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무림인이 필요한 시대는 언제인가?
사람들이 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때다.
관이 제대로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주변에 힘있는 자를 찾아가기 마련이고, '무'를 가지고 있는 무림인들이야말로 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줄 좋은 방파제 역할을 해준다.
실제로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주변으로 많은 인파가 몰리기 마련이다.
이들 대부분 산이나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곳에서 지내기를 바란다.
관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무림인들이 일부 채워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관은 무림을 건드리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기도 하고.
하지만 관이 과연 무림을 좋게 볼까?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무림인에 대해 잠재적 범죄자들로 보기도 하며, 실제로 무림인들로 인해 관이 피해를 본 경우는 허다했다.
대표적인 예로 십상련이 있으며, 실제로 관-황궁은 무공을 쓰는 무리에 큰 피해를 입었다.
금의위의 대척점에 있는 자들, 동창.
동창을 십상련이라고 부르는게 어색하기는 하지만, 동창은 꼭대기부터 뿌리까지 모두 썩어 황궁을 혼란으로 빠뜨리게 되었다.
황가 암살 미수.
동창과 금의위의 내전으로 인해 관은 십상련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황권은 상당히 하락하게 되었다.
민심이 곧 권위이며 국력이리라. 일반 민초들은 관보다 당장 옆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을 선택했다.
혈교는 무인들이 주는 안정감을 되돌려놓고자 했다.
생명과 자산의 안전을 국가가 책임지되, 무림인들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몸 쓰는 일에 무림인들을 쓴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주 미쳤지."
해남에서 나는 무림인들이 일반인들의 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똑똑히 보았다.
숙련된 뱃사공이 노를 저어도 무공을 쓰는 자들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게 다른 곳으로 하나 둘 침투하기 시작한다?
일반인들은 처음에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의 한계로 하지 못했던 것이 무림인들의 덕분에 '편리하다'고 인식한 순간, 천하의 인식은 급변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그려지는군. 누구는 보법 수련을 한답시고 음식을 포장해서 배달도 해주는데, 누구는 그냥 산에 처박혀서 허구한날 초식 연습이나 한다고 구박받을 미래가 그려지는군."
"그것 뿐만이 아니오. 기존에 있던 표국들이 모두 망하게 될 것이오. 마차로 짐을 끄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사람이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워서 그런 거 아니겠소? 그런데 그걸 이제는 사람이 한다고 봅시다. 어떤 일이 발생하겠소?"
"일주일 넘게 걸릴 배송이 사나흘만에 도착하겠지."
"그렇소. 심지어 그것도 생각해봐야하오. 만약 곳곳마다 객잔과도 같은 숙박시설을 갖춰놓은 다음, 짐꾼이 잠시나마 휴식을 보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혈라지망인가."
나는 열손가락에 강기로 선을 이었다. 혈소예가 주로 하듯 피를 실처럼 늘어지게 한 다음, 그걸 거미줄처럼 엮기 시작했다.
"한 명이 운남에서 요동까지 달려갈 필요는 없지. 봉화를 올리듯, 한 명이 짐을 챙겨서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만약 분실되거나 한다고 해도…."
"그건 다른 방법이 있다."
혈교는 분명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정확히는 혈교주가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도입하려는 방식은 분명 중원의 기존 체계가 감당하기에 다소 어려운 환경일테니.
"...후우, 알겠다. 혈교에 대해서는 여기서 그만하지. 다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서 하오문에 조언을 하자면."
"말하시오."
하오문주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내 말에 경청했다.
"...결국 하오문은 돈 되는 방향으로 가는게 정답이라는 거지."
"...그게 무슨 조언이오?"
"돈은 항상 옳다."
혈교주는 말했다.
"자본은 크면 클수록 힘으로 찍어누르는 형태가 되기에, 설령 새롭게 나타난 이들이라고 한들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도 기존에 있던 이들은? 우리 아래에도 수많은 표국이 있고, 쟁자수가 있소. 그들이 밥그릇을 빼앗기면 가만히 있을까?"
"흐흐, 이 사람이. 상대가 돈이 많다는 걸 걱정할 때는 밥그릇 빼앗긴다는 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향해 거금을 주고 영입하는 걸 걱정해야지."
내 말에 하오문주는 소태씹은 듯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표사라 함은 본디 표국 일로 먹고 살기 위해 모이는 자들이다.
대부분 무공을 익힌 자들이기는 하지만 무공을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이며, 무공을 통해 입신양면보다는 주머니를 따뜻하게 채울 수 있는 재화를 원하기 마련.
그런 이들에게 비슷한 일을 하면서 더 좋은 월급,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상황을 제시한다?
인간인 이상 끌리는게 당연할 것이다.
"대부분의 표사들은 움직이지 않겠지. 하지만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법. 누군가는 명예롭지 못하다고, 의협심이 부족하다고 할 수야 있겠지만...집 안에 가족이 곪고있는 것을 보고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대의 생각은 잘 알았소. 그러나 아직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 지도 모르니…."
하오문주는 계속 고뇌했다. 나는 하오문주를 향한 나의 도의를 마쳤다고 생각했기에, 더이상의 설득은 하지 않았다.
하오문의 표사들이 망하든 말든, 나는 하오문의 정보를 계속 얻으면 그만이다.
표사들이 줄어들면서 당연히 얻는 정보의 총량도 줄어들겠지만, 그건 하오문의 선택이지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하오문주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과연 혈교가 표국만 노릴까?'
나는 그저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말을 삼켰다.
"후우, 알겠소. 내 생각을 해보리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따로 더 정보를 얻고자 하는게 있는데."
나는 책상에 놓인 중원의 전도를 펼쳤다. 간략하게 나와있는 지도의 서쪽, 중간이 잘린 곳에는 '신강'과 '청해'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마교와 곤륜파, 두 곳의 동태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마교는 이해가 가는데, 곤륜까지?"
"그렇지. 마교가 약해진다면...곤륜이 어찌 움직일까? 지금까지는 마교의 준동을 곤륜이 잘 막아냈지만, 마교가 약해진다면?"
"곤륜파가 중원 진출을…? 하하, 그러니까 곤륜파의 움직임에 주목하라 이거군. 알겠소. 내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리다."
하오문주와의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선물로 그것 좀 보내주리다."
"그거?"
"남자한테 좋은데...뭐라 말할 수는 없고."
"색마…!! 아니지, 그대는 색협이오!"
나는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천가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천가장의 태극문과 비천각 사이에 혈소예의 혈라지망이 열 개 길게 펼쳐져있고, 거기에 수십, 수백 벌의 옷이 걸려 있는 것을.
심지어 그 옷은 내가 미래에 혈강시로서 자주 봤던 혈교의 복장과 흡사했다. 아니 더 발전된 모습이었다.
"이, 이게…."
"오셨어요, 상공?"
"...왜 또 복장이 바뀌었냐."
셋의 복장은 한층 더 과감해졌다. 팔과 다리를 내어놓은 채, 그들은 열심히 옷을 품평하며 용도와 체형에 맞게 구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혈교에서 온 선물이에요, 공자."
"오빠, 이거 어때? 귀엽지 않아?"
"귀엽다라...귀엽긴 한데."
나는 직감했다. 이대로 계속 품평을 하다가는-
"저기...다른 거 입은 것도 봐주시겠어요?"
" "
그렇게, 나는 계속 세 여인이 옷을 고르고 갈아입는 걸 구경해야만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어차피 천가장 안에서만 입을 거,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은, 세 여인이 수백벌에 이르는 옷을 전부 갈아입고 난 뒤에 끝이났다.
* * *
"...잊지 않겠다. 혈교주."
나는 세 여인이 보여준 환복 대회에 얼이 나갈 뻔 했다.
옷의 크기를 알아보겠다며 세 여인이 번갈아가며 옷을 입었지만, 그걸 한 번씩 내게 보여주며 은근한 눈으로 자랑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 그들의 품으로 뛰어들 뻔 했다.
'나를 이런 식으로 엿먹이려고 하다니.'
혈규령에 의해 배송된 것은 전부 월녀복이었다. 혈소예가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내가 기존에 만들었던것보다 훨씬 파격적이고 색(色)스러운 옷들로 가득했다.
민소매에 길이가 손가락 한 뼘 정도 되는 반바지라는 걸 입은 혈소예를 본 순간, 나는 그만 발-기 해버리고 말았다.
항상 발기한 상태지만, 진짜로 임신시킬 생각으로 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으으, 위험해."
천가장은 내가 편히 지내려고 했던 곳이다.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를 위협하는 요소가 곳곳에 생기게 된다면, 나중에 자식을 봤을 때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꼭 위엄을 챙길 필요가 있나?'
이미 천가장은 사랑이 넘치는 곳이다.
아내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싸우지 않을 것이며, 내 자식을 좀 더 챙겨주는 경우는 있어도 최소한 차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들 키우는 거 정말 어렵군."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게 뭘까. 내가 사랑을 받고 자란 적이 없기에,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어떤 식으로 줘야하는지 몰랐다.
'팽가에 가서 물어봐야하나.'
적어도 육아에 있어만큼은 팽도황과 팽유월의 말을 전적으로 따랐다.
팔대세가의 전통이 가득한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학대와 고통 속에서 자란 나보다는 더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훨씬 잘 알 것이기에.
"오빠, 방에 있어?"
"그냥 들어와."
혈소예는 조심스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붉은 천에 매듭으로 단단히 묶인 보자기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뭐냐?"
"오빠 앞으로 온 택배야. 아빠가...수신인을 오빠로 지정했어."
"......나를?"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님이 보낸 건 고맙긴 한데, 나한테 제 때 도착한 적이 없는데."
"무슨 얘기야?"
"네가 처음 나를 범했을 때."
나는 혈교주의 배려가 닿지 않았던 과거를 알려줬다. 내가 며칠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혈교주의 경고를 귀담아듣고 혈소예에 대해 대처했을 거라고.
"...아빠는 쓸데없는 말을."
덕분에, 나는 혈교주를 향해 이를 가는 혈소예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앞에서 보자기를 단숨에 풀었다.
"이건…."
"나무...함?"
보자기 안에는 제법 오래 되어보이는 흰색 나무상자가 있었다. 상자 앞에는 경첩으로 검은 자물쇠가 채워져있었고, 열쇠는 없었다.
"...이거 자르면 안에 터질 것 같은데."
"오빠. 이거 아버지의 무공인 것 같아."
"...아."
나는 바로 손톱에 강기를 불어넣어 엄지 손가락을 살짝 긁었다.
뚝, 뚜둑.
내 피가 닿자마자 자물쇠는 금방 색이 변했다. 검은색에서 붉은 핏빛으로 변했고, 내 피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아래로 흘러내리며 보자기에 스며들었다.
"...혈강."
혈교주만의 독문무공. 피로 무언가를 연성해내는 그의 무공은 무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 보자, 안에-"
끼이익.
열렸다.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옷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안에 들어있는 편지를 집어들었다.
"이건…."
[소예를 잘 부탁한다.]
"......."
처음 남해에 갔을 때, 나는 천마와 생사결을 펼쳤던 것처럼 죽을 각오로 내려갔다.
아무리 미래의 일이라고 해도, 혈강시라고 해도 딸인 혈소예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지 않은가?
심지어 현생에도 그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처녀를 두 번이나 가져간 놈이 어디 마음에 들겠는가.
그러나 그는 나를 인정하는 듯 했다. 편지와 선물로나마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감동이네. 나를 위한 선물은 아니고, 너한테 입으라고 보내신 거지만."
"......이걸 나보고 입으라고?"
혈소예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안에 있는 것들을 들어올렸다.
"월녀복...아니냐? 이거, 너랑 딱 어울리는, 잠깐만."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혈교주가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싶은 문제였다.
"소예야, 이거…."
"오빠, 줘보세요."
혈소예는 굳은 목소리로 속옷에 가까운 흰색의 옷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부위에 밀착시켰다.
"......하아, 아빠…!"
혈소예는 옷을 다시 나무상자 안에 넣으며 눈물을 삼켰다.
"나는...이거 못 입어…!"
"......."
천하삼젖 착용불가. 과연 혈교주는 혈소예를 위해 보낸 것인가, 아니면 혈소예를 놀리기 위해 보낸 것인가.
대답은 오직 그만이 알테지.
"......흐음. 이거."
나는 옷을 전부 집어들었다.
"걔한테 딱 어울리겠다."
"누구? 일단 줘봐. 이거 참고해서 내 거도 만들어야 하니까. 아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 것도 다 만들어야지."
"......."
나는 이것을 선녀의 날개옷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연이한테 딱 맞겠는데?"
[작품후기]
선 녀 같 다!
일러는 며칠 전에 나왔는데 이제야 쓸 수 있게 되었네요
긴급공지화(일러스트 설문조사)는 지웠습니다. 그래서 이게 497화입니다.
[작품 설정]
독고연(월녀)
!
[작품 설정]
독고연(월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