 옅게 웃었다.
혈교주는 말했다.
"남녀사이에, 친구란 없다."
츄릅.
나는 오늘. 친구 한 명을 잃었다.
* * *
아미파 정사사태의 탈락.
독고자영은 홀로 방 안에서 술을 기울이며, 15개의 대진표를 쭉 훑었다.
"음…."
용봉지회에 이변은 없다.
구룡쟁패의 9조와 육봉쟁패의 6조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정상적인 비무와 대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9조와 6조는 '죽음의 조'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에 편성된 이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조에 편성되지 않은 이들은 '황금의 조편성'이라며 기뻐했다.
본선에서 우승하면 끝이다.
다른 조가 어떻든, 결국 우승하는 사람이 구룡육봉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피해를 보는 가문이 있다면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혹자는 말한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죽음의 조에 편성된 것은 독고자영이 부맹주인 남궁산을 견제하려는 악의가 아니냐고.
하지만 이는 모함이다.
독고자영이 부맹주 남궁산을 견제한다는 건 모함이다.
"...산이, 그 놈."
왜냐면 독고자영은 남궁산을 적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공 수위도 화경이라 '무림맹주'가 되기에는 낮고,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 냉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만약 20년도 전의 무림이었다면, 그리고 당시에 독고자영처럼 강했다면 모를까.
"...사람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
독고자영은 쓸쓸히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을 비우고 두 잔을 넘길 때 즈음, 멀리서 비틀비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맹주…!"
"...부맹주."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남궁산은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독고자영에게 다가왔다.
쿵!
그리고 그는 독고자영의 책상 앞에 술병 여러 개를 던져놓았다.
"한 잔 합시다, 씨발!"
"......일단 앉게."
독고자영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남궁산은 술병 하나를 들어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맹주, 맹주가 저한테 이러면 안 됩니다."
"알지. 내 잘 알지."
독고자영은 남궁산과 함께 술을 기울였다. 그가 가져온 화주는 술의 향이 너무 강해 불이라도 피우면 술이 활활 타오를 지경이었다.
"맹주의 자식만 자식입니까? 패와 유린이에게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네."
"최소한 한 명이라도, 아니 유린이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줄 수 있었지 않습니까. 차라리 천무명, 그 자와 패가 마지막으로 실력을 겨루도록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본선이 아니라, 구룡이 되어 천하제일룡을 겨루는 곳에서!"
"그렇지. 그게 가장 깔끔한 일이지. 하지만 산, 자네도 알지 않은가?"
독고자영은 남궁산을 바라보며 술병을 열어젖혔다.
"패, 그 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천무명을 적으로 두고 있네. 천무명과 상대해야만이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야."
"압니다. 그게 왜 하필 본선이냐 이 말입니다…!"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팽...태양을."
"......."
남궁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순식간에 그는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 세가의 가주'급'조차 이기지 못했던 자일세. 그리고 보았잖나. 팽태양, 그 자가 천무명과의 대결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모습을. 비록 팽가 특유의 성급함 때문에 일을 그르쳤으나-"
"맹주.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남궁산은 이를 갈며 술을 다시 들이켰다.
"그건 스스로 포기한 겁니다. 팽태양...그 자가 뭔가를 위해 자신의 발전조차 포기한 겁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미래입니다. 그 자는 팽가와 천가를 하나로 엮을 생각인 겁니다!"
"그건 너무 나갔네."
"혹시 압니까! 이미 팽가에도 천무명의 여자가 있을지!"
"남궁산!!"
쾅!
독고자영은 주먹으로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남궁산도 침을 꿀꺽 삼키며 침묵했다.
"...그쯤 하시게. 그 이상 하면-"
"아버님…?"
독고자영의 뒤.
방 안쪽의 방 문이 열리며, 백발의 여인이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여,연아. 아무것도 아니다. 오랜만에 부맹주와 한 잔 하다가…."
"아...부맹주님을 뵙습니다."
"그, 그래. 연이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남궁산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독고연. 누구보다도 천무명과 가장 인연이 깊은 여인. 그녀의 앞에서 천무명이 다른 여인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의혹을 제시했으니, 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혹시 듣거나 한 건 아닐까? 남궁산은 괜히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고작 20대 초반의 여인일진데. 이제 나이를 먹어 20대 중반에 이르고 있을텐데.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자신을 뼛속까지 살펴보는 듯한 저 눈은 뭘까.
"...잠시 밤산책을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연아?"
"방 안에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해서요. 괜찮습니다. 호위 분들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
독고자영은 술과 독고연 사이에서 시선이 흔들렸다.
"아버님. 괜찮습니다. 이곳에는 그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를 믿으셔요.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독고연은 허리를 푹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독고자영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주저앉았다.
"젠장…."
"...위험한 거 아니오?"
"...위험하기는? 나는 이제 연이를 말리지 못하오. 저 아이가 밤 산책을 나가는게 무엇때문인 줄 아시오? 그 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외다."
".......말려야하는게."
"무슨 명분으로?"
독고자영은 술병을 다시 꼬나쥐었다.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청년이오. 나는 이미 그에게...두 번이나 빚이 생겼단 말이오. 정말 싫지만,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하아."
"......."
어째서일까. 남궁산은 자신이 분노를 성토하러 왔는데, 독고자영의 울분 가득한 푸념을 듣게 되었다는 생각에 오한이 들었다.
"하아, 들어보시오. 그러니까…."
"......."
독고자영은 새로운 술병을 열어젖혔다.
"......?"
순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향이 왜 이렇소?"
"혈교에서 판매하는 것이라더군. 과일주라고 하던가."
"......."
독고자영은 인상을 구기며 한 잔 입에 털어넣었다.
"...젠장. 술 맛은 좋군. 들어보시오, 산. 나도 말이야…."
그는 궁시렁거리며 술병을 비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남궁에…."
남궁산은.
술을 마시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렸다.
* * *
용봉지회에서 한창 화제거리가 되는 존재가 누구일까.
바로 천무명이다.
팽가의 청년, 팽태양을 상대로 보인 압도적인 무위에 많은 무인들은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도 그가 기거하는 곳을 몰랐다. 그는 대회가 있는 순간이면 홀연히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천무명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혈안이 된 이들도 가득했다.
누가 알기나 할까.
천무명의 거처는 하북팽가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팽가에 방문하는 '누군가' 때문에 그걸 알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흥, 흐흥, 흥."
독고연은 즐거운 마음으로 팽가에 방문했다. 제법 늦은 밤이었지만, 팽가는 독고연을 환대했다.
"유월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팽유월을 만나러 왔다. 팽가 내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통한다.
"그, 팽유월 님은…."
하나는 분가에서 온 이들이 난색을 표하는 경우. 이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독고연의 방문에 대해 몹시 난감해했다.
그녀의 뒤에 붙은 무림맹의 여고수들 대부분이 초절정 수준에 이르르기에, 자신들이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팽가 내에서 극히 일부, 모든 정황을 알고있는 시종이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호위 분들은…."
"저희는 여느때처럼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언니들."
독고연은 호위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들뜬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흐, 흐흥, 흥...."
안으로 들어갈수록, 독고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녀를 따르는 시종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거리를 벌렸다.
끼이익.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팽가 깊숙한 곳 내부 장원 안으로 독고연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팽가의 시종들조차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는 한 명의 청년이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서있었다.
"가가."
"...연아?"
적발의 청년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흐응...."
그의 뒤.
"하악, 하악...."
청년이 쥔 붉은 강기의 목줄은 길게 늘어져, 누군가의 목에 채워져있었다.
안대에 귀마개까지 채워진, 나신의 여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