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91화 (49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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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 피로 맺어진 관계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해드렸는데 어땠어요?"

"너 자꾸 그럴래?"

"흥, 누가 얘기해줄 것 같아요?"

혈소예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과연 기억을 넘겨받은 것으로 끝난 건지, 아니면 나처럼 모든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온 건지는 본인이 직접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저는 미래의 저랑 연적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이번에는 또 반대냐? 하아, 걱정마라. 나는 미래든 과거든 현재든,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이라는 말 오늘부터 금지."

혈소예는 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사랑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아껴주세요. 아이가 태어나면...전 무림이 저희를 노릴지 모르니까."

"어째서?"

"그런, 운명인 거예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여신도 저희를 죽이려고 하겠죠. 그게, 저희의 인연이니까."

"...내가 막을 수 있다."

몸만 조금 더 회복하면, 백만대군이 몰려와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부인들도 마찬가지다. 네가 낳은 아이는 너 혼자 지키는게 아니야. 우리, '천가장'으로서 지킬 것이다."

"...아이를 위해."

혈소예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내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요. 천가장...들어갈게요. 대신 내공을 회복하고 난 뒤에는 저, 바로 움직일 거예요."

"뭐? 왜?"

"그야 당연하죠. 오빠가 진짜로 생사경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도 생사경이 되어야 아이를 지킬 거 아니에요?"

"...잠깐만."

슬슬 진실을 말할까. 나는 혈소예의 말을 끊으려고 했지만-

"일단 오악부터 가야겠네요. 어디보자, 거기에 인형설삼이 있고, 만년한철의 무덤에 가면 보검이 있으니까 거기에서도 내공을 빼고, 중원 곳곳에 퍼진 월녀 강림 제단에서 내공을 더 쌓고...그럼 동선을 호북에서 사천으로 가야할텐데…."

"소예야?"

"오빠. 빨리 말해봐요. 생각나는 기연 뭐 있었죠? 미래에 자기가 기연을 얻었답시고 뛰쳐나왔던 놈들 중에, 기연이 정확히 어디에서 얻었는지 알고 있는 놈들부터 말해봐요. 동선 짜서 움직여야 효율적으로 기연을 챙길 수 있는데-"

"나 정자 안 쌌다."

"......."

혈소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내 머리칼을 가리켰다.

"생사결이 된 증거가 바로 이거지. 혈마를 유지하면서, 나는 소예신공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혈소예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우며 등을 두드렸다.

"미안. 하다가 네가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아니, 진짜다. 나도 분명 묶었는데 안 묶고 싸는 줄 알았다니까?"

"...미워."

퍽.

혈소예는 말없이 내 가슴을 툭툭 주먹으로 쳤다. 이제는 일류 정도로 내공이 회복된 덕분에 호신강기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퍽, 퍼벅, 퍽, 퍼-억!

점점, 손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혈소예는 내 뒤로 다가가 내 등판을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 화상아! 그럼 진작에 얘기를 했어야지! 나, 나를, 나를…! 그런 연애소설 여자 주인공처럼 만들어놓고…!!"

"괜찮다. 굳이 비유하자면 천색록 계열이니까."

주로 순애물 계열의 기센 여주인공이 아닐까.

"그런데 소예야, 안에 싸도 된다고 한 건 너-"

"내 감동 돌려내----!!"

엄청, 아팠다.

* * *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제갈선은 책자 하나를 가득 채운 이야기에 혀를 내둘렀다.

"견희."

"네."

"이 꿈, 견희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윽."

사공희는 제갈선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시선을 피했다. 제갈선은 책자를 가리키며 음흉하게 웃었고, 중간에 문구 하나를 가리켰다.

"제가 보기에는 견희가 그분을 감금하고 어디 못 나가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그게 꿈으로 나타나다니. 그만큼 제가 그분을 보고 싶다는 거겠죠?"

"후후, 그렇네요. 나중에 직접 보여드려야지...."

"앗."

사공희는 제갈선에게 손을 뻗으며 책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 속도는 가히 벼락과도 같았고, 제갈선은 순순히 사공희에게 책을 건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이에요. 이기어검말고는 무공 가급적이면 쓰지마요."

"...그치만, 이런 걸 보여드리면 저 부끄러워 죽을 거예요."

"오히려 좋아하실 걸요? 그만큼 견희가 그분을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거니까. 흐흥, 쇠사슬이라...취향 참."

"아, 아아...!!"

사공희는 제갈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 잊는 거예요! 알겠죠?!"

"제가 뭔가 쓰기라도 했나요?"

"......으으, 연이한테도 원래 이렇게 장난치고 그랬어요?"

"선녀동맹은 맹주님을 비롯해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거든요. '맹'이잖아요? 선녀의 대표일 뿐이지, 저희는 동등한 입장이랍니다."

제갈선은 품에서 부채를 꺼내 펼치며 얼굴 아래를 가렸다. 사공희는 눈웃음을 짓는 제갈선을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연이랑 같은 조건이라고 보고 있으니, 천가장에도 들어올 수 있다?"

"앗."

"괜찮아요. 어차피 천가장의 남은 자리는 모두 상공이 정하는 거니까요."

사공희는 천가장의 안쪽을 훑었다. 지금은 사람이 무려 이나 비었지만, 건물 자체는 버젓이 남아있었다.

비천각, 태극문, 마천루, 선녀원.

팔괘의 자리에는 이제 총 네 군데가 남았다. 사공희는 머릿속으로 남은 자리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중최미봉에 팽 부인까지 하면...남은 자리는 두 자리...."

"그러게요. 남은 두 자리를 두고 싸우게 될 수도 있죠."

"선은...엄청 여유롭네요?"

"저는 번외라서. 집에 서재 하나는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눈을 찡긋이는 제갈선에게는 여유로움이 넘쳐흘렀다. 사공희는 허탈한 미소로 제갈선의 손을 붙잡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게요. 그럼 여쭤보도록 하죠."

"...네?"

"그분의 냄새가 나요."

"......예?"

제갈선은 사공희를 따라 대문 밖까지 나왔다. 사공희는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느긋하게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진법에 누가 들어온 기운은 없는데...?"

"진법으로 아는게 아니에요."

"설마 진짜 냄새...? 어, 세상에."

제갈선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놀랐고, 사공희는 대문을 나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어서 오...."

그리고 말문이 막혔다. 그는, 붉은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심지어 여인을 등에 업은 채.

"......상공?"

"오랜만이네요, 언니."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두 손을 흔들며 웃었다. 남자는, 색마는 무안한 얼굴로 뒤를 슬쩍 가리켰다.

"...내공을 다 소모하는 바람에 지금 일반인 정도야. 그래서 업고 왔어."

"방은 그러면-"

"일단 내 방으로."

"......."

혈소예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사공희는 떫은 얼굴로 둘을 안으로 맞이했다.

"......."

제갈선은 조용히 책 끝에 세필로 글귀를 적어넣었다.

"이것이 바로 기울어진 천가장...!"

시작부터 천가장을, 그것도 색마의 방에 들어가다니.

아아, 무섭도다. 혈교!

* * *

현녀가 쫓아오지는 않을까.

마교가 추격해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어둠을 틈타 중원 땅을 가로지르길 며칠.

우리는 천가장에 도착했다. 혈마인 모습을 처음 본 제갈선과 진사월은 상당히 놀랐으나, 나 또한 그들을 보고 놀랐다.

"상공, 그 지금...?"

"한 단계 더 각성했다."

"...네?"

"소예신공...그러니까 태극혈영신공을 사용하면서 혈마를 유지하는게 가능해졌다 이거야."

나는 내 붉어진 머리칼을 가리켰다. 사공희는 놀란 얼굴로 내 말을 경청하면서도 쭈뼛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럼 임신 문제는요?"

"혈마의 힘을 가지고도 충분히 정기만 빼낼 수 있게 되었지."

"......."

사공희는 다소 불만어린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의 볼을 잡아당기려다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걱정마라. 너랑 할 때는 언제든지 안에 싸줄테니."

"말씀하신 건 반드시 지켜야해요?"

"당연하지.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될 여자에게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사공희는 한참을 내 손을 잡고 슬며시 웃었다. 산모의 기분에 따라 태아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새삼 사공희에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무당파보다 더 나를 우선시하는 여자. 바로 나의 아내다.

"견희야."

"네, 상공."

"용봉지회에서 내가 우승을 하면, 혼약을 맺자꾸나."

"......."

사공희의 표정이 급변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아니 눈물을 흘렸다.

"...저, 감히 상상도 못했어요."

"견희야?"

"평생 곁에서 지내는 것 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상공과 정식으로 혼약을 맺는다니...."

사공희는 훌쩍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눈에서 눈물만 계속 흘렸다.

"흐으...기쁜데,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요?"

"괜찮다. 너는 우는 모습도 예쁘니까."

나는 사공희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을 다독였다. 사공희는 좀처럼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고, 나는 내 옷이 흠뻑 젖을 때까지 그녀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우와, 분위기 좋다. 금환선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혼례를 올릴 때 아이를 낳고 할지, 아니면 그 전에 할지 궁금한?"

"......언제 왔나."

나는 자연히 붙어오는 혈소예와 제갈선의 모습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평범한 소복으로 갈아입은 혈소예는 제갈선과 벌써 말동무가 된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둘이 엄청 친해보이는군."

"죄송해요, 오빠를 팔았어요."

"후후, 후후후."

제갈선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천색록을 꺼내들었다.

"공자, 왜 저한테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안해주셨죠?"

"...뭐. 내가 멋지게 천마와 싸운 이야기? 아니면 목숨걸고 얘를 구한 이야기?"

"아뇨. 혈교 소교주 님에게 범해진 이야기요. 그것도 두 번이나-"

사락.

제갈선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 사라졌다. 나보다 더 빠른 손이 하나 있었고, 나는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견희야?"

"......."

사공희는 책을 바로 자신의 가슴 안으로 밀어넣었다. 챙겨가려면 옷을 벗겨야 했고, 나는 쉽게 손을 안으로 넣지 못했다.

"견희, 너 설마...."

"아아, 공자! 견희가 제 책을!!"

"...한 번만 보고 돌려드릴게요."

"안 돼요! 아직 교정작업 못 했는데!"

"교정작업이라는 거, 선이 등장인물의 남자여자를 모두 상공이랑 와백봉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거 누가 모를 것 같아요?"

"......."

제갈선은 슬쩍 색안경을 얼굴에 얹었다. 그리고는 내게서 등을 돌리며 부채를 펄럭였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몰입을 위한 거니까."

"나는 좋다고 생각해?"

"정말요? 그럼 오늘부터 공자, 저랑 같이 실습을-"

"......이거 뭐지."

혈소예는 다소 떫은 얼굴로 우리 셋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 엄청 떨리는 마음으로 왔는데, 나 여기서 쫓겨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왔는데, 이건 내가 생각했던게 아닌데...?"

"뭘 생각했길래?"

"그야 당연히 '저 년 누구냐'고 따지고, 나는 너같은 년 인정할 수 없다고 막 구박하고...."

"저희가 왜요?"

사공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예, 당신은 이미 저랑 같이 상공을 모신 적이 있잖아요?"

"그, 그렇긴 했죠. 하지만-"

"한 번 침대에서 살을 섞었으면 그거로 끝인 거에요."

"......같이 밥 먹었으면 친구 먹는 의협도 아니고, 이게 뭐죠?"

아아, 이것은 색협(色俠)이라는 것이다.

강호 무림인들이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면 의형제에 가까운 인연을 맺듯, 사공희도 함께 침대에서 나를 맞이하면 같은 부인의 연을 맺는 셈이나 마찬가지.

"소예가 오니 천군만마와도 같네요. 앞으로 상공을 상대로 밤을 지새울 때...능히 이길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사공희는 새로운 여인을 나의 부인이자 '동료'로 여기고 있었다. 나라는 거근을 상대로 밤을 함께 보낼 믿음직한 침대 위의 전우로 생각하기에, 사공희는 큰 불만없이 혈소예를 맞이했다.

"그리고 저희, 같이 맛있는 거 먹었잖아요?"

"......?"

"상공이요."

"아."

사공희의 말에 혈소예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 정말...어떻게 길들이신 건지."

"사랑으로 길들였지."

나는 사공희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애완동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도 사공희는 스스로 턱을 뻗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아참, 견희야. 이 말을 하는 걸 잊었다."

나는 사공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가장의 안을 가리켰다.

"다녀왔다."

"...다녀오셨어요, 상공?"

간단한 인사지만, 나는 사공희와 분명한 감정을 교류할 수 있었다.

[작품후기]

깨달음으로 얻은 힘 => 초식 혈마질싸 습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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