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15화 (51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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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친부나 친모에 대해서 딱히 고민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무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런 건 전생에 신물이 날 정도로 했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원망, 증오, 애증.

그 모든 것을 전생에 울부짖었기에 나는 더이상 부모에 대한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솔직히, 감정이 무뎌졌다.

가족이라는 걸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나에게, 부모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내 나름의 가정을 꾸리고, 내 가족들을 사랑하며 새로운 삶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

나는 천마가 안내해준 묘비 앞에 절을 올렸다. 그래도 낳아준 부모를 위해 인사는 한 번 해야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몰라.'

과연 검마가 내 아버지였는지는 진실로 불분명하다. 꽃뱀이었던 여자가 남궁세가의 호위무사로 위장한 인연을 맺은 것을 넘어, 다른 남자를 몰래 침대에 끌어들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만약 검마라는 자가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맞다면.

그가 평생동안 나라는 자식을 모른 채 죽었다면.

적어도 말해주고 싶다.

"피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가족의 중요함을 알게 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잘생기고 재능있는 몸으로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적어도 남궁의 피보다는 당신의 피가...더 제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으니."

아무에게나 피를 뿌리지 않도록 다짐할 수 있게해주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그리고.

"행복하게...."

뒷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었다.

잘, 살 것이다.

앞으로 나는 떵떵거리며 잘 살아나갈 것이기 때문에.

* * *

색마는 떠났다. 천마의 예상과 달리, 그는 너무나도 담담한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동요하지 않는군."

"완성되었으니."

천마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혈교주로부터 술병을 건네받았다. 둘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기보다는 각자 자기 병을 들고 마시는 편이었다.

"웃기지 않나. 너나 내가, 그리고 고자놈이 닿고자 했던 곳을 저런 녀석이 먼저 닿았다니."

"웃기지. 하지만 동시에 이해는 한다. 역시 피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천마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호부 아래에 견자는 없는 법. 비록 여자 보는 눈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식은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한 것 같군."

"그래. 그래야지. 누구처럼 되지 않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지 않나."

"그건 내게 하는 말인가?"

"너랑 나."

혈교주는 술병을 비웠다.

"...다음에 만날 날이 있을 지 모르겠군. 안녕이다. 천마."

"어디로 가려고?"

"중원으로. 무림을 박살낼 첫 물길을 터놨으니, 이제 남은 건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려야지."

혈교주는 등을 돌렸다. 천마는 그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멈춰라. 너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뭘."

"네가 바라는 건...수십 만을 제물로 바쳐 그녀를 부르는게 아니었던가?"

"그랬지. 시산혈해로 수많은 이들을 제물로 바쳐, 월교가 그랬던 것처럼 월녀를 부르려고 했지. 그런데...."

혈교주는 쓰게 웃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색마가 마교의 소천마와 함께 다정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생각이 들더라고. 걔가 바라는게 뭘까. 나와 다시 만나기보다는...자식의 행복을 바라는게 부모 마음이 아닐까."

"......."

"복수는 계속 할 거다. 무림은 망해야해. 하지만...그 방법을 달리할 뿐. 옛 정을 생각해서 이 말만 해주지."

혈교주는 뒤로 중지를 들어올리며 사라졌다.

"먼 미래, 신강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게 될 거다. 후손들을 위해서라면 거길 떠나는게 좋아."

"......미친놈."

천마는 술을 마시며 혈교주를 배웅했다. 혈교주가 하는 것과 똑같이 자세를 취하며.

* * *

저벅, 저벅.

어두운 밤.

대공자 혼자만이 남아있는 방 안에는 정말 대공자 이외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자를 따르는 신십마녀? 그들은 모두 대공자를 버렸다.

대공자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친 이들도 있었고, 처음부터 대공자가 유폐된 별궁에 들어오지 않은 자도 있었다.

"......."

"술에 많이 취하셨습니다."

오직 단 한 명.

뢰마만이 대공자의 방을 정리하며 대공자를 보좌할 뿐이었다. 대공자는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손에 쥔 술병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술병은 깨졌다. 뢰마의 이마가 찢어지고, 술과 함께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뢰마는 묵묵히 허리를 숙이며 깨진 술병을 정리했다.

"뢰마."

"예, 대공자."

"너도 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린뢰마니까요. 어머님께 부탁을 받은 이상...저는 두분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

대공자는 다시 술병을 움켜쥐었다. 뢰마는 방 안을 정리하며 허리를 숙였다.

"병을 치우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

뢰마는 방을 떠났다. 대공자는 홀로 술을 연거푸 들이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천마가 되기 위한 긴 여정은 몸을 팔아서 남자 하나를 끌어들인 이시아에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욕할 수 있을까.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짓을 저질러 온 것을.

죽이지 않고 부랄을 터뜨린 것으로 용서하는 것이라면, 대공자는 이시아의 용서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

용서는 용서고, 복수는 또다른 이야기.

"...크큭."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비록 적은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지만, 결국 마교는 힘의 논리를 따르는 곳.

대공자가 다시금 최강이 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다.

"마화."

대공자는 몸을 돌렸다. 방 안, 그림자 속에서 반쯤 모습을 가린 마화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공자. 보는 눈이 있어…늦었습니다."

"아니다. 그 때의 계획...지금 쓰기로 하지."

"계획이라고 하시면?"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대공자는 살기어린 눈으로 씩 웃었다.

"비록 지금 당장 복수를 할 수 없다면...아주 오랫동안 복수의 칼을 갈면 되는 것이다. 그래. 놈을 죽일 수 없다면, 오랜 시간 동안 바짝 엎드려서 놈의 자식을, 후손을 죽일 것이다."

"대공자."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가져와라, 그것을!"

"대공자. 그건…."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대공자는 이를 갈며 손을 뻗었다.

"나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인륜따위는 이미 져버린 지 오래! 나는 이미 잃을 것도 없다!"

"...자기자신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 걱정마라. 설령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고 해도…."

대공자는 마화가 건네는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기운을 잔뜩 머금은 이형의 복숭아가 들려있었다.

"나는, 복수하겠다."

으적, 으적, 으적.

대공자는 복숭아를 씹었다. 씨까지 전부 삼켜버린 대공자를 보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응."

풀썩.

대공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잃을 것이 없다라...."

마화는 대공자를 한손으로 들어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처녀는요?"

대공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었고, 마화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혈교주에 의해 터진 손은 어느새 복구되어 마치 짐승의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패배자에게는 관심이 없지만...그래도 재미있겠는걸. 후후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우둑, 우두둑.

마화는 골격이 뒤틀리기 시작하는 대공자를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처녀인 선녀. 장해요. 위주지. 당신이 이 강호를, 중원을 멸망시킬 혈겁의 주인이 되는 거에요."

우둑, 우두둑.

"대공자….아니, 대공녀. 미안해요. 원래 여우는 뒤통수치기 전문이라서. 그래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펄럭.

"대가로, 당신의 처녀혈만 조금 받아갈게요. 남자든 여자든 선녀가 된 여자면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후후. 원래는 무림맹주의 선녀혈을 받아가려고 했는데...."

마화의 뒤로 붉은 강기가 꼬리처럼 펼쳐졌다.

"이번 시대에서 혈겁을 일으키기는 다소 어려우니…기다리도록 하죠. 어떻게 할까, 후후. 그래, 그 방법이 좋겠다."

마화는 점점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위주지를 꼬리로 휘감았다. 그리고는 동쪽을 바라보며 샐쭉 눈웃음을 지었다.

"수십, 수백 년 뒤에, 중원을 멸망시키는 거예요. 그것도...복수는 복수잖아. 그쵸? 제가 당신을 위해 아주 특별한 무공을 전수해줄게요. 저는 선계로 돌아가고...당신은 혈겁의 업(業)을 이어받는 거죠. 그래요. 나의...."

마화는 위주지를 붙잡고 하늘을 날았다.

"요화보전(妖花寶典)을."

위주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아침이 되었다.

"...위주지가 실종?"

"네. 뢰마가 보살피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사라졌다고…."

"흠…."

대공자가 실종되었다. 뢰마의 감시망에서 빠져나갔다면 보통 의지로 도망친게 아닐 것이다.

작정하고 도망쳤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도와준 사람이 있을 터.

짐작가는 자가 하나 있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이미 모든 변수는 차단했다. 마교에 천마가 있는 이상 그 어떤 변수도 없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어떤 변수가 튀어나오더라도 나는 대처할 자신이 있다.

'설마 나보다 오래 살겠어.'

천마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오래 살 거다. 아주 아주 오래.

60년은 거뜬할 것이고, 100년은 훌쩍 넘을 것이고, 자연의 경지에 이른 이상 어쩌면 200년...까지는 무리일지 몰라도 죽을 때까지 오래 살 것이다.

설마 대공자가 나보다 오래 살려고? 만약 그렇다면 그 때는 그의 집념을 인정할 것이다. 이미 나의 가족들은 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나만 홀로 남아 하늘로 오르게 되겠지만.

내 후손들을 노린다고 한다면, 내 후손들이 대공자 따위에게 당하지 않도록 믿고 힘을 남기는 수밖에.

'절대로 그 전에는 안 죽지.'

자식을 품에 묻는 아픔이 어느정도가 될 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아내들을 보내는 아픔이 얼마나 클 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여인들이 나를 잃는 슬픔을 겪게 할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이 네 쌍의 눈을 두고, 강호 무림 곳곳에 퍼진 내 여인들을 두고 어찌 떠날 수 있으랴.

그저 지금 당장 걱정되는 것이 하나있다면,

'언제 다시 오지.'

내가 천산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

'천가장으로 돌아가야하는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천산이 아니라 그곳이며, 지금 여기에서 계속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당장이라도 호북에 달려가야하지만, 내공을 다소 소모한지라 천산에서 호북까지 가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채양보음으로 내공을 흡수한다고해도, 허리를 놀리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아참. 아버지가 그랬어. 천산까지 달려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 이걸 쓰라고."

"이거?"

이시아는 내게 작은 패를 건넸다. 철을 얇게 펼쳐놓은 물건은 가운데 엄지로 꾹 누르는 부분이 있었다.

파지직.

내가 가운데를 누르자마자 바로 물체가 나의 내공을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삐빅.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이 괴상망측한 도구에 오한이 들었다.

"딱히 위험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가...?"

"아, 밖에."

똑똑.

창밖에서 무언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창문을 열었고, 하마터면 선물받은 물건을 집어던질 뻔 했다.

"...뭐야?"

[자가용.]

"........"

수마, 궁기의 등 위에는 나무로 된 수레가 묶여있었다. 만약 이것이 말이 끌고간다고 하면 마차라고 하면 되겠지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천마께서 말씀하시길, 못해도 15일에 한 번은 천산에 들렸다가라고 하셨어. 여기서 하북, 호북을 다니면...각각 못해도 한나절 안에는 이동할 수 있을걸?]

"......."

천세.

나는 천마로부터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다.

* * *

그 시각, 하남성 무림맹.

"...혈맹이라."

독고자영은 중원 남부에서 올라오는 정보에 한숨을 내쉬었다.

혈맹. 그들은 압도적인 자금력과 관과의 결탁을 바탕으로 '녹림'을 때려부수고 있었다. 무림맹이 해야할 일을 혈맹, 혈교가 하고 있으니 어찌 저지할 수 있겠는가?

"이대로 가면 너무 세력이 커질텐데...끙, 뭔가 바꿀 방법이...."

사락.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쌓아둔 죽간 사이에 흘러나온 특이한 죽간을 발견했다. 죽간은 다른 것보다 좀 더 고풍스러워보이는, 신선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호오!"

독고자영은 몸을 일으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들이 용봉지회에 온다니...! 아아, 드디어 구파일방이 모두 모이게 되겠구나!"

용봉지회.

곤륜, 내방 예정.

[작품후기]

아래는 대공자 관련 스포

별 건 없구요, 언젠가 후속작을 쓰게 될 때의 떡밥일 뿐입니다.

주지는 이번 일로 완전 아웃. 앞으로 등장은 없습니다.

언젠가 후속작으로 무협을 쓰게 된다면 기억을 잃은 여고수가 강호의 여러 청년 공자들에게 다양한 사랑(笑)을 받는 소설이 되지 않을까요? 남궁세가 소공자와 소천마에게 앞뒤로 당하게 되는 선녀같은 여고수...!

제갈선의 망상 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군요.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비천색마는 안전합니다!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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