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18화 (51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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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육봉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시방, 육봉?"

개방의 거지, 장삼은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은자부터 두둑히 내려놓는 청년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아는 얼굴이다. 복면으로 얼굴은 가리고 있지만,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는 숨길 수 없다. 장삼은 아주 오래전, 이 남자를 본적이 있다.

산동, 제갈선 납치사건 당시.

추색살이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계기 속에서, 개방에서는 추색살을 도운 청년의 초상화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았다. 비록 최근에는 뜸했지만, 지난 몇년간 강호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이가 이자가 아니던가?

"찾고자 하는 정보가 뭐요?"

"육봉에 대한 세평. 육봉말고도 다른 이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

"...누구부터 들어보시겠소?"

장삼은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용봉지회의 개최까지 아직 많이 남았건만, 벌써 하나 나온게 있었다.

꽃도감.

하오문주가 직접 엄선하고 선별한 것으로, 여인들에 대한 온갖 정보와 풍문이 담겨있었다.

"먼저 무림맹주의 딸부터 이야기하지. 이전 이봉결정전에서 우승하고 검희봉이라는 별호를 얻은 여인, 독고연! 그리고-"

장삼은 꽃도감을 통해 육봉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독고연.

모용란.

유설라.

제갈선.

중최미봉.

"다섯 명인데?"

"...크흠. 한 명은 불명예로 인해 육봉의 별호를 반납, 아니 잃게되었소."

"허어?"

청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육봉을 잃다니. 그럼 또다른 이가 육봉이 되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오. 어차피 용봉지회가 당장 눈앞에 있는데 뭐하러 육봉의 자리를 빼앗겠소? 차마 육봉이라고 추켜세우기 힘든 참혹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소이다."

"...산주봉 방철수가?"

장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추며 아래를 가리켰다.

"요즘 남쪽이 심상치 않은 건 알고 있소?"

"물론. 해남혈맹교라고 하던가."

"그렇소. 그들이 관의 물건을 옮기면서 녹림과 대대적인 전면 대결을 펼쳤지. 가공할 무위로 녹림의 무리들을 제압해 관에 넘겼고, 녹림왕 방득패가 몹시 분노했소. 지난 4년 동안...녹림이 좀 피해를 많이 입었거든."

동정십팔채, 궤멸.

녹림황의 유산, 소멸.

그리고 이제는 녹림의 존재 자체가 뿌리가 뽑히게 생겼다. 다름 아닌 해남에서 올라오는 핏및 무리들에 의해.

"그러다가 녹림왕이 저지르고 말았소. 모르고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결과가 대역죄인 걸 어찌하겠는가?"

"대역죄?"

"황가에 들어갈 물건에 손을 댔다고 하더군. 흐흐, 표국으로 위장한 혈교의 무리를 습격했다고 하오. 황실 진상품을 건드렸으니 어디 관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재수 옴붙었군."

관의 물건을 건드렸으니 관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원래부터 산속에 숨어사는 녹림이지만, 혈교의 계략에 의해 더 산에 꽁꽁 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녹림왕의 딸이 하북에 와서 용봉지회에 나온다?

바로 대역죄인의 딸로 연행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리라.

"혈교도 지독하지. 어떻게 황궁의 물건을 위장할 생각을 하고 말이야."

"애초에 남을 습격해서 물건을 강탈하려는 놈들이 잘못 아닌가?"

"그러니까 다들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녹림왕의 딸, 산주봉 방철수의 자리는 사라졌소. 만약 방득패의 자식이 용봉지회에 나온다면...그 의기는 인정해줘야지. 안 그렇소?"

"...목숨을 걸고 육봉의 자리에 도전한다라. 허, 어이가 없군."

"뭐, 본인이 도망칠 의지가 없다면 관에서도 도전을 끝까지 지켜봐주지 않겠소? 아무튼 여기까지가 육봉이고…."

장삼은 꽃도감의 가운데, 다른 종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을 펼쳤다.

"먼저, 마교 소공녀! 그녀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이제는 소천마라고도 불러야 할 여인이 아닌가! 용봉지회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굳이 다시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나올 것이오."

장삼은 귀를 쫑긋 세웠다.

"당당히 도전하여 남들의 앞에서 자신이 최강이라는 걸 입증하려고 들겠지. 마교 소공녀라면...능히 그럴 것이오."

"흐음…."

장삼은 속으로 청년의 말을 기억속에 단단히 박아넣었다.

"그 다음이 태극화 사공희인데…. 이 분에 대해서는 정말 평가가 복잡하오."

"복잡하다니?"

"의혹만 가득하고 실제를 알 수가 없으니. 우리같은 호기심 많은 놈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법이...거든…."

"계속해보시오."

"좋게 생각하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서 관계를 맺었는데, 마침 용봉지회 즈음에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 조심하는 게지. 아이 아버지를 결코 밝힐 수 없는 상황인 건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태극화에 대한 평이 지금 복잡하게 갈린단 말이오. 순정으로 맺은 사랑인지, 그도 아니면…."

청년의 표정이 뭔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장삼은 기묘한 살기를 느껴 주변을 살폈다.

"색마...에게...당…."

설마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자신을 해코지하겠어? 곧 용봉지회에 나갈 사람이?

애초에 해코지를 할 이유도 없다. 사공희에 대해 조금 좋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여 이 청년이 화를 낼 이유가….

"......."

혹시라도, 있다면?

"그...혹시 예전에 태극화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순간. 장삼은 청년이 씩 입꼬리를 들어올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만난 적이 있다라. ...호북에 있을 때, 잠깐 신세를 졌던 적이 있지."

"......!!"

"중원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라...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흠, 알겠소. 알려줘서 고맙소."

"아, 아니. 그건 오히려 내가…."

장삼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청년이 떠난 뒤를 향해 쌍욕을 내뱉었다.

"개씨발, 저 새끼는 뭔데 왜 지 혼자 천하의 미녀를 다 가진 거지…?"

장삼은 바로 개방에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개방은 즉시 호북에 사람을 보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태극화 사공희와 연황, 천무명 사이의 접점을.

그리고 개방에서부터 서서히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만약.

태극화가 아이를 가졌다면.

그 남편은 다른 누구도 아닌…'천무명'이 아닐까하는.

* * *

고민의 끝에 내린 결론.

결국, 천무명이다.

"일단 급하게 위기는 틀어막은 건가."

가장 좋은 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것이지만, 결국 들킬 수밖에 없다. 이는 사공희와 사정후 사이에서 큰 이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태희, 제가 기를 거예요.

-그래, 견희야. 네가 기르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사흘에 한 번, 아니 나흘에 한 번이라도 무당파에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느냐…?

-싫어요. 폐관 끝났다고 한 번 얼굴 비추면 되잖아요. 아이 낳고 최소 1년은 육아에 전념하겠어요.

사공희는 고집을 부렸다.

-태극화는 없는 셈 치세요. 앞으로 저는 태극화가 아니라 태희모(母)니까.

-으, 으아악!! 여보게! 제발 좀 도와주시게! 자네도 태극화의 위상이 어떤지 알잖는가?!

-나도 태희부(父)라서.

배가 불러갈수록, 아이의 고동이 점점 더 커질수록 그녀는 무당파가 아닌 천가장에 있기를 바랐다.

-차라리 무당파에 태희를 안고 가는게 낫지, 태희를 집에 두고 무당파에 다녀오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견희야, 내가 반나절 보고 있을테니 잠깐 정도는 무당파에 얼굴 비추고 오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상공. 상공은 저와 상공이 낳은 태희가 부끄러운 건가요? 아이를 평생 숨기고 살라는 건가요? 상공과 제가 맺은 사랑의 결실을?

사공희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어차피 저한테 그런 음해를 하는 놈들은 전부 인성이 글러먹은 자들이에요. 자기가 부족해서 상공의 간택을 받지 못한 주제에 감히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겨, 견희야?

-저를 욕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상공과 태희를 욕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뭐? 아빠 없는 애? 씨이…. 태희야, 혹시 조금 일찍 나와줄 수 있니? 엄마가 용봉지회 나가서 너랑 네 아빠 욕하는 년들 대가리를….

-알았다, 알았어. 내가 대책을 강구하마. 예쁜 말, 고운 말, 착한 말.

가만히 있다가는 임신천재가 출산천재가 되어 산후조리를 육봉쟁패로 치를 기세가 되어, 나는 결국 사공희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지는 않겠다.

나의 뜻을 존중하여 최선은 '출산 자체'를 숨기는 거지만, 여차하여 드러나더라도 아이의 아버지는 누군지 확실히 하겠다.

그래서, 천무명이다.

중원인들이 사공희가 행여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더라도 그럴듯하게 납득할만한 떡밥을 풀었다.

천무명과 사공희.

선남선녀에 천생연분이다.

유설라나 제갈선처럼 그럴듯한 소문은 대외적으로 없지만, 호북이라는 장소 자체가 접점으로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즉, 태희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났을 때 아이 아버지가 '또 천무명 아니야?'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괜히 색마나 엄한 사람이 상대로 이름이 알려질 바에는, 천무명이라도 남편으로서 알려지는게 더 좋다고 생각해. 오빠도 차라리 그게 낫잖아? 원래 천무명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빠 여자가 될 사람들 다 후리고 다니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어차피 태희는 나중에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이 사람아. 출산을 폐관수련으로 속였다고 손가락질 받겠지만…지금 당장은 출산에 전념해야지. 아이가 태어나고 산후 조리를 하면 그 때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뭐 폐관수련이 실패했어? 화경찍었잖아."

혈소예의 교통정리 덕분에 나와 사공희, 사정후는 간신히 합의점에 도달했다.

"사공희의 남편이 천무명이라는 것을...후우. 복잡하군, 복잡해."

간단히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하다.

산모의 정신건강을 위해 지랄발광을 떨고 있는 셈이다.

즉, 모든 욕은 천무명이 먹는다.

나는 독고연과 애틋한 관계를 맺고 유설라를 아미파의 마수에서 구해놓고, 사공희를 임신시킨 희대의 쓰레기가 된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 오빠. 아직 더 남았잖아?"

그렇다.

아직 많이 남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정말 많은 여인들이.

* * *

하북, 북경에는 용봉지회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조직이 있다. 이들은 무림맹에서 파견나온 이들로, 용봉지회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일한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용봉지회가 열리는 해당 지역의 관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과거 호북성에서 용봉지회가 열릴 때 호북성주가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고, 대부분은 무림맹에서 관에 먼저 찾아가 열성적으로 용봉지회의 성공에 대한 협조를 구한다.

"허어…."

무림맹의 군사, 제갈길은 북경의 대표로 나온 '여인'을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무림의 사람일지라도 눈앞의 이 여인을 두고 어찌 천세를 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림인처럼 포권을 취했다.

"이전처럼 대해주십시오, 군사. 구면이지 않습니까."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기에 그러지요. 이전의 무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용서할 일이 없는데 어찌 용서하겠습니까. 지난 날의 과오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정체와 신분에 성별까지 숨겼던 저의 잘못이지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황녀, '주연홍'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책 하나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용봉지회의 수많은 참가 추정자들에 대한 자료가 세세히 기록되어있었다. 하오문에서 찾은 것보다 더 많은 자료가.

"용봉지회에 참가가능한 나이대의 분들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군사께서 걱정하시는 이들은 제가 따로 붉은 표시를 해두었으니, 참고해주십시오."

"...역시 황녀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과연, 이들이…."

제갈길은 눈을 빛내며 이를 갈았다.

"마교와 결탁한 이들이라는 말이지요…!"

"추정에 불과합니다. 증거는 아직 없으나, 그들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요. 마교라고 해도 몰락한 대공자와 관련이 깊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입니까. 정말...황녀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

"후후, 별말씀을. 아 참. 제가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천무명."

황녀의 말에 제갈길은 바로 표정이 굳었다.

"그 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강요가 아닌...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황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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