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89화 (48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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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 피로 맺어진 관계

나는 하늘을 날고 싶은 한 마리의 나비였다.

아무리 나비가 벌레라고는 하지만, 나비를 두고 대부분 아름답다고하지 징그럽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하늘을 날고 싶었다. 정확히는 감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근골이 망가진 그곳.

현천백가.

태생부터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학대를 당해야했던 그곳.

그곳은 번데기의 껍질을 깨고 부수며 나비를 짓밟았다. 간신히 번데기를 탈피하고 나왔을 때는 날개가 꺾이고 부서진 채 번데기를 탈피해야했다.

왜?

시기와 질투 때문에. 내가 옆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으면, 다른 나방 한 마리가 볼품이 없어지기에.

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었다. 번데기가 되어 망가지기 전, 새로운 장소에서 우화를 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대붕(大鵬)이라는 것을. 그냥 나비가 아니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거대한 새라는 것을.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날개가 찢겨진 나비였다. 모습을 숨기고, 모습을 바꾸고,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남들의 앞에서 떳떳하게 나서지 못했고, 나는 스스로에 대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이 현생의 인연을 쌓으며 바뀌었다. 전생에서 이어진 인연도 나를 뒤바꿔놓았다.

색마로서의 나.

천무명으로서의 나.

그리고 혈마로서의 나.

나는 나의 이면들을 내세우며 두려워했다. 강호의 사람들은 나를 과연 어찌 생각할까. 예전처럼 추마귀로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볼까? 아니면 평범한 청년으로 바라볼까.

나라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사람들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내가 남들의 앞에서, 나의 여인들의 앞에서, 나의 자식들의 앞에서 당당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더 자신을 가지고, 나에 대해 더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다.

비천색마는 더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정관을 묶고 지낼 것인가?

언제까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회피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배려 이전에, 스스로에게 나는 말해야했다.

혈강시로서의 내가, 결국 나라는 것을.

천마와의 대결에서부터, 나는 어쩌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천마는 존재 그 자체로 천마다.

천마는 그걸 내게 보였다. 나 또한 혈마로서 싸우며 그걸 몸으로 느꼈다.

곤륜파의 제자였던 나.

마교의 졸개였던 나.

혈교의 강시였던 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이자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다.

곤륜에서의 모진 역경을 견뎌냈기에, 마교에서 나락과도 같은 삶을 살아봤기에, 그리고 혈강시로서 수많은 생명을 거두었기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하며, 이번 생은 다르게 살겠다고.

그래서 억제했다.

곤륜의 무공을 애써 사용하지 않고 다른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려고 했고, 마교의 졸개 따위가 아닌 천마의 무공을 빌려 쓰기도 했고,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아니고서야 혈마를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실력의 3할은 숨기는게 강호의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미덕이 아니었다.

기만이었다.

나에 대한 기만이었다.

곤륜파의 무공? 사용하면 어떤가.

마교 졸개 시절의 아픔? 이제는 극복했다.

혈마로서의 모든 힘?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이번 생에, 나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갚을 것이다. 내가 죽인 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강호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정마대전을 막고, 혈겁난세를 막고, 태평성대에서 새로운 생명들과 함께 살다가 죽을 것이다.

‘비천색마’로서.

월영신교와의 관계? 혈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바꿔나가면 그만이다. 무림맹의 인식을 바꾸고, 대공자의 계략을 제압하고, 혈교주의 폭주를 제압한다.

검은 머리의 의협이 아닌, 핏빛으로 물든 색(色)으로서.

비천색마의 색은 이제부터 혈색(血色)이 되리니.

나는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나로서 살겠다.”

내 앞에는 혈강시가 있었다.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혈교주가 빚어낸 강골의 청년이. 퀭한 눈으로 아무 의식조차 없어보이는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항상 두려웠지. 원래의 내 얼굴은 과연 어떨까하고. 혈교주가 빚어낸 것처럼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소예신공을 해제하여 나의 얼굴이, 나의 몸이, 나의 양물이 내가 본디 가져야했을 형태로 변해간다고 해도 나는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킥.”

혈강시는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몸을, 자신의 아래를 가리켰다.

“이거, 처음부터 전부 당신 거였어요.”

“......뭐?”

혈강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듯 웃으며 말했다.

* * *

“...오빠?”

“......?”

세상이 변했다. 시야가 변했다. 내 앞에는 적발의 미인이 나를 향해 소매를 뻗으며 내 눈을 닦아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혈소예의 위로를 받으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느새 나는 혈소예와 머물기로 한 방에 들어와있었고, 혈소예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었다. 분명 그녀가 밥을 먹다가 나를 인도해준게 틀림없을 터.

“...나 어떤 상태였지?”

“그냥 멍하니 계셨어요. 어떤 상태인지는 알 것 같아서, 최대한 조심히 부축해서 방 안으로 인도했구요.”

“...고맙다.”

나는 혈소예의 볼을 쓰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정말 고마워.”

“...굳이 인사를 두 번하는 이유는?”

“정말 고마우니까 두 번이나 하는 거지.”

“...오빠, 뭔가 변한 것 같은데요?”

“그래.”

혈소예는 지금 상당히 약해진 만큼, 아무래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예야. 아무래도 나, 깨달아버린 것 같다.”

“......밥 먹다가요?”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지만 사실이다. 나는 혈소예와의 식사에서 그만 새로운 경지를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뭔가를 먹으면서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객잔에서 음식으로 나온 어린 영계를 먹을 때도, 노계를 먹을 때도, 그리고 잘려지지 않아 통으로 튀겨진 닭을 먹을 때도. 나는 개안하고 또 각성했다.

‘설마 이렇게 각성할 줄은.’

“하아, 그래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알려줄...래요?”

혈소예는 뭔가 초조한 눈치가 보였다. 나는 혈소예의 어깨를 살포시 누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두려워? 내가 너보다 강해질까봐?”

“......하, 하하. 그런 건 아닌데....”

“괜찮아. 지금 네 속마음이 다 보이니까. 혹시나 내가 네 안에 강제로 쌀까봐 걱정하는 거지?”

“윽….”

혈소예는 이를 갈며 시선을 피했다.

“걱정마. 안에 싸도 임신만 안 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오빠, 진짜 제대로 각성한 거 맞아요?”

“모르지. 확인한답시고 곤륜산에 올라가서 스승님이랑 붙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

“...그건 그렇긴 한데.”

나는 혈소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 무릎 사이에 갇힌 두 다리가 움찔거리는게 훤히 느껴졌다.

"으, 왜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지?"

"원래 자신감은 넘쳤지. 이제는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셈이고."

"그래서 진짜로 할 거예요?"

"어떻게 해줄까. 나는 지금 자신있는데."

설령 구천현녀가 와도 제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근거는 없다. 혈소예의 처음을 가져갈 수만 있으면, 나는 운명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농담이야."

나는 혈소예의 긴장한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고 빙글 돌아 침대에 누웠다.

"네가 그걸 원치 않는데 지켜줘야지. 대신 깨달음을 얻은 기념으로 그것 좀 해줘."

"뭔데요? 입으로 해드려요, 아니면 가슴으로 해드려요?"

"...라고 말해주지 않겠어?"

"......."

혈소예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또 시선을 피하길래 머리를 양쪽에서 붙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선택해. 순순히 말할래, 아니면 나랑 아이만들기 할래?"

"왜, 왜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그냥 듣고 싶어서. 한 단계 더 경지가 상승한 기념이잖아. 그 정도도 못해줘?"

"그, 그럼 오빠가 먼저 하시든가요!"

"사랑한다."

나는 바로 혈소예의 귀에 속삭였다. 혈소예는 전신이 긴장하여 눈이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매도 예쁘고, 가슴도 크고 미형이고, 허리도 잘록하고, 골반은 아이 잘 낳게 생겼지. 엉덩이도 튼실해. 그런데 무공도 뛰어나? 전생의 인연이 아니었다고 해도, 분명 너를 본 순간 나는 흑심을 품었을 거다. 아니, 연심이지. 사랑한다는 마음을."

"그, 그만...!"

희아연월검, 비기. 연심첩섭(戀心呫聶). 사랑을 속삭이는 말의 검법이다.

"만약 용봉지회에서 네가 나와 마주쳤다면, 나는 마교 소공녀가 아니라 혈교 소공녀를 쫓아갔을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이시아는 내게 탈동정의 은혜를 베풀었지만, 너는 내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으니."

"그, 그건 제가 아니라-"

"너, 있지?"

"......"

혈소예는 침묵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다시 물었다.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았다. 나를 다시금 되새기며 깨달았어. 너의 언행, 너의 마음, 너의 속내...이제는 모두 보인다."

"...그래서요?"

"거짓말쟁이로구나."

혈소예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과거로 돌려보낸 힘이 내게 있는게 아니라 네게 있었던 것이거늘, 어떻게 나만 다시 되돌아왔겠어?"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오빠의 눈앞에 있는 혈소예는 미래의 혈교주가 같이 과거로 돌아온 거다?"

"내 생각은."

혈소예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건 오빠의 이기적인 망상 아니예요? 제가 혈교주이기를 바라는. 생사고락을 같이 한 여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죠."

"만약 그렇다면 나는 네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 이게 가장 결정적인 증거지."

나는 남근을 그녀의 아래에 문질렀다. 지금은 서로 천조각이 사이를 막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채비는 끝나있었다.

"'이번에는' 화촉을 밝힐 때 첫 경험을 하고 싶다고 했잖냐. 안 그래...?"

"......."

"너,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오빠."

혈소예는 은근한 눈으로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영계가 더 좋지 않아요?"

"영계도 좋지. 하지만."

나는 혈소예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지."

"......."

혈소예는, 한참동안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등이 들썩이는 걸 두드려주며, 나는 한참 시간을 보냈다.

"나를 살려주고, 나를 품어주고,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

"......저도."

혈소예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어가듯 속삭였다.

"다시, 사랑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 * *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

사공희는 홀로 천가장 밖을 거닐며 산책에 나섰다. 옆에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제갈선이 함께 사공희를 보좌하듯 부축했다.

"희. 상공이 떠난지 오늘로 며칠지났을까요?"

"...두 달?"

"네. 거의 그 정도예요. 천마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시아가 신강으로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죠."

사공희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안 오시면-"

"견희, 마음을 다잡아요."

제갈선은 사공희의 손을 맞잡으며 기운을 북돋았다.

"아이를 생각하세요.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먹는 거예요. 조급할 필요없어요. 운남에서 요동까지 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한 달인데, 호북에서 신강을 왔다가는 거잖아요?"

"그치만."

"견희답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걱정하고 견희가 무게를 잡고 진중하게 기다려야 할 판인데, 왜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모르겠어요. 그냥 불안해요. 요즘 꿈을 꾸는데...자꾸 이상한 거 있죠."

"꿈이요?"

두 여인은 천가장 내에 마련된 긴 나무 의자에 앉았다. 여인 한 명이 가장자리에 앉으면 남자가 허벅지에 머리를 이고 눕기에 딱 맞는 길이의 의자였다.

"네. 상공이 사랑으로 감금을 당하는 꿈이요. 누군가에게 사로잡혀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그런 꿈이요."

"...좀 더 자세히."

"와봉선생님...?"

제갈선은 품에서 책자를 바로 꺼내들었다. 그리고 색안경을 접어 가슴 주변에 건 뒤, 세필을 들고 금빛 눈을 반짝였다.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어떤 꿈이죠?"

"......."

사공희는 직감했다. 제갈선은 제갈선 나름대로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자신의 악몽과도 같은 꿈은 그저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듯, 제갈선은 사공희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아니면 사랑의 감금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창작욕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어느쪽이든 사공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마음이 편했다. 독고연도 떠나고 이시아도 떠나고나니, 천가장은 너무나도 쓸쓸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야기라도 하면 조금은 풀릴 터.

"...꿈속에서 그분은, 엄청 예쁜 선녀를 향해 사랑한다고 속삭이셨어요."

사공희는 천천히 자신의 꿈속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색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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