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98화 (498/568)

--------------------

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혈교의 무리가 남쪽에서부터 치고올라오고, 피해 신고와 거짓 신고가 혼재되어 추색살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용봉지회가 이제 고작 몇 개월 남지 않은 하북은 그런 분위기에서 상당히 자유로웠다.

"꺄아악, 저 자가…!"

"실례합니다. 저희는 무림맹에서 나왔습니다. 저 분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잘생겼어요."

"...잠시 동행해주십시오."

사실 몹시 경직되어있었다. 무림맹은 4년마다 한 번 있는 용봉지회를 허투루 끝내고 싶지 않았고, 추색살이 아닌 많은 이들을 투입하여 하북을 안정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색'으로 인한 문제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무림맹 무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하북 곳곳을 돌아다녔다.

맹의 무사들이 무림인들의 시시비비를 전부 해결하고 다니니 관도 덩달아 순찰을 강화하고 나섰다.

천하의 빙색마인이 살아서 나타나도 뚫지 못할 정도의 경계!

그중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은 바로 팔대세가 중 한 곳이자 이제는 팔대세가 중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날아오른 그곳, 하북팽가였다.

"미안하다, 유월아. 너까지 이렇게 일을 하게 만들어서."

"아니에요, 아버님. 가만히 앉아있는 것 보다 이거라도 하는게 좋은 걸요."

팽유월은 가주의 집무실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서 수많은 서류들을 처리했다.

이제는 세가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줘도 좋으련만, 팽도황도 팽유월도 다른 이들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특히 본가에서 벗어나 따로 분가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일손은 언제나 모자랐다. 더군다나 용봉지회가 다가오며 더욱 바빠지기까지 시작했으니, 가문에서 처리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독고 소저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잖아요."

"아…."

팽유월의 옆자리에 앉은 백발의 여인, 독고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서류의 산에 얼굴을 묻었다.

팽가의 일에 독고세가의 여식이 관여한다?

월권이 아닐까 싶었지만, 독고연의 능력을 본 둘은 독고연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독고 소저가 정말 천군만마예요."

"저, 저는 그냥…."

팽유월과 팽도황 둘을 합친 속도보다 독고연은 더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필히 차후 어떤 맹을 이끌어간다고 하면, 독고 소저가 으뜸이 되겠죠?"

"당연하지. 하하, 최소의 여성 맹주라. ...독고 소저라면 능히 가능하겠군."

"그, 금칠하시면 곤란해요.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한 여인인 걸요…."

독고연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도 많았고, 여러모로 미숙한 점이 많았다.

"......."

하지만 머리는, 몸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오래전에 경험했던 것이 새록새록 떠오르듯, 독고연은 자연스럽게 서류들을 처리했다.

어쩌면 자신은 검보다 붓을 잡는 게 더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불과 2각이 채 지나기도전에, 독고연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서류를 처리했다.

오죽하면 팽가에서 결정을 내려야하는 중요 사안 때문에 둘이 독고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오늘은 그만하지."

"네, 더는 못하겠어요."

팽도황도 팽유월도 손을 놓아버렸다. 아직 일이 남아있지만 이미 정신적 기력이 다해버렸고, 독고연은 언제나처럼 팽유월을 옆에서 부축했다.

"언니, 조심하세요."

"연.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끼이익.

문이 열렸다. 집무실 문을 예고도 없이 열어젖힌 존재의 등장에 세 명의 주변에 긴장감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느 신혜냐."

팽도황은 착잡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온 여인, 자신의 딸에게 확인차 물어야했다. 월아를 품에 안은 팽신혜의 머리는 핏빛처럼 붉었다.

"혈신혜이옵니다, 아버님."

"...그래. 무슨 일이냐."

팽도황은 몹시 착잡했다. 망나니같았던 딸이 정숙하고 착실한 여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핏빛 머리칼은 그녀의 원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속죄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죄는-

"진가장의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잠깐, 진가장? 진가장이라고?"

"...예?"

팽도황과 팽유월은 동시에 당황했다. 특히 팽유월의 동요가 가장 심했다.

"지금 안쪽 장원에 계십니다. 도착은 한 시진 전에 했는데...월아와 놀아주시느라."

쿵!

팽유월은 바로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독고연은 팽유월의 발걸음에 맞춰 그녀를 부축했다.

"패, 팽 소저…! 너무 급히 달리면-"

휘이이---

장원에는 한 청년이 정자 위에서 뒷짐을 진 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장포를 휘날리며, 붉은 머리칼이 여인네의 그것처럼 세 갈래로 땋아진 채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왔다."

남자는 어색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변해버린 머리칼의 색도 그렇지만, 그는 머리 모양 자체에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월아가 내 머리가 신기했는지, 이걸로 땋아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역시 우리 딸이야. 손재주가 아주 비상하더군. 재봉을 배우면 천하제일의 재단사가 될테지."

"상공!"

너무나 반가워서 그랬을까. 팽유월은 옆에 있는 독고연조차 신경쓰지 못한 채, 앞으로 달려가 청년에게 안겼다.

"아아, 상공…!!"

"미안하다. 탈출하는데...조금 늦었다."

청년은 팽유월을 자연스레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독고연은 청년의 모습을 보며 머리가 잠시 아팠다.

붉은 머리칼은 낯설다. 하지만 알고 있다. 저 얼굴을, 저 목소리를, 그리고-

"연아."

"......!!"

자신을 향해 따스하게 바라보는, 태양과도 같은 붉은 눈을. 독고연은 그만 눈빛을 보고 자각하고 말았다.

"......가가?"

"......아직 암시어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색마는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독고연은 잠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사뿐히 다가갔다.

"...원래 최면 같은 건 사랑으로 풀리는 법이랍니다."

"그래도 이건 좀…."

"여기, 제 앞에 피처럼 붉게 빛나는 태양이 계신 걸요."

"......하하, 졌다. 이리와라."

색마는 한쪽 손을 독고연에게 뻗었다. 팽유월은 색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들지 않고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언니, 울어요?"

"...우는 거 아니야."

"어, 그래요? 저는…지금 참을 수 없는데."

독고연은 색마의 품에 안겼다. 두 손을 어깨에 살포시 올리며, 그녀는 색마의 앞에 천천히 섰다.

"...오랜만이에요, 가가."

"그래. 나 왔다."

비천색마는 자신의 본모습으로 두 아내와 재회했다.

* * *

새삼 걱정했다.

내가 천마를 상대하러 가기 전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나를 숨기려고 했고, 천마와의 생사결에서 깨달은 뒤로 나는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적혈태양.

암시어를 말하지 않으면 독고연의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독고연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원래의 기억을 되찾았는가?

"그거야 가가가 제 태양이니까 그렇죠."

"언제는 하늘이라더니."

"아이 참,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구요."

독고연은 실실 웃으며 월아를 끌어안았다. 월아는 아침부터 내내 놀다가 밤늦게 지쳐 잠들었고, 독고연의 품에서도 제법 깊게 잠들었다.

"월아, 이제는 천자문 가르쳐도 되겠더라구요."

"그 정도로 똑똑해?"

"애가 이 나이 답지 않게 상당히 빨라요. 누가 보면 음...7살은 된 줄 알 거예요. 그만큼 똑똑하니까."

"......나는 왜 아직도 얘가 한 살 어린애같지?"

무려 두 달이나 보지 못했던 것 때문일까? 잠시 못 본 사이에 쑥쑥 커가는 월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간다 싶다.

"가가 앞에서는 천상 아이인 걸요. 저희가 가가 앞에서는 여인이고 싶은 것처럼."

"그러냐."

독고연은 침대에 먼저 누워있는 팽유월을 가리켰다. 워낙 목놓아 우는 바람에 팽유월은 지쳐서 잠들었고, 나는 그녀의 몸에 내기를 불어넣어 신체를 안정시켰다.

"연아. 너, 혹시 이곳에 온 뒤로 뭔가 달라졌다거나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니?"

"...글쎄요. 애초에 오늘까지도 저는 이연(異燕)이로 지냈는 걸요."

"이연?"

"또다른 독고연.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여자 이름 앞에 독고라는 성이 붙으면 부르기 좀 그래요."

"......"

아아, 또 불탄다. 독고연의 불꽃같은 효심이 이제는 성마저 희롱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너 혹시 또 맹주님이랑 안 좋은 일 있었니?"

"...팽가에 자꾸 미꾸라지들이 드나들려고 하잖아요. 열받게."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라면 나도 조금 화가 날 것 같은데."

화나는 정도가 아니라 불쾌한 정도에 이른다.

"혹시 또 누구 맞선 보게 하려고 하냐?"

"네. 이건 제 탓도 있는게…."

"네가 왜 탓이 있어? 잘못이 있다면 천무명과의 관계를 알고도 너랑 혼인시키겠다고 하는 맹주의 잘못이지."

"...그런 건 아니고, 이연이가 너무 예쁘고 잘나서 그런 거예요."

"......."

순진한 독고연. 예쁘고 잘남.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가, 이건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기는 한데…."

독고연은 뭔가 말하는 것을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저, 화경 됐어요."

"......음?"

"정확히는 이연이가 깨달음을 얻었죠. 참 우습게 되었네요. 하하…."

"......."

나는 독고연의 어깨에 손을 얹어 잠시 내기를 훑었다. 월아는 혹시나 몰라서 팽유월의 옆에 곤히 눕혔고, 월아는 잠결에도 팽유월의 품에 꼭 안겼다.

"......과연."

나는 독고연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상단전으로 올라가는 기혈이 확실히 열렸다.

몸안에 굳어있던 내력은 전신에 더욱 활개쳤고, 독고연의 몸은 진정으로 화경의 고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혹시 너도."

"임신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독고연은 그대로 읊었다.

"...아직, 안 될 것 같아요."

"뭐? 아니, 왜? 네가 제일 바라던 거 아니냐. 화경 고수가 되었는데."

"그게, 제가 아니라 이연이가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응?"

이면의 자아가 먼저 화경이 되었다는 것에 지금 질투심을 느끼는 건가? 왜?

"이연이가 천무명을 사랑하는 연심이, 그녀를 화경 고수로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제게는 조금 이상해요."

"몸과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못 따라간다?"

"...네."

감성의 문제였다.

독고연은 기억을 잃은 자기자신조차 연적으로 생각했기에, 또다른 자아에 대하여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자신의 몸에 대하여 어색함을 느꼈다.

“최면의 부작용인가….”

“그건 괜찮아요. 부작용이 있는 건 각오했으니까. 하지만….”

독고연은 나에게 몹시 죄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독고연이 가가를 생각하면서 화경이 된게 아니라, 천무명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서 화경이 된게 너무 아쉬워서 그래요….”

“...흐음?”

“그렇잖아요. 엄밀히 따지면 천무명은 가가가 아닌데. 가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불과한데, 그를 생각하며 무공을 수련했더니 화경이 된 거….”

독고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안겼다.

“감히 바람을 피는 것 같아서…!”

“...너도 참 이상한 고민을 하는구나.”

그것이 어찌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천무명과 기억상실 독고연을 연기한 이유는 세상을 속이기 위한 편의일 뿐이다.

독고연은 거기에 너무 심취해있었다.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두뇌는 명석하니.’

기억 자체가 암시에 걸려 묻혀진 만큼, 독고연은 스스로 생각을 하기보다 그녀가 말하는 ‘이연’으로서 판단을 더 깊게 내렸을 것이다.

천무명에 대한 연심.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이미 초절정의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

그리고 기억을 잃고 처음부터 시작해도 몇 주 만에 제 실력을 되찾는 천재성까지.

무공 수련 2회차를 하게된 끝에, 독고연은 그만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내가 아닌 ‘천무명’만을 생각하며.

“그런식으로 따지면 나는 천무명으로서 너를 두고 또다른 너와 하는 셈이 아니더냐. 그건 바람이 아니다. 색다른 행위일 뿐이지.”

나는 호북에서 제갈선과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아직 제갈선은 앞으로 하지 않았지만, 나를 대리만족시켜주기 위해 자신이 직접 대상이 되는 글을 써서 내게 건넸다.

대사를 그대로 읊으며. 구멍만 뒤로 박았을 뿐이었다.

“연아. 아무래도 네가 잡념이 많아진 것 같구나. 잡념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이 최고지.”

“뭔데요?”

“비무.”

무인인 이상, 가장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몸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나와 함께 잠시 어디에 다녀오자꾸나. 그곳에서 마음을 다잡는다면, 분명 네게 새로운 문이 열릴 거다.”

“...정말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너 스스로도 이 시련을 극복해야...화경인 자신을 받아들일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독고연의 비무 상대로 마침 좋은 사람이 한 명있다.

“겸사겸사 하나 더 선물로 주고.”

“뭔데요?”

“선녀의 날개옷. 널 위해 준비했다.”

독고연에게 입힌 다음, 나는 바다로 갈 것이다.

그 날.

밤바다에서의 하룻밤을 기억하며.

[작품후기]

긴급공지 화(일러스트) 지웠습니다. 그래서 이게 498화입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