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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523화 (52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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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때는 무림의 용봉이었다

남성부 예선은 금방 끝났다.

나는 바로 하북팽가로 달려갔다. 팽가 안에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사공희와 팽유월은 나를 살갑게 반겼다.

"가주는 어디에 있지?"

"가주님이요?"

"그래. 이 인간…."

"여기있네!"

팽도황은 금방 나타났다. 아니, 지금은 팽도황이 아니다.

구릿빛 피부. 근육질의 몸. 그리고 20대 청년처럼 말총처럼 묶은 머리.

스스로를 팽태양이라고 부른 이 발칙한 청년이 바로 나의 본선 첫 상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별 거 있나. 흐흐. 대진표를 조작했다네."

"뭐요?"

불법이다. 위법이다. 어떻게 대진표를 조작하면서까지 나와 본선 첫 대결을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당장 관에 고발하겠습니다."

"어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말게.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 그런 거야."

"저랑 한 번 붙어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팽도황은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자네는 강해. 현경...아니 그 이상의 경지라는 건 솔직히 내가 잘 모르겠네. 나도 화경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만들어나가는 그 '독문무공'. ...그것은 얘기가 다르지 않나?"

"윽."

"나는 비천색마에게 지네. 비천혈마에게도 지지. 하지만 천무명이라는 청년은 어떤가? 희아연월검을 쓰는 20대 청년 고수는 어떠냔 말일세."

"......비슷할지도."

그렇다.

나는 현재 천무명으로 싸우고 있다. 아주 예전부터 순수하게 내가 쌓아온 검을 바탕으로 싸우고 있다.

그 실력이 어느덧 화경에 이르렀다.

'검에 대한 재능은 확실히 피에서 오는 재능인 건가?'

정파의 유명 검가와 마교제일검의 피가 섞인 사람이 나다.

새삼스럽지만 혈소예의 말에 따르면 천살성의 운명까지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핏줄과 운명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희아연월검을 어느새 상당한 경지에 이를 정도로 '만들어냈다'.

조합해냈다.

"무림맹주는 자네에게 정말 애증의 심정을 가지고 있네. 딸아이를 치료해주고 구해준 남자지만, 그래도 딸아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십분 이해합니다."

나를 상대로 하는 건 기분이 나쁘지만, 이제는 나도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아빠보다 가가를 더 따르는데 당연히 싫겠지.'

이시아의 아버지인 천마는 나를 죽이려고 들었다.

그저 강자를 내 대전상대로 붙이려는 무림맹주의 심술은 차라리 더 온건한 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왜 하필 첫 상대가 장인어른입니까."

"그건 내가 자네와 붙어보고 싶기 때문일세. 그리고…흐흐."

팽도황은 일부러 말하지 않으려는 듯 뒷말을 흘렸다.

"나중을 위한 재미로-"

"아버님?"

"......자네와의 비무를 원한 건 나 뿐만이 아니야."

팽유월의 한 마디에 바로 팽도황은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핏기가 가셨다.

"혼자가 아니다?"

"그래. 나를 비롯해서 정체를 숨긴 이들이 자네와의 비무를 엄청 바라고 있네. 누군지는 나도 말하지 못해. 왜냐면…."

팽도황은 쓰게 웃었다.

"내가 첫번째인 이유가 무엇이겠나? 내가 제일 젊어보여서?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혹시 장인어른, 제일 약하십니까?"

"......자네, 그건 확실히 알고 있게. 이번 용봉지회는 용봉지회가 아니야. 다른 이들은 용봉이 되기 위한 다툼이 될 지 몰라도, 자네에게만큼은 용봉과의 다툼이 될테지."

"......."

'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과의' 싸움. 시사하는 바는 한 가지 뿐.

"반로환동하고 어린 아이들 학당에 와서 천자문 자랑하는 꼴이로군요."

"윽…!"

"좋으시겠습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20대라고 속일 수 있어서."

"그건 좋지. 나이들어보이는 것보다는 좋지 않은가."

이해는 한다. 머리가 벗겨진 것 보다는 머리가 풍성한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처럼, 나이와 외모 또한 마찬가지다.

-한 살이라도 어린게 최고예요.

혈교주는 말했다.

-젊음이 최고야. 강호 무림의 여자들 중 3할은 노화방지와 피부미용 때문에 무공을 익힐 거예요. 반로환동이라는게 왜 있겠어요? 정신의 시간은 되돌리지 못해도 육신의 시간은 되돌려서 젊게 살려고 하는 거죠.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과거로 돌아온 내가 보증할 수 있다.

"걱정말게. 우리를 전부 이기면 자네는 명실공히 천하제일룡이 되어있을 걸세. 하하, 이 팽도황이 첫 상대로 나올 정도이니…."

"잠깐만요. 그러면 조작된 대진표, 혹시 저만 개고생입니까?"

"......뭐, 3번만 고생하시게."

내 구역 본선이 16강이거늘, 3번을 고생하라?

"이런 미친. 4번을 싸워야 구룡 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왜 3명이오? 또 갑자기 이상한 현경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 무림맹주가 직접 싸우기로 했나?"

"......."

팽도황은 그저 웃기만 했다.

* * *

"......."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홀로 방에서 차를 마시며 벽에 걸린 대진표를 훑었다.

본선 9지구 제 1차전.

천무명 대 팽태양.

팽도황이다.

오호단문도의 주인이며, 하북팽가의 가주이며, 아주 예전에는 도룡이라는 별호를 당당히 챙겨갔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천 공자에게 너무 심한 짓을 하는 건가…?"

주인공 만들기.

용봉지회를 흥하게 만들려면 주인공이 필요하다.

이미 혼사길이 막힌 독고연을 품어줄 수 있는 건 천무명밖에 없으니, 그 천무명을 영웅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이류, 일류 고수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고 구룡에 이름을 올린다?

아니다!

누구보다 강한 고수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마지막에는 원래 구룡이었던 자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

"음…."

무림맹주에 의해 조작된 대진표.

그 위, 천무명의 반대편에는 '남궁패'라는 이름이 걸려있었다.

쿵!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얼굴이 시뻘게진 남궁세가의 가주이며 부맹주-남궁산.

"이게 무슨 개짓거리요, 맹주!!"

"...개짓거리라니. 말이 심하군."

"해명하시오!"

남궁산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남궁산을 막지 못한 군사 제갈길은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렇게 열을 내는가. 지금 저기 대진표에 박힌 이름들이 안 보이나?"

"보이지! 암, 보이고 말고! 본선 1조로 올라갔어야 할 남궁패가 9조로 바뀐게 훤히 자-알 보이는 구려! 우리 남궁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지?! 견제하려고 하는 것이야! 맹주 자리를 빼앗길까봐!"

"...자네, 혹시 한 잔 했나?"

독고자영은 미약한 술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오늘은 봐주겠네. 천무명과 결승에서 상대하는 건...남궁패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야."

"만약! 패가 저 천가놈을 이긴다면 어찌할 것이오?!"

"......이기면 이기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뻔해서 그렇소! 맹주답지 않게 너무 뻔해서! 내가 병신인 줄 아시오?! 독고연을 천무명에게 보내고, 천무명을 독고무명으로 만들려는 그 계획을 내가 모를 것 같냐는 말이오!! 그리고 우리 패를, 패를…!"

독고자영을 삿대질하는 남궁산의 손은 분노롤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감히 천가놈의 이름을 널리 알릴 발판으로 삼으려고…!!"

"...남궁 소협이 이기면 되는 일일세. 자네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아니면 자네는 자식에 대한 자신감이 그리도 없나?"

"이, 이…!!"

남궁산은 검을 뽑지도, 주먹을 들지도 못했다. 그는 이만 갈다가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우지끈!

"두고보시오! 누가 이길 지!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줄 것이오!!"

남궁산은 역정을 내고 떠났다. 독고자영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이번에는 너무 과하셨습니다, 맹주. 아무리 남궁 가주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한들…."

"미안하네."

제갈길마저도 나지막하게 독고자영을 타박할 정도. 독고자영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난들 천무명을 띄워주고 싶겠냔 말이야. 아니, 띄워주고 싶지.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복잡한 마음이 7:3...정도는 되는 것 같군."

"저도 이해합니다. 선이도 엮여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갈길도 벽에 붙은 대진표를 보며 숨을 죽였다.

"만약 그가 현재 '가주급', '장문인급' 존재들을 모두 검으로 꺾는다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영웅이 되겠지."

* * *

현타도사 사정후와 무당파의 전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이야기를 만들며, 나는 여러 검사들의 모습을 참고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멋'이 있는 자를 생각해봤다.

-최고의 검에 죽는다, 최고로 멋진 죽음이군.

역시, 검선이다.

'검선, 역시 당신이 옳았소.'

나의 무공은 화산이 아닐지언정, 그가 가진 검에 대한 의념만큼은 나의 것이 되었다.

풍류! 멋! 무와 협!

해보니까 알겠더라. 그래서 나는 천무명의 의기를 당당히 내세우기 위해, 희아연월검에 검선의 마음가짐을 넣었다.

검선 뿐만 아니다.

누구에게도 방심하지 않는다는 의념을 검존으로부터 배웠다.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신념을 검제로부터 배웠다.

오직 내가 최강이며 그 누구도 나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검황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마지막.

나의 검, 희아연월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힘.

-검은 승리를 위한 도구다.

파천신검.

나는 중원 수많은 검사들의 검법의 총아이며, 검술의 수많은 갈래가 하나로 모이는 장강이 되었다.

수십, 수백, 수천의 검법을 하나로.

남들의 것을 멋대로 가져오던 내가, 이제는 나만의 독문무공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천무명을 위한 새로운 검법.

나를 위한 새로운 검법.

그리고 내 자식들을 위해 이어줄 내 '가문'의 검법.

희아연월검.

극의.

"...비천혈검."

사아아.

강기에 붉은 핏빛 기운이 감돈다. 아직 나의 체모는 여전히 역체변용술로 흑발 천무명이지만, 나의 강기는 선홍빛을 띄는 강기가 되었다.

"...검기 정도면 적당하겠는데."

나는 검에서 서서히 기운을 빼냈다. 너무 붉어지면 내 실체를 들키게 되니, 나는 역체변용술이 풀리지 않을 정도까지 힘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을 위해.

아.

팽도황과의 대결은, 이틀 뒤다.

내일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 * *

다음 날.

와아아아ㅡㅡㅡㅡ!!

어제보다 더 거대한 함성이 울려퍼진다. 어제보다 더 많은 관중들이 모여 환호성을 내지른다.

독고연! 독고연! 독고연!

소공녀! 소공녀! 소공녀!

환호성은 둘에게로 집중되었다.

제각기 백도를 상징하는 듯한 하얀 무복의 선녀와 흑도를 상징하는 듯한 검은 무복의 소천마가 중앙에서 서로 포권을 취하며 허리숙여 인사했다.

예선도 아니다. 본선도 아니다.

단지 '육봉쟁패'의 시작을 알리는 가벼운 인사일 뿐일진데, 벌써부터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과연 독고연은 과거의 아픔을 견뎌내고 다시 육봉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과연 태극화 사공희가 없는 마당에 마교 소공녀는 진정으로 천하제일봉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다른 여인들 중에 과연 누가 육봉에 오르고 누가 내려갈 것인가?

"예선전, 시작ㅡ!!"

호각과 함께, 각 비무장을 채운 여인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격을 시도하는 쪽은 지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이들.

그들은 경쟁자를 빠르게 장외로 밀어냈다. 구룡쟁패 못지 않은 시원시원한 경기에 관중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다만.

"...쟤들 뭐하는 거야?"

흰 머리띠를 두른 여자 무사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주변에서 다가오는 걸 견제하고 있었다. 병적으로 순백임을 강조하는 백의무복의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를 돕기 시작했다.

"젠장, 저게 말이 돼?"

"...선루필승도구나. 수가 너무 많아서 모두 나눌래야 나눌 수가 없었던 거지."

선루필승도. 그녀들은 다인조가 하나로 뭉쳐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기 힘들었던 여고수들은 하나 둘 장외로 떠밀리듯 밀렸다.

"저게 무슨 비무야…?"

"우우우…."

"저러고 나중에 서로 같이 붙게되면 항복을 하려나? 젠장, 이런 재미없는-"

아아아악----!!

백의무복 여인들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여인들은 순식간에 장외로, 심지어 비무장 밖 객석으로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자는?!"

"흥."

비무장 한 가운데.

흑발 흑안의 여인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코웃음을 쳤다.

"......약한 것들이."

여인의 이름은 연붕이라고 하더라.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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