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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맺어진 맹약(血盟)
강호에는 다양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하오문주는 강호의 수많은 정세를 확보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호북에 있던 연사도 하오문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들을 하나 둘 모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연사와 얼굴을 마주했다. 연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감해했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차를 마셨다.
'닮긴 닮았네.'
상당히 닮았다. 연붕으로 변모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인위적으로 여장을 하지 않고나서 보니 더 닮았다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내 먼 친척일지도?'
하오문에 모이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여러 이해관계가 모이는 사람들밖에 없으니, 나는 연사에 대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딱히 이 여자가 나에 대해 이성적 호감을 품는 것 같지도 않고, 나도 이상하게 이 여인을 상대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나도 이만큼 예쁜 모습으로 보인다는 생각 뿐.
푸드득.
하얀 전서구 한 마리가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의 발에는 급히 휘갈긴 듯한 편지가 하나 묶여있었고, 연사는 편지를 펼쳤다.
"...곧 문주께서 올라오신다고 하는 군요."
"의외네. 남자는 직접 안 볼 줄 알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비천색마가 떡하니 살아서 나타나고, 자기가 남녀를 오갈 수 있다는 걸 공개했으니 문주께서 나오셔야죠."
"그래. 안 그랬으면 죽을테니까."
나는 비천색마로서 정체를 드러냈다. 하오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는 내 말에 달려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천마를 이긴' 남자라면, 더더욱.
"저기…."
"뭐지?"
"천마와의 일전은, 어땠나요?"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 가히 생사결이라고 할만해. 싸움의 여파는 이미 신강에서 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을테고, 궁금한 건 뭐지?"
"그냥…."
연사는 모험담을 즐기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별 거 없었다. 주먹 한 방이 먼저 꽂히면 죽는 싸움에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았을 뿐이야. 천마군림보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천마를 쫓아서, 내가 더 높은 곳에서 그를 제압했을 뿐."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내가, 그보다 더 하늘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거지."
"그렇군요….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않은 분이라고 생각은 했어요."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보통 남자가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여장을 하지는 않으니까."
"......응?"
연사는 슬며시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아무리 여장을 해도, 몸을 바꿔도 이건 바꿀 수 없답니다."
연사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나는 일부러 목 부분의 혈을 조정하여 소리를 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여인이 아닌가?"
"맞아요. 하지만 저같이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얘기가 다르죠. 무림인들에게 천리안이 있다면, 저는 천리밖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지고 있는 거죠. 후후."
"...대단한데."
아무렴 천리라는 건 과장이겠지만, 무공에는 도움이 크게 되지 않아도 분명 음공에는 도움이 되리라.
"그래서 알 수 있답니다. 사람들이 혼잣말하는 소리,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그리고 목소리의 미묘한 차이…. 그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연사는 인자한 얼굴로 내 술잔에 술을 채웠다.
"천마와의 싸움에서 이긴 걸,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시네요."
"......."
"겉으로는 애써 아닌 척 하려고 하지만, 담담하게 이긴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도무지 주체할 수 없어서 남들의 입에서 듣고 싶어하는 거예요. 당신의 무용을. 당신의 업적을."
"...천마를 이긴게 기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기뻐서 그런게 아니다."
나는 연사가 따른 술을 단번에 털어넣었다.
"천마를 이기고 얻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기쁜 거지."
천마를 이겼다.
현녀를 먹었다.
혈녀를 먹었다.
천하 칠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중 무려 셋을 꺾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래도 천마와의 대결...재미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다시 싸우라고 한다면 사양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천마를 상대로 백중지세로 싸웠을 것이다.
나는 천마의 무공을 전부 알고있다. 하지만 천마는 마지막 순간에야 나의 성명절기를 알아냈다.
내가 그렇게 유도했으니까.
내가 천마군림보를 꺾기 위해 날아오른 마지막 순간에야 혈영귀라수를 사용했으니까.
만약 그가 처음부터 혈영귀라수를 상대했다면, 그는 싸우면서 내 무공에 대처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정말이지 운으로 승패가 갈리게 되었겠지.
"...아무튼 내가 천마를 이긴 걸 밝혔던게 결코 하오문을 협박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 나는 개인적으로 개방보다 하오문이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
"개방은 개방 방주가 무림맹주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 개방은 전부 남자 거지들 뿐이지만 하오문에는 이렇게 여자도 있잖아. 엄청 예쁜 미녀가."
"...하오문주님과 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사내 새끼들이 다 그렇지."
나 또한 그렇고. 연사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술을 다시 채웠다.
생각해보라.
잘생기고 몸좋고 누가봐도 멋진 남자가, 마교 최강자를 꺾은 남자가, 이전에는 여장을 하고 나타났던 자가 눈앞에 있다.
언제 이 남자가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지 모르는 와중에도 연사는 담담하게 나오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상당히 담대하다고 할 수 있다.
"...저기, 혹시 제게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묻고 싶은 거라."
많다. 강호의 정세가 과연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모처럼 기회가 있는 김에 연사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다.
하북의 안부? 이미 확인하고 왔다.
내가 궁금한 것은 우선 첫번째.
"혈교."
"......제 선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군요. 아니, 오히려 제가 아니더라도 강호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아실 거예요."
"그래. 운남에서 호북으로 올라오는 동안,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더군."
해남파의 봉문.
하지만 이건 새로운 해남파로 도약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구파일방 중 하나였던 해남파가 무림의 문파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관을 위해 일하는 사조직이 되겠다?"
"사조직도 아니에요. 하오문으로서는 치명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일종의 대형 표국이라고 할 수 있죠."
상당히 드물게, 연사는 이를 갈았다.
"문주는 요 몇 달간 엄청 골치아파 하셨어요. '혈교'가 출범하면서 관과 무림맹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일보직전이 되어버렸죠."
"혈교라."
기존, 강호 무림에는 '월영신교'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미래에서도 혈교는 월영신교의 후예를 자처하며 정마대전 이후의 난국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혈교주, 금우성은 내 기억을 읽고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려고 했다.
"......관에 충성하는 문파라니. 심지어 하는 일은 표행이에요. 어느 누가 이 광기를 따라잡을 수 있겠어요?"
"사파로, 십상련의 후예로 내몰지도 못하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로 무림맹의 약점이니까."
혈교는 월영신교에 피해를 입은 자들로 이루어져있다. 무림맹은 월영신교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혈교의 존재를 은폐하고자 했다.
만약, 월영신교가 대중에게 드러나게 된다면.
"월영신교가 워낙 조용히 공작을 벌여서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중원의 민초 전체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공을 익힌 자들이 자신들을 납치해서 인신공양을 벌이려고 했고, 그게 벌써 20년도 전에 수 만 명이나 되는 자들이 학살당했다는 걸 알면."
"무인, 무림 전체에 대한 혐오로 번지겠지."
혈교는 무림맹의 약점을 움켜쥐고 있는 셈이었다. 무림맹이 혈교를 압박하는 순간, 혈교는 관의 힘을 업어 무림맹을 초토화시킬 것이다.
'진짜 맹주의 권위와 업적은 혈교주의 것이니까.'
명분이, 혈교주에게 있다. 그가 십상련을 모두 박살냈다는 걸 아는 존재가 있다.
그걸 증명하는 이는 다름아닌….
"어우야. 씨발, 존나 예쁘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고, 남자는 연사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나와 마주앉았다.
"...크흠, 미안하오. 얘기는 들었지만 그...큰 차이가 없어서."
"내가 좀 예쁘게 잘생기기는 했지."
"이야…. 정말이지….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진짜 위험했겠군. 이보시오. 내 아내는 건드리지 마시오."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하오문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를 위해 준비한 잔에 술을 부었다.
"인사하지. 천가장의 주인이오. 강호에는 비천색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지."
"......."
하오문주는 술잔을 받고 나를 유심히 살폈다. 경지를 살피려는 듯한 눈빛이라기보다는, 뭔가 정보를 조합하는 눈빛이었다.
"비천색마라…. 천, 색, …아!"
하오문주는 손가락을 튕기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빙색마인!"
"그것도 나다."
"사천의 검담!"
"그것도 나다."
"연붕!"
"그것도 나지."
"...천무명?"
"그것도."
나는 잔을 들어올렸다.
"나지."
"......미친. 아주 몸을 바꾸고 화려하게 돌아다니셨군. ...잠깐. 태극화, 와백봉, 빙백봉, …...미친, 전부 몇 명이야?"
잔을 부딪힌 하오문주는 한손을 접었다 펴며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잔을 단번에 입에 털어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 흑 모가 남자로서 존경을 드리는 바, 역시 색마시구려."
"...그 말은 나와 거래를 트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
"......후우. 좋소. 안 타면 전부 다 죽을텐데, 협박으로 바뀌기 전에 시류에 편승해야지."
다행히 하오문주는 나와 각을 세우지 않았다.
"이전처럼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고. 물론 나에 대한 건...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겠다."
"본인과 청기회주 이외에는 누구도 모를 것이오. 연사야, 알았느냐?"
"뜻에 따르겠습니다. 문주."
하오문은 계약을 연장했다. 대상이 빙색마인이 아니라 천가장의 빙색마인이 될 것이며, 이제 이들은 '나'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다룸에 있어서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면 알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오? 그대가 취했던 여인들의 행방? 아니면 또 새롭게 취할 여인들?"
"아니. 그건 관심없소. 내가 궁금한 건…혈교요."
"혈교라."
하오문주는 손으로 턱을 쓸며 인상을 찌푸렸다.
"청기회주에게 이미 어느정도 전해들었겠지만, 본인도 혈교의 득세에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오. 관에 결탁한 무림의 세력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관무불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단체기는 하지."
여기서 문제.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관에서? 결코 아니다.
무림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관의 간섭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이다.
황권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마치 지방의 호족이나 군벌과도 같이 득세하며 구파일방이니 팔대세가니-그리고 종극에는 무림맹이니 하며 세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언젠가 누가 그러더군. 이 땅에 있는 이들은 하나로 뭉치려고 해도, 결국 쪼개지려는 습성이 있다고. 그게 춘추전국이든 아니면 중앙과 지방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날 거라고. 그게...지금은 관과 무림의 대립이라고."
혈교주는 말했다.
"황궁의 혼란을 틈타 관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무림은 관에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을 구축했지. 혈교는 그걸 정면으로 거스르는 자들이고."
"그렇소. 혈교는...하아."
하오문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혈교에 투신하려고 하오."
"왜?"
"혈교가, 조건이 좋으니까."
조건이 좋다. 이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관납을 주로 하고 있지만, 해남을 바탕으로 쌓은 부는 어마어마하오. 그대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혈교는 이미 중원 남부의 유통망을 하나 둘 잠식해가고 있소이다."
"......벌써?"
"그렇소. 혈교는 혈교의 '맹주'를 중심으로 중원 남부 곳곳에 퍼진 녹림을, 도적들을 소탕하고 있소이다. '군기'를 걸고."
"와, 미친."
무림인들이 관의 깃발을 걸고 도적들을 소탕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적은 결국, '녹림'의 무리다.
관은 가만히 누워서 평화와 치세를 누리고, 혈교는 민간인들의 인기를 얻는다.
지금까지 그 어떤 무림의 존재들도 혈교처럼 적극적으로 민생을 위해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자연히 비교되기 마련.
"그나저나 맹주라니. 혹시…."
"...해남파는 새롭게 변했소. 그들은…."
하오문주는 내 앞에 격문처럼 보이는 종이를 꺼냈다. 비단천에 붙여진 한지는 일필휘지의 글로 어떤 문구가 적혀있었다.
"......해남혈맹교…?"
"줄여서, 혈교요."
혈맹(血盟).
"......좆됐다."
혈교주 금우성, 그는 중원에 풀어서는 안 될 극독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작품후기]
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