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96화 (49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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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호남.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호남에 기반을 마련하여 혈교의 간악한 계획에 대처하고자 했다. 호남에는 별달리 유명한 문파는 없었고, 그게 오히려 좋게 작용했다.

- 대의를 위해, 열구파와 호혈파를 빌리고자 하오. 부디 허락해주시겠소?

- 무림맹을 위해서라면!

- 십상련을 무찌르기 위함인 것을! 얼마든지 쓰시오! 하하!

무림맹은 호남의 문파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 독고자영을 비롯한 여러 무림맹 고수들이 호남에서 광동에 자리잡은 혈교의 무리를 어찌 대처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끙...."

"상심치 마십시오. 혈교주는 결국 땅에 발을 디디지 못했잖습니까."

독고자영은 혈교주의 상륙을 저지했다. 하지만 혈교의 무리가, 혈교의 사람들이, 혈교가 가지고 가려는 '황제를 위한 진상품'을 막지는 못했다.

"위험해...분명 황궁과 무슨 수를 써서-"

"맹주! 큰일났습니다!"

"큰일이 뭔지 바로 보고해!"

"놈이, 황궁에 들어갔다는 소식입니다!"

"......?"

"배, 배를 타고 중원 대륙을 빙 둘러갔다고 합니다!!"

"......이런 미친."

미치광이를 상대로,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 * *

저벅, 저벅.

관복을 입은 혈교주는 시녀의 인도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쿵, 쿵!

온통 어둡기만 한 공간에서 쇠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혈교주는 씩 웃으며 시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들라."

안에서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혈교주는 더할 나위없이 정중한 걸음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했다.

"대륙의 으뜸, 만인지상,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되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평소처럼 대해라."

"그러지."

혈교주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말조차 그냥 놓아버렸다. 다행히 뒤에 있던 시녀는 이미 방을 나간 뒤라, 혈교주의 무례를 눈치채지 못했다.

"네가 그러니까 미치광이라고 듣는 거다."

"꼬우면 반역이라고 매달든가."

"새끼, 하는 소리하고는. ...내가 왜 너를 매다냐. 내 목숨을 구해준 의형제에게."

과연 이것이 황제와 사파 최강의 고수간 대화인가, 아니면 오래전 서로 의형제의 연을 나눈 사람끼리의 대화인가?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러게, 폐하."

"높이든가 낮추든가 둘 중에 하나만 확실하게 하지? 무엄하도다, 이 놈."

"시끄럽다. 공자의 나라에서 어딜 장유유서를 함부로 어기려고 드느냐? 내가 너보다 두 살은 더 많다."

"허! 강호에서 두 살 차이면 그냥 친구나 마찬가지라고 하더니. 그 자는 어디갔나, 죽었나? 크흐흐."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황제를 향해 편하게 말하라고 하는 황제도 이상하고, 황제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니 바로 말을 놓아버린 자도 이상하다는 것.

"월영신교가 멸망하고...거의 24년 만인가."

"딱 그 정도 되었지. 정확히는 애매하지만...우리 인연도 벌써 30년이군."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성이, 자네는 도통 늙지를 않아."

"나야 무공으로 나이를 막고 있지만, 폐하야말로 누가 50대라고 생각하겠는가?"

"흐흐, 태감이 그러더군. 몸은 20대 청년만큼 좋다고. 오히려 젊은 시절에 여행했을 때보다 더 좋은 것 같다."

황제는 웃옷을 전부 벗어던졌다. 외공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여느 무장보다도 더 튼튼했다.

전쟁이 나서 친정을 하게 된다면 앞장서서 창을 들고 돌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다.

"체계는 제대로 지키고 있나? 아무리 쇠질이 좋아도 과유불급인 법이야."

"딱 근육이 비명을 지를만큼만 하고 있지. 건강을 위해 이 짓을 하는데 건강을 해치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하하. 그리고 이렇게 강해지니…."

황제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반역도당의 잔당 놈들이 암습을 해도 직접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이야. 예전에 동창의 놈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처럼 말일세."

"...잘됐군."

"흐흐, 다 자네 덕분일세. 암살이 두려워 중원으로 숨어든 망나니 황자를 황제로 만든 건, 다름아닌 자네가 아닌가?"

"글쎄. 누가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건히 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르는 상태로 만나 함께 중원을 여행했었고, 모든 일이 끝나갈 때 즈음에 서로의 정체에 대해 알게되었으니.

"...그래. 이제 나는 일국의 아버지이며, 이 나라의 황제다. 더이상, 옛날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높아지고 말았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

중원을 함께 호령하며 호협심을 길렀던 둘은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 만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황제에게는 황권의 수호라는 지상 과제가 있었고, 혈교주는 혈교주 나름대로 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따로 만나고 싶은 이유는 뭐지?"

"혈교를 공인하지 말라는 것. 혈교를 치하하지 말라는 것. 혈교는 관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지만, 관은 결코 혈교를 위해 그 어떤 벼슬과 논공행상도 줘서는 안 된다는 것. 그걸 부탁하고자 이 자리를 만들었네."

"...어째서?"

모순이다.

"혈교를 통해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하는게 아니었나?"

"맞네. 원래는 무림 자체를 엎으려고 했었지. 혈겁으로."

"......."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혈교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깨달았어. 무림인을 모두 죽여도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어딘가에 숨어있던 무림인들이 또다시 나타나더군. 그건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무림 자체는 엎는다. 하지만 혈겁도 살겁도 아닌, 새로운 방식이다."

혈교주의 눈이 붉은 빛을 발했다.

"무림의 문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권을 빼앗을 것이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옆을 지켜주는 자들이 구파일방과 팔대세가가 아닌 '관병'들임을 자각하게 만들 것이다."

"...오직 관에만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관의 치하를 거부하려고 하는 거지?"

"이건, 무림의 일이니까."

혈교주의 말에 황제는 말문이 턱 막혔다.

"관과 무림의 경계를 허물고 무림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자가, 관의 도움을 거부하고 무림 안에서 해결을 한다고? ...가능한가?"

"물론. 내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 ...과거에 그녀가 말했지."

"아…!"

황제는 담담히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혈교주는 너무나도 담담해보였다. 너무 담담해서 어색할 정도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무림을 없애달라고."

"우성, 그건-"

"그래서 나는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려고 했지. 좋은 무림인은 죽은 무림인 뿐. 무림이라는 건 결국 무림인이 전부 사라지면 무림 자체가 사라지는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혈교주는 주먹을 움켜쥐며 옅게 웃었다.

"그래서는 안 돼. 혈겁은 결국 실패할 거다. 백만을 죽이든 천만을 죽이든, 살아남은 이들 중 누군가는 무공을 익히고 다시 영웅으로 등장하게 될 터."

"그렇다면…?"

"무림 자체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혈교주의 궁극적인 목표.

"지금 당장은 어떨지 모르지. 하지만 백년, 이백년, 오백년이 지나면 과연 그 때도 무림인들이 남아있을까? 아니, 절대로."

복수.

"월영신교와 같은, 십상련의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림을 없애버리고자 한다."

"......어떻게?"

혈교주는 악의어린 미소로 입꼬리를 씩 들어올렸다.

"먼저, 택배부터 시작해보려고 하오. 아니, 표국이지. 흐흐흐."

"자네, 설마-"

"중원 전체의 유통망을 내 것으로 만들겠소. 무림맹이 독점하고 있는 유통망을 나와 관의 것으로 만들겠소. 아무리 무림인들이 날고 긴다고 한들, 이거 앞에서는 결국 꼼짝 못하지."

혈교주는 엄지와 검지를 고리처럼 만들었다.

"자본의 힘으로, 무림을 부술 것이오."

* * *

"세가가 유지되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돈이지."

나는 돈, 그러니까 자본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북팽가!

팽도황이 팽이왕이던 시절, 그의 병세를 치료하기 위해 가문의 창고가 거덜나며 팽가는 크게 기울었다. 그 뒤로 팽가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내가 털어먹은 하북의 기연은 수도 없이 많다.

영약, 보검, 영물의 내단 등 나는 팽가를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팽가 재산의 4할 가량은 내가 채워넣은 종자금이었고, 나머지 3할은 팽유월이 종자금을 바탕으로 재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었다.

결국 돈, 돈이다.

무공이 강한 자도 물론 강하지만, 자본이 강한 자도 강하다. 때로는 막대한 자금으로 초고수를 고용하거나 끌어들이기도 하지 않는가?

혈교는 자본을 긁어모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직격타는 고스란히 무림 전체가 받을 것이다.

"혈교가 어떻게 자본으로 무림을 정복하려고 드는지 아시오?”

“방금 표국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소. 그냥 평범함 표국이라고 한다면 기존 표국들이 충분히 경쟁할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다르오. 그들은...미친 짓을 저질렀소.”

하오문주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과거, 제갈무후가 험난한 파촉 지방에서 운송을 위해 만든 기구를 아시오?”

“목우유마(木牛流馬)”

“그렇소. 혈교는 그것을 중원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게 개량하여 새로 만들었소. 가도를 따라 먼 곳까지 끌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산세가 험한 잔도도 쉬이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졌지. 문제는….”

하오문주는 품에서 종이 하나를 넓게 펼쳤다. 그곳에는 혈교가 표행을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목우유마가 보였다.

“......비색천마(緋色遷馬)?”

“붉은 색으로 뒤덮어놓은 운송용 기구라고 하더군. 사람이 끌고가는 것이니 인력거가 아닐까 싶지만, 그들은 그냥 말이라고 하더이다.”

나는 왜 그런지 안다. 이 양반, 나를 놀리려고 하는 것이다!

“근데 이것만 보면 딱히 짐수레랑 다를 바가 없는데?”

“가축이 끄는 것이 아니오.”

“가축이 아니면?”

“...사람이 끄는 것이오.”

“사람이…?”

무림, 인(人).

* * *

그 시각.

잠시 외출을 나간 천가장의 세 여인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문 밖으로 나왔다.

“견희, 안에 들어가있어.”

“...어검술을 쓰는 정도라면 괜찮아요.”

아이 때문에 뒤에 서기는 했지만, 사공희까지 앞으로 나설 정도로 셋은 긴장해야만 했다.

“쳇…. 아직 회복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괜찮아요. 공자가 오실 때까지 버텨보기로 하죠.”

“...옵니다.”

천가장 내부에 설치된 진법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허락되지 않은 자의 방문을 알리는 경종이 매섭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입자’는 나타났다. 머리에 정체불명의 각모를 쓴 채, 허벅지까지 오는 장포와 바지를 입은 여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어?”

‘머리’부터. 여인의 머리는 혈소예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이었다. 여인은 철로 된 기구 위에 올라타 발을 앞뒤로 물레방아처럼 굴렸고, 네 개의 바퀴는 일정한 움직임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규령 언니?”

“소교주 님을 뵙습니다.”

여인은 기구에서 내려 혈소예를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혈소예가 아는 사람인 듯 하자, 다른 둘은 경계를 살짝 늦췄다.

“누구예요…?”

“...어, 그러니까….”

“안녕하십니까, 태극화. 와백봉. 저는 현재 해남혈맹교의 대표를 맡고있는 혈규령이라고 하옵니다.”

“...규령? 해남? 설마 해남파의 초고수-”

“해남파는 이제 없습니다. 해남파는 해남혈맹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는 일은...운송업이지만요.”

혈규령은 무안한 웃음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기구 위에는 봇짐에 쌓인 물건이 한아름 짐칸에 올려져 있었다.

“교주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아가씨.”

“아버지가? 수신인, 잠깐만. 이 이름들은 다 뭐야. 나 말고도 엄청 많잖아?”

“집 주인이 없는 사이에 몰래 주고 가라고 하셔서.”

“도대체 이게 다 뭔데?”

“......혈교주께서는.”

혈규령은 씩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손자든 손녀든 괜찮으니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윽…!”

“이거, 도대체 뭐예요…? 전부...옷?”

“아아, 그것은.”

혈규령은 손으로 머리에 쓴 모자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택배(宅配)입니다.”

“나는, 무림인들을 전부 몸쓰는 일에 집어넣을 것이오. 아아, 그래. 전 무림인을 이용해...상하차를 시키는 것이지.”

“...자네는 정말 미친 놈이야.”

“그래서, 막을 거요?”

“......황제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의 충심을, 내 어찌 막을 수 있겠나?”

혈교의 악독한 계략이, 막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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