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천마신교의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큰 산은 하나뿐.
용봉지회!
지난 번 용봉지회로부터 무려 4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에 나는 정말 많은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그 인연이 이제 한 자리에 모일 차례.
천산 마교, 호북, 하북.
이 세 곳에 퍼져있던 인연들이, 이제 하북으로 모일 차례가 되었다.
용봉지회가 50일가량 남은 이 시점.
나는 천가장에서 대대적인 공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 * *
까앙, 까앙, 까앙!
망치로 철판을 두드린다. 중간에 유격이 일어나지 않게 정확하게 요철을 맞추고 조립한다. 내가 익힌 모든 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나는 철판을 짜맞췄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혈소예는 손에 든 종이 속 물건과 내가 만드는 물건을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거리를 벌려 멀리서 다시 확인했고, 부족한 부분이 없나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정말 괜찮을까?”
“거의 열흘동안 이것만 만들었는데 당연히 괜찮지. 뭣하면 시범을 해보는 건 어때?”
“음….”
“다 완성 되었어요?”
정문에서 식자재를 한아름 든 제갈선이 돌아왔다. 그녀는 다소 피곤해보이는 눈으로 들어왔다가, 내가 만든 물건을 보고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이게 그거군요. 대형 안장.”
“그래. 수마의 몸 위에 씌우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떨어지지 않을 철제 안장이지.”
나는 수마의 등에 씌울 안장을 새롭게 만들었다. 수마에게 조금 가혹한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수마는 오히려 탈 것 취급을 해주는 쪽을 더 반기더라.
수마 왈, 자기는 가축과도 같은 짐승이라 인간의 관점에서 취급하지 말아달라. 그래서 나는 양심의 가책 없이 수마를 마치 천가장의 우마(牛馬)처럼 활용했다.
[히히힝.]
본인도 이제는 그걸 즐기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수마의 등에 철제 안장을 씌웠다.
“어떠냐?”
[안장 아래에 털이 완충제 역할을 해서 아프진 않네. 대신 난기류를 만나면 조금 흔들릴 수 있어.]
“그건 괜찮다. 돌풍은 내가 검풍으로 가르면 되니까.”
“그런데 쓰라고 만들어진 무공이 아닌데….”
혈소예는 헛웃음을 지으며 수마의 위로 뛰어올랐다. 옆에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딱 좋아.”
안장이라고 말은 하지만 상당히 넓어, 사실상 여럿이서 탈 수 있는 마차나 다를 바 없었다.
“9명은 거뜬히 탈 수 있겠는데?”
“9명이라고요? 이상하다. 설계는 13명인데…?”
철제 수마차를 설계한 제갈선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인원수를 줄이더라도 ‘그것’을 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선, 이쪽으로 와봐.”
혈소예는 혈강으로 제갈선이 사온 식자재를 부엌으로 보냈다. 제갈선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올랐고, 안을 보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공자….”
“왜.”
“침대 넣는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
나는 제갈선의 시선을 피했다. 혈소예는 나를 향해 싱글벙글 웃고, 수마는 ‘네가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운데 벽에 침대가 붙어있고, 양옆으로 의자가 쭉? 세상에, 다른 여덟명은 옆에서 보면서 구경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선아, 이건 그러니까….”
“벽에 붙일 게 아니라 정 가운데 놓았어야죠!”
“.......”
나는 침묵했다. 혈소예는 아예 배를 붙잡고 앓았다.
“가에 있는 사람은 멀리서 보느라 제대로 못보잖아요. 이거 나중에 한 소리 들을 수 있어요.”
“하지만 침대가 가운데 있으면 공간 효율이 많이 떨어지지 않겠나?”
“어차피 타고 가는 사람들 다 그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시각적인 효율성과 평등함이에요. 중간에 수마차에서 내릴 것도 아닌데, 안쪽에 앉는다고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안쪽에서 나가려면 침대 경유해서 나가야지. 흐흥, 침대는 오빠 지정석인거 알지?”
[자가당착이로군.]
“.......”
졸지에 나는 침대를 다시 옮겨서 새로 땅에 붙여야했다. 침대의 머리를 날리고 가운데로 옮긴 덕분에, 마치 ‘回’자와도 같은 구조가 되었다.
“끄응….”
“왜 그러세요, 상공?”
“아, 견희야.”
나는 바로 수마차에서 내려 사공희에게 달려갔다.
“나오지 마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상공, 저 나름 화경이에요.”
“화경이고 나발이고.”
“......호들갑인 것 같은데요.”
사공희는 뚱한 얼굴로 나를 흘겼지만, 나는 좀처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임산부란 방 안에서 얌전히 앉아있거나 누워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면 더더욱!
“아직 많이 시간이 남아있어요. 봐요, 아빠가 채근하니까 태희(太姬)도 만나고 싶다고 그러잖아요.”
“끙….”
태희(太熙). 어머니가 태극검후(太極劍侯)이므로, 나는 태명을 태희라고 지었다. 태어나면 태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 되겠지.
사실 현타의 작명이다. 나중에 자라면 무당파의 신진 여고수로 태(극검)희라는 식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술책이 보여 나는 다소 탐탁치 않았지만, 사공희가 마음에 들어해서 태희라고 정했다.
견희의 딸 태희.
팽유월의 딸이 월아인 것처럼, 그녀는 딸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원했다.
“태희야. 아빠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엄마 아프게 하면 안 된다? 너도 들어가서 쉬어. 밥 차려줄테니까.”
“...저 요즘 12시진 내내 방 안에 있는데요. 무공 수련도 못하고.”
“안 돼. 어딜 임산부가 검을 들려고 하느냐. 이기어검도 안 된다. 네가 들 수 있는 건 동화책 뿐이다.”
동화책(童話冊).
뭐냐면, 교훈이 담긴 옛 이야기를 유아에게 좋게 꾸민 책이다. 이야기 내용도 상당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제갈선도 많이 감화되어 가끔 동화책을 읽고는 한다.
“지난 번에 택배로 온 거 다 봤지? 소예야, 혹시 다른 이야기 생각나는 거 없느냐? 선이가 적어주면, 내가 그거 낭독해주마.”
“아주 극성이시네요. 정말. 으휴. 나중에 서너명 동시에 임신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하려는지 몰라.”
“그 때는 이형환위가 실재가 되도록 익혀야지. 손오공이 분신술을 쓰듯. 흐흐. 서로 다른 동화를 읽어줄 수 있겠구나.”
“...태교분신술이라니, 와. 공자, 엄청 변했네요. 예전같았으면 여럿이서….”
나는 바로 제갈선의 입을 막았다.
“선아?”
“.......”
제갈선은 눈으로 나를 욕했다. 제갈선이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 잘 알지만, 그래도 태희가 들을 수 있으니 조금 언어를 정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야, 별호가 운다. 별호가. 누가 비천세액마를 쓰러뜨리나 싶더니, 태희가 쓰러뜨리는 구나.”
“후후후….”
사공희는 배를 쓰다듬으며 정겹게 웃었다. 나는 제갈선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누른뒤, 사공희의 배에 조심스레 다가가 손으로 쓰다듬었다.
“방금 건 그냥 엄마들이 우스갯소리로 한 거다. 알겠지?”
“네, 알았어요. 아빠.”
사공희는 마치 태희가 이야기를 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근.
“!!”
나는 안에서 느껴지는 고동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사공희도 놀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바, 방금…!!”
“각법의 달인이 되려나?”
“보법은 제가 가르쳐주면 되겠네요.”
“태희는 하고 싶은 거 하게 할 거다!”
나는 무공부터 가르치려고 드는 두 여인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괜히 무공을 배웠다가 협행을 나서겠다고 나가면 어떡해? 호신술 정도로만 배우게 할 거니까, 그리 알아라!”
“오빠, 지금 성인되기 전에 화경은 찍어주려고 생각하던 거 아니었어?”
“강호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 그건….”
“상공, 너무 걱정하지 마요.”
사공희는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진정되는 느낌에 나는 흥분이 가라앉았다.
“태희는 잘 자랄 거예요. 분명 상공을 닮아서 착하고 예쁜 아이로 태어나겠죠.”
“......착한 건 너를 닮아서 그런 것 같은데.”
“우와, 누구 부러워서 질투심에 미칠 것 같아.”
“걱정마요, 소예. 알잖아요? 용봉지회...끝나면….”
움찔.
나는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과 금빛 눈에 오한이 들었다. 분명 내가 생사경이고 자연경인데, 내가 천하제일인데, 나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육식동물의 눈에 띈 초식동물처럼 몸에 오한이 들었다.
“상공.”
사공희는 내 몸을 일으켜, 이전보다 더 커진 가슴으로 나를 품었다.
“...동생들 여럿이면 더 좋겠죠?”
아.
진정한 포식자는 따로 있었다.
* * *
결국 사공희를 위해 마차를 벽에 붙이려던 나의 계획은 제갈선에 의해 가운데 배치를 하는 것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도 머리 부분을 벽에 붙이는게 더 좋지 않을까싶었지만, 침대에 누워서 갈 사공희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라할 수 있으랴.
대신 나는 침대 안에 들어갈 솜을 최고급으로 구했다. 의자에 들어갈 방석도 마찬가지지만, 침대 내부는 그 어떤 흔들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푹신하게 누워 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전체를 침대처럼 만들지 그러시오. 다 누워 갈 수 있게.”
현타는 내게 대놓고 빈정거렸다. 이제는 어엿한 무당파의 장문인이 되어서 그런지, 그는 나를 향해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 것을 좀처럼 자제하지 않았다.
“역시 현타다. 좋은 생각이로군. 침대는 넓은게 좋지.”
“...나 참. 농담도 못하겠소.”
“농담? 내가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요즘 그쪽도 재미보느라 한창일텐데?”
“크흠.”
현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기르던 수염도 정갈하게 정돈되었고, 산발처럼 지내던 머리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틈 하나 지적할 것 없이 단정했다.
과연 이게 장문인이라서 그런 걸까? 맞다. 장문인이 추레한 몰골로 남들의 앞에서 나설 수는 없는 노릇.
단지 현타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장로가 그의 사매, 즉 아주 오래전부터 현타를 지켜봐온 여자라는 것만 특이할 뿐이다.
“침대가 중요하지, 암.”
“...끙, 신성한 무당파 장문인실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맙시다. 이번에 그대가 태극화를 불참시킨 것 때문에 무당파 내부에서도 여전히 불만이 많으니.”
“불만? 무슨 불만?”
“응당 가져와야할 백도제일이라는 칭호를 고스란히 헌납하게 되었으니, 제자들이 가진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소이다.”
“하!”
어처구니가 없다.
“견희 덕분에 4년동안 백도제일의 문파 칭호를 달고 살았으면 이제는 본인들이 나서서 칭호를 쟁취할 것이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쉬운게 아니지 않소? 때로는 진정으로 강한 자의 힘에 편승하고 싶은 법. 그러니 내 부탁 좀 합시다.”
“부탁?”
“무당파 제일의 기재, 사공희의 제자, 아붕이 아직 남아있지 않소.”
“아붕 죽었다.”
나는 현타도사의 제안을 칼같이 잘랐다.
“아니, 왜 그러시오? 정말 천무명으로 출전하려고 하는 것이오?”
“아니. 이 상태로.”
“......또 뭐가 바뀐 것이오?”
“흐흐, 바뀐게 아니라. 이런 거지.”
나는 품에서 인피면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걸 내 얼굴 위에 올렸다.
“본 모습을 보이려고?”
“머리칼까지는 억제를 해야지. 몸이야...뭐 이제는 얼추 비슷해졌으니 옷만 조금 여유롭게 입으면 되는 거고. 천무명으로서 우승한 다음, 인피면구를 벗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거지. 이 사내다운 얼굴이 천하제일이 되었을 때 모두가 환호하겠는가, 아니면 이 원래 얼굴이 천하제일이 되었을 때 모두가 환호하겠는가?”
“무슨 의도인지 알겠군. 많은 호협들이 ‘형님!’하고 인정할만한 얼굴로 출전하겠다? 그런데 어느쪽도 여인들이 좋아할 상이라 딱히 의미는 없을 것 같소. 자고로 호협스러운 얼굴이라 함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 양반이. 태극혜검 덕분에 화경찍고 여인도 생기니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구만!”
“원래 무림인은 무공 강하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면 성공한 인생인 법이오. 거기에 별호와 어엿한 직급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지.”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기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현타도사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나는 이미 혈교의 두려움을 보았소. 그대가 보내준 것들...아주 무시무시하더군. 혈교의 방식, 피가 마치 하얀 천을 물들이듯 중원에 스며들고 있소. 당장 그대가 보내준 동화책만 하더라도 그렇지. ...시동들이 그렇게 좋아하더군.”
“그래서 조금이라도 무당의 명예를 유지하고, 후대에 널리 알리고 싶다?”
“그렇소. 그러니 내 ‘진짜’ 부탁을 하겠소이다.”
현타도사는 내게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당의 역사를, 무당의 기억을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주게 해주시겠소?”
“어떻게?”
“방법은 무엇이든 좋소. 무당의 무공이 실전되지 않도록, 무당이라는 이름이 소멸되지 않도록, 후세의 사람들이 구파일방을 떠올릴 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무당파를 떠올리도록.”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나는 빈 책을 꺼내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만큼 전하기 쉬운게 또 없지. 서책은 불탈 수 있을지 몰라도...이야기는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테니.”
“......!!”
“당연히 제목은 무당제일검이 되어야 하오! 이런 건 무(武)와 협(俠)이 아니야!!”
“아니, 그거 너무 옛날 방식이라니까? 요즘은 무당파 막내 제자, 이런 식으로 해야잘 먹힌다니까? 당장 서명해! 서명하라고!!"
"갈!!!"
아직, 혈교의 사상은 중원에 적응하기란 참 쉽지 않은 듯 했다.
[작품후기]
※ 비천색마에서 TS는 없습니다.
TS된 여자를 취하는 경우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