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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선녀 독고연
하룻밤이 지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하북팽가의 체질개선을 위해 팽도황과 이런 저런 논의를 나눴고, 팽유월과 독고연을 위시한 팽가의 여인들과도 침대에서 논의를 나눴다.
결론은 하나.
"줄타기를 합시다."
"그러세."
기존 정사마, 구파일방과 팔대세가가 득세하는 전통적인 무림의 체계와 혈교가 구상하는 무림의 궤멸 사이에서 하북팽가는 팔대세가의 일원으로서 신중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혈교가 이끄는 흐름은 막을 수 없어."
"예. 아무리 황제라도 거대한 자본을 가진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관과 결탁하여 관의 노예처럼 행동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인간은 소유에 대한 욕구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과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비교하고 시기하기 마련이다.
-가슴이 없는 사람이 가슴이 큰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지가 작은 사람이 자지가 큰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심리 깊은 곳에는 질투가 있답니다.
독고연조차 타인을 질투한다. 혈교주의 말처럼 인간은 어떤 분야든 쉬이 질투하기 마련이다. 이는 특히 돈, '자본'에 관련되어 있을수록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자네가 처음 혈교의 준동을 말했을 때, 나는 여전히 틀에 박힌 사고로 생각했다네.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무림을 몰락시키는 방법. 그래, 혈겁(血劫)이지."
간단히 말해, 학살이다. 모든 무림인들을 살해하여 죽이고, 무림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그게 미래에서 혈교가 자행했던 무림 궤멸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틀렸어. 반드시 혈겁만이 정답은 아니었어. 가장 단순무식한 방법이 혈겁이고,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문을 망가뜨릴 수 있지. 그래, 나를 중독시키고 가세를 기울이게 한 마교 대공자의 계략처럼."
팽도황을 이를 갈며 사납게 웃었다.
"나는 팽가의 다른 이들이 본가를 버리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약값을 투자했지만, 그걸 전부 잃어버리게 되니 다들 도망갔지. 그리고 유월이가 가져온, 자네가 넘겨준 지참금이 생기니 다들 얼굴을 싹 바꾸고 나타나더군. 고작 금쪼가리 때문에 몰락했던 팽가가, 금덩어리 덕분에 다시 살아났지. 나는 그래서 '자금'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느꼈네."
팽도황은 한탄했다. 한 때 강호를 주유하며 협객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그는 가주로서 가문을 운영하며 너무나 큰 자본의 쓴맛을 보았다.
"무림세가가 힘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네. 돈이었지. 강력한 무공을 익혀서 힘으로, 폭력으로 주변을 굴복시켜 자본을 불려나가는 방식이 무림의 생리였다네. 의협(義俠)은 낭만이고, 현실은 잔혹하다는 걸 나는 죽어가는 와중에 깨달았다네."
팽도황 또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팽이왕에서 팽도황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개명한 것은 의협 팽이왕이 아닌, 진정항 팽가 가주로서의 변모를 의미하기도 했다.
"팽가는, 다시 태어날 것이야. 무가로서의 근본은 유지할테지만, 새롭게 변화하게 될 무림에 적응해야해. 다만, 지금은 아니야. 낭중지추(囊中之錐)가 되어야지, 촉석봉정(矗石逢釘) 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죠."
"그래. 그러니 물밑에서 천천히 준비할 것이야. 물론 눈치 빠른 자들은 다들 알아채겠지. 보통 이럴 때는 먼저 출발하면 눈총을 받기 마련이지만...."
"함께 출발하여, 노력하여 선두로 치고 나간다면."
"종극에는 하북팽가는 무가였던 곳으로 기억되더라도, 무림에서의 팔대세가처럼 그 위세를 이어나갈 것이다."
팽도황은 무림세가로서의 하북팽가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과 후손들을-혈육을 위해 팽가를 바꾸어나갈 것이다.
"가문 내부의 반발이 많을 겁니다. 갑자기 표행을 나서라고 하고, 요인을 경호하라고 하면. 무공을 자신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니."
"익숙해져야지. 불만이 있으면 설득해야지. 강호는 장강과도 같은 곳이야. 장강의 물이 바뀐다면, 바뀐 물에 적응하는 물고기만이 살아남는 게지."
어째서일까. 나와 동년배로 보일 정도로 충분히 젊은 팽도황의 눈가에 세월의 주름이 스쳐지나가듯 보였다.
"...그래서 결정했네."
팽도황은 내 앞에 세 개의 책을 꺼냈다. 내가 하북팽가의 체질개선을 위해 제시한 수많은 안건 중, 팽도황은 세 가지 방안을 채택했다.
보안업.
경호업.
팽가가 무가 필요없어진 세상에서도 무(武)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길. 혈교가 꿈꾸는 '무림이 궤멸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팽가가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힘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길.
그리고 팽도황이 선택한 세번째 길은....
"아니, 장인어른. 이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왜?"
"아니, 그...."
팽가, 하면 호쾌함이 생각난다. 다른 말로는 단순무식하다.
"우리는 나라의 장군 좀 하면 안 되나? 응?"
그런 자들이 일국의 상장군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무림세가에서 방계의 사람들을 분가(分家)하여 관과 결탁한다? 그리하여 본가는 무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분가는 무신(武臣)의 가문으로서 이름을 알린다?
괜찮기는 하다. 하지만 팽가는 뭔가-
"단순무식해서 장군감은 아니라 이거지?"
"......."
"크하하! 정곡이로군. 괜찮네. 내가 설마 그걸 생각못했을까봐?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녹봉을 받으면서 일할 성정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팽도황은 나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자네의 피가 섞인 이들이라면 어떻겠는가? 자네의 명석한 두뇌와 팔방미인의 재능에 우리 팽가의 호협스러움이 더해진다면, 천하를 호령할 대장군-아니 역사에 이름이 남을 용장이 될 것이야. 팽씨 성을 가진 장군을 말할 때, 팽월이 아닌 자네의 후예가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거지. 무림의 천하제일인 비천...혈마와 팽유월의 후예, 팽천!"
"......."
할만한가?
* * *
"...라고 하더구나."
팽도황이 월아를 잠시 맡아 준 사이, 나는 이 일을 모처럼 모인 팽가의 모든 여인들에게 알렸다.
"하아."
팽유월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고, 독고연은 누군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고 있었다.
"제,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두려움에 머리까지 붉게 물든 상태가 된 팽신혜-혈신혜는 독고연의 투기에 벌벌 떨며 손사레를 쳤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
"그렇죠. 모르는 일일 수도 있죠. 팽가 가주님의 꿍꿍이가 제 눈에는 보이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 방계의 자식들이 분가해서 관에 힘을 쓰는게 왜 꿍꿍이가 되는 거죠...?"
"당신."
독고연은 혈신혜를 상대로 맹공을 펼쳤다. 혈신혜는 학혈마녀라는 미래의 이명답지 않게 독고연의 기세에 벌벌 떨었다.
"팽도황 어르신께서 설마 월아를 방계로 돌리지는 않겠죠. 양녀라고 하지만 사실상 유월 언니가 팽가 소가주를 맡고 있는 지금, 유월 언니와 가가의 적자인 월아가 가주 자리를 잇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돼요."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팽유월이 천가장에서 기거하지 않는 것도 월아에게 미래의 가주로서, 팽가에서의 삶을 직접 경험으로 느껴보게 하려는 양육 계획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방계의 사람을 무관으로 보낸다? 그 핏줄에 가가의 혈육이 섞인다? 답은 하나죠. 팽도황 어르신은...친딸인 당신을 방계로 보내려고 하는 거에요. 가가의 아이를 가진 채로."
"으, 으으...."
독고연은 팽도황의 수를 단번에 알아챘다.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혈신혜가 큰 죄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팽도황으로서는 딸을 시집도 못간 채 평생 팽유월의 수발만 들고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뭐,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다."
"힉...!"
내 말에 혈신혜는 더욱 기겁하며 독고연을 경계했다.
"...야, 너 소예 덕분에 현경 초반 고수급은 되거든? 그런데 연이한테 그렇게 겁먹으면 되냐?"
"이, 이건 무공 수위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가가, 일단 저 비무 좀 하고와도 될까요?"
"진정해라. 연아. 당장 임신시키겠다는 것도 아니니."
나는 독고연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살짝 토라진 독고연은 내 품에서 뭔가를 궁시렁거렸지만,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독고연을 진정시켰다.
"설령 하더라도 너부터 하는게 맞지. 안 그렇니."
"...네, 그렇죠. 죄송해요."
"......흠."
뒤에서 가만히 있던 팽유월이 한손을 얼굴에 붙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고연이 바짝 얼어붙었다.
"질투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상공에게 안기다니.... 역시."
"아, 아니, 이건 그런게 아니라, 그...."
"이대로 가만히 놔뒀으면 사랑을 속삭이면서 눈앞에서 입까지 맞췄겠죠?"
"......언니, 혹시 무슨 독심술 써요?"
"훗."
팽유월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팽유월의 여유로운 목소리에서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팽유월이 어떻게 알고 있는가?
경험이다. 그녀는 독고연이 했던 행위들을 이미 모두 나를 상대로 써먹었다. 천가장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독고연보다, 아무래도 열흘에 한 번 정도 보는 팽유월이 부리는 투기가 더 애틋하기는 했다.
독고연이 아기 여우에서 이제 요조숙녀가 된다고 한다면, 팽유월은 이미 나를 통해 온갖 상황을 다 겪은 구미호나 마찬가지.
그녀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뭐, 결국 상공의 선택이니까.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처첩나누더라도 뭐 상공이 아이들 차별하실 분도 아니고."
"흑...!"
팽신혜를 감싸는 포용력을 보이는 동시에 나를 향한 신뢰를 보인다. 이렇게 되면 왠지 독고연이 속 좁은 여인처럼 보이게 되지 않은가.
'이게 비무지.'
남정네들 칼부림 하는 것도 피가 튄다면, 여인네들이 기싸움 하는 건 피가 말린다.
"...그래도 그렇단 말이에요. 자꾸 예쁜 분들이 늘어나면 걱정되고...."
혈신혜를 띄워주고 생각하면서 자기도 예쁘다고 하는 독고연.
"괘, 괜찮아요! 아이에게는...제가 최대한 잘 말할게요. 분명 히해줄 거예요. 제 아이니까...."
기죽은 듯 눈치를 보면서도 일단 아이를 낳는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깔고 이야기를 하는 혈신혜.
"상공."
"응."
"...저 아이 낳고 산후조리 하면, 그 뒤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팽유월.
"당연하지."
나는 팽가에 있는 여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리고 그 소식은 금방 내게로 날아들었다.
* * *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잠시 팽유월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진짜 괜찮겠나?"
"당연하죠. 또 걱정하신다. 첫째도 그랬는데 둘째라고 다르겠어요? 상공은 상공이 있어야할 곳에 계시면 돼요."
팽유월은 내 등을 떠밀었다.
"저는 한 번 낳아봐서 알지만, 견희는 처음이잖아요. 견희의 곁에 있어주세요. 그러다가...용봉지회 한 달 전에는 이곳으로 오면 되잖아요. 이건...제가 욕심 부려도 되는 거죠?"
"물론이지."
팽유월을 함께 데리고 가거나 내가 팽가에 체류하는 시간을 오래 하거나.
월아를 낳을 때 옆에서 함께 태교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하자는 나의 생각은 팽유월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보다 처음 아이를 낳는 사공희의 곁에 있어달라고 했다.
"유월아...."
"저는, 정말 괜찮답니다."
그게, 그녀의 본심이라서 더 놀라웠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공희를 배려하고 신경쓰고 있었다.
"약속하마. 조만간 다시 팽가로 와서 너를 안아주마. 뒤로는 하지 않아도, 네 몸과 아이에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줄 수 있게 노력하마."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소예랑 연동되어있거든요."
"......?"
팽유월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제가 느끼는 쾌감의 1할을 소예가 느끼는 만큼, 저는 소예가 느끼는 쾌감의 1할을 받기로 했어요. 그...염마처럼 갑작스러운게 아니라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너는…."
"견희도 있고, 와백봉도 있고, 다른 여인들도 있겠지만...소예 조금만 더 신경써주세요. 미안하니까."
"미안해? 네가 왜?"
"상공의 첫 아이를 받아서?"
"......."
아아, 소예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나는 팽유월과 이마를 맞대며 인사했다.
"...금방 다녀오마."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교, 위험하니까."
"그래."
내가 호출된 곳은 마교, 신강.
천마의 후계를 결정하기 위해 그들이 모인다.
마교 십마.
나는 무마이자 색마로서 참가할 것이다.
비천색마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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