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25화 (52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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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팽가의 도는 간단하다.

단순명료.

강하게 벤다. 빠르게 벤다. 베기 위한 모든 일격은 하나하나가 살초에 가깝다.

카앙, 카앙!

그걸 나는 정면에서 받아내야했다. 팽도황은 자비가 없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 미친 양반이 진짜 전력을 내면 어떡해?!'

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그 감정을 실어 그를 노려보고 검을 휘두르지만, 팽도황은 오히려 더 탄성을 내지르며 참마도를 휘둘렀다.

"크하하! 역시 천무명!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부--웅!

참마도가 내 머리를 스쳤다. 검을 비스듬히 세워 튕겨내기에 딱 좋은 위치였으나, 팽가의 도를 상대로 감히 맞받아친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하리라.

피하지 않으면 베인다.

참마도가 일으키는 파공성 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데, 검이라고 제대로 버티겠는가?

'진짜 미칠 것 같다.'

희아연월검이 아무리 최고의 재료를 섞어서 만든 검법이라고는 해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그 한계가 화경으로 되어있는 이상, 그 이상의 전력을 내는 건 역부족이다.

'파천신검이 튀어나와선 안 돼.'

희아연월검의 근간이 드러나서는 결코 안 된다. 나는 팽도황의 참마도를 계속 피하다가 틈새를 엿봤다.

'지금!'

나는 검을 앞으로 빠르게 찔렀다. 팽도황은 그에 엄청난 기예를 보였다.

"우오오오!!"

팽도황은 참마도를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비무장 바닥이 순식간에 폭발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크윽?!"

나는 검을 회수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흙먼지와 함께 참마도에 붕괴된 비무장의 돌조각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사락!

나는 반원을 그리듯 검을 휘둘러 검풍을 일으켰다. 그게 마치 흙먼지를 뿌리치고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라, 나는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망할 검선!'

와아아아!!

화려함.

모오오옵시 불필요한 화려함 덕분에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지기 짝이 없는, 소위 겉멋 가득한 검세에 나는 검을 불끈 쥐었다.

"...설마 비무장을 폭파시킬 정도라니. 벽력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소."

"흐흐. 고작 이 정도로 그러면 섭섭하지. 아직 보여주지 못한 무공이 훨씬 많은데."

팽도황은 사납게 웃으며 또다른 자세를 취했다. 참마도를 한손으로, 그것도 역수로 움켜쥐며 허리 뒤로 넘겼다.

"이번에는 이것도 한 번 받아보겠느냐?"

"...후, 미치겠군. 다른 무사들의 자존심을 단번에 꺾어버리는구려. 대놓고 화경이 본색을 드러내니, 일류 고수들은 어디 뭐 검을 들 수 있을까?"

일류는, 고수다.

하지만 용봉지회에서 화경이 둘이나 출전한 이상, 일류를 누가 고수라고 칭할까.

"고작 이런 걸 보고 꺾이면 거기서 끝인 거지. 흐흐, 그리고...."

팽도황은 나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어차피, 둘 중 한 명만 올라가는 대진."

'젠장.'

"결과는 정해져있지않나. 흐흐흐."

화경 둘이 구룡이 된다면 다들 비토할 것이다. 하지만 화경 둘이 서로 맞붙었다면, 다들 기적의 대진이라 칭송하겠지.

'대진도 대진이지만, 상대가 너무 나빠.'

"하지만 그냥은...끝낼 수 없지."

왜.

나를 상대로 전력을 도모하려는 자들은, 나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걸까.

고오오오.

팽도황의 참마도에 서서히 푸른 강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젠장.

* * *

그 시각.

"유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상공이요."

팽유월은 가차없이 천무명의 승리를 점쳤다. 사공희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 가주님도 분명 강해지시긴 했지만…."

"그 강함이 결국 상공을 상대로 대련하여 얻은 강함이잖아요."

그렇다.

하북팽가의 가주, 팽도황은 종종 비천색마와 대련을 했다.

색마가 보여주는 수많은 '화경급' 무사를 상대로 오호단문도를 단련하며 수련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패배'.

"상공이 정제한 검법을 상대로 한 건 아니지만…."

"언제나 한 끗 차이로 도가 닿지 못했다고 하셨죠."

팽유월은 배를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었다.

"아버님께서 많이 분해하셨어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가르침을, 그것도 훨씬 어린 자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죠. 아마 병을 앓기 전이었다면…절대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거에요."

하북팽가의 가주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했다.

하북의 지존이며, 무림 세가에서도 결코 다른 세가에 밀리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가 아무리 현경급 고수라고 한들, 자신보다 어린 청년을 상대로 가르침을 청한다?

심지어 친딸의 문제도 엮여있는데?

"아버님은 단 한 번, 그 한 번의 기회만 바라고 계셔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상공에게 자신의 칼로 일격을 먹이고 싶어하시죠."

"그렇, 군요…. 음…."

사공희는 다소 불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님도 지금 복잡하실 거에요. 상공은 잘 모르시지만, 아버님도 사실 지금 경계에 서 계시거든요? 소예가 말하길, 약간의 계기가 터지기만 한다면 다음 단계도 생각해보실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역시 상공이 이길…."

"윽…?"

"견희…?"

사공희는 배를 부여잡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팽유월은 뭔가를 눈치채고 사공희에게 다가가 이불을 걷었다.

"헉…."

사공희의 아래는 축축히 젖어있었다.

"이, 이거 설마…? 왜, 왜 말 안 했어요?!"

"아니...그...전혀 느낌이 없…."

"...설마 화경이면 산통도 없…."

우두둑.

사공희는 벽을 갑자기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에 벽이 순식간에 쪼개지기 시작했다.

"아으…."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팽유월은 급히 사람을 불렀다.

"무슨 일...어머나."

"서, 설마 진짜로?! 잠깐만요! 물 받아올게요!"

난리가 났다. 팽유월은 사공희를 반듯하게 눕히며,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걱정마세요. 숨 크게 들이마셔요. 다 잘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저...어떻게 하죠…?"

사공희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사공희는 침대를 움켜쥐며 눈물을 흘렸다.

"상공이...지금 보고 싶어요…!!"

팽유월은 울컥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비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 *

와아아아!!

환호성이 연이어 울려퍼진다. 오늘 있었던 모든 비무 중에서 아마 우리의 비무가 가장 인기를 끌지 않을까.

"하아, 하아."

호흡이 점점 흐트러진다. 팽도황의 연격을 정해진 한계 내에서 막으려고 하니 절로 몸이 달아올랐다.

"크하하…."

그건 팽도황 또한 마찬가지. 본인이 20대 중반의 고수로 등판을 했는 것 조차 잊어버린 듯, 팽도황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참마도를 연신 휘둘렀다.

"좋구나, 좋아!"

당연히 좋겠지. 무아지경으로 자신의 전력을 쏟아낼 수 있을텐데.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무공에 심취해있다. 아무리 서로 전력을 발휘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하다.

'왜 나랑 싸우면서 다들 강해지는 거지?'

초절정이었던 팽이왕은 화경 고수가 되며 팽도황이 되었다.

"후우우…."

그리고 이제 그는...진정한 팽태양으로 거듭할 지도 모른다. 상상도 못한 엄청난 경지에 오른 것도 모를테지.

나를 상대로, 천무명을 상대로 싸우며 그는 비무 중에 성장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비무를 이어나가면….

"...응?"

펄럭, 펄럭.

하늘에서 자꾸 그림자가 스친다. 햇빛이 비쳤다 가렸다 하는 바람에 팽도황을 주시하기 쉽지 않다.

이름이 팽태양이라고 태양까지 팽도황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닐진데, 왜 자꾸 이렇게 햇빛이-

"...?"

나는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날개를 좌우로 펼친 채 내 시선을 끄는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를 보았다.

펄럭, 펄럭.

독수리는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하, 숨을 고르는 것인가?"

팽도황은 내 움직임에 뭔가 이상을 느낀 듯 말을 걸기 시작했다.

"좋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덤벼라! 이 팽태양의 오호단문도 앞에 긴장할 수밖에 없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나는 뒷걸음질치며 팽도황으로부터 거리를 벌린 뒤, 독수리가 그리는 글자를 살폈다.

산.

통.

"......?"

독수리가 글자를 쓰는 것도 이상한데, 독수리가 산통이라는 글자를 쓴다?

그것도 '검은 독수리'가? 산통이라고?

'누구?'

까악.

독수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하북팽가의 방향으로 사라졌다.

아래로 크게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가는 그 움직임이 마치 유선형의 물고기처럼-

빙글.

마치, 태극을 그리는 것 같아 나는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젠장."

아니, 갑자기? 왜?

'설마 어제 그게 암시였던가?'

나는 갑자기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밖에서 일을 하느라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고 평생을 구박받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이냐고? 객잔에 지나가는 선배 유부남들이 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

월아의 아버지로서 나는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 몰라도, 아이를 낳는 여인의 남편으로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 때 제일 잘해야 해.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건 절대 안 되더라도, 문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평생 고마워한다니까?

-그리고 그 반대가 되면...평생 지옥같은 삶을 사는 거지.

"......."

달려가야한다. 하지만 지금 팽도황은 어떤 단계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다.

내가 조금만 더 합을 맞추고, 내가 조금만 더 정교하게 검을 맞대면 그는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무인으로서의 나인가, 지아비로서의 나인가?

"...하북팽가는."

갑자기, 팽도황이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길게 싸우는 걸 싫어한다. 화끈하게, 일격에 결착을 내자꾸나."

"......!!"

내 의사는 묻지도 않았다. 이미 팽도황은 참마도를 어깨 너머로 넘기며, 강기를 불어넣으며 자세를 잡았다.

"뭉그적거리는 건 팽가의 성정에 맞지 않아! 팽가의 도를 똑똑히 보아라! 천하, 그 누구보다도 호쾌한 일격을!!"

팽도황은 나를 향해 뛰었다.

자신의 뒤에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향해 참마도를 겨눴다.

"......희아연월검, 극의."

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들어올린 검에 나의 내기를 불어넣었다.

사아아-

청명한 기운이 붉은 기류로 주변에 흩날린다. 마치 핏빛꽃이 내 주변에 피어오르듯, 검기의 기류가 내 주변에 흐르기 시작했다.

"저, 저 무공은?!"

"자하신공? 아, 아니야! 색이 붉은데?! 자하신공은 보라색이잖아!"

"처음보는...독문무공!"

관중석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걸 무시한 채, 오직 팽도황만을 바라보며 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흐."

그는, 웃고 있었다.

"일소풍생(一嘯風生)!"

나는 그를 향해 눈으로 인사한 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희아연월검.

홍월반원참(紅月半圓斬).

붉은 동산이 수직으로 쪼개지듯, 나는 팽도황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카앙-!

승패는, 한순간이었다. 나는 앞으로 걷고, 팽도황은 참마도를 앞으로 겨누며 착지했다.

"...훌륭한 일격이었노라."

쿵.

팽도황의 참마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고, 팽도황이 잡은 참마도는 칼날이 불과 삼 척 정도만 남아있었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승패를 정하는 심판마저 굳어버렸다.

"크하하하하!"

팽도황은 하늘을 향해 껄껄 웃었다. 떨림이 느껴지는 그의 어깨에서 많은 감정이 느껴졌으나, 나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쿵!

팽도황은 바닥에 부서진 참마도를 찔러넣었다.

"졌소이다!"

그리고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또한 검을 집어넣은 뒤,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스, 승자!! 천무명ㅡ!!!

와아아아아!!

때늦은 환호성과 함께, 나는 비무장을 내려왔다. 나를 향해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무시한 채, 천천히 비무장을 내려와 대기실로 향했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틈을 타, 바람처럼 달렸다.

하북팽가로.

그리고.

"견희야!!"

"상공. 들어오시면 아니 됩니다."

팽유월은 나를 막아세웠다. 나는 문틈 사이로 보인 사공희와 눈이 마주쳤다.

"견희야...!"

"......."

그녀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상공. 믿어주세요."

뭐든지 다 잘 될거라는, 확신에 찬 미소로.

"저는...천재니까요."

끼이익.

문이 잠겼다.

[작품후기]

누구는 양심이 터졌는데

누구는 양수가 터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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