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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색마-484화 (48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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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무덤

기연이라 함은 무인이 본디 쉽사리 얻기 힘든 계기로 얻는 인연을 말한다.

말그대로 평범한 이성과 상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이한' 인연이기에, 기연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천운에 걸었다.

나의 운명에 걸었다.

나와 혈소예가 언젠가 구천현녀에게 살해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닌 먼 훗날이기에 나는 하늘의 뜻에 모든 걸 걸었다.

'하늘이 나같은 색마가 선녀의 지아비가 되는 걸 눈뜨고 가만히 보고 있을까?'

결코 아니다.

현녀는 나를 선택했지만, 하늘은 나를 현녀와 영생을 누릴 존재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하늘이 내 편이 아니라는 가정.

만약 거꾸로, 하늘이 나의 편이라고 한다면.

"이게 기연이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선인의 무덤 아래 숨겨진 동굴을 발견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냥 자연동굴일 거야. 그래, 이런 곳에 상황 좋게 동굴이 나타날 리가 없어…."

혈소예는 연신 기연을 부정했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동굴이라고, 막다른 길이라고, 그냥 안에는 곰 한 마리가 자고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소예야. 아무래도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진짜 말도 안 돼."

동굴 깊숙한 곳에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석실의 문이 있었다. 나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 뒤에 공간이 있다. 넓은 공간이야. 뭔가...공동이 있다."

"제단이거나, 석상이거나, 그런 거라면 정말 실망할 거예요. 분명 백골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을 거예요."

"아까전까지는 기연이 아니라더니."

"이렇게까지 봤는데 어떻게 부정하겠어요?"

혈소예는 툴툴거리며 석실의 문에 손을 올렸다.

"같이 밀어요. 하나, 둘, 셋-"

"이거 아래에서 들어올리는 거다. ...너 진짜 많이 약해졌구나?"

"...칫."

혈소예는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아래에 손을 밀어넣으며 아주 천천히 석문을 들어올렸다.

혈소예를 내 뒤에 서게 만들고, 여차하면 안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무기를 받아칠 수 있도록-

"...별 거 없네?"

석문을 전부 들어올리자 안에 보인 건 야명주 사이로 비친 거대한 공동 뿐이었다. 나는 혈소예와 함께 공동 안으로 들어왔다.

쿵.

문이 닫히자 혈소예는 바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조심해요. 저기 뭔가 있어요."

"...네 말대로 백골 아니냐?"

공동 한가운데에는 검은 천을 백골 하나가 덩그러니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었다.

설마 진짜로 가부좌를 틀고 있을 줄이야. 나는 혈소예와 함께 조심스럽게 백골에 다가갔다.

"누굴까?"

"...저도 모르죠. 오빠가 모르는데."

"스승님은 알고 있을 지도."

"현녀가 알면 여기 바로 엎어버리겠네요. 곤륜산 아래에 이런 거대한 지하시설이 있다니."

"지하시설?"

혈소예는 안쪽을 가리켰다. 야명주가 밝히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혈소예는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이이익.

흙으로 뒤덮인 철문이 열렸다. 흙인지 부식된 녹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진 철문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사람이 만든 시설같죠?"

"산에 왜 이런게 존재하는 거지?"

"기연이니까요."

혈소예는 순순히 인정했다. 누가봐도 기연의 흔적이 가득했고, 석실은 보통의 존재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저 백골, 더 조사 안 해도 돼요?"

"딱히. 짐작가는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의 백골을 조사하는 것도 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아래에 뭐 글이 쓰여져 있는데요?"

"......실례합니다."

나는 백골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백골은 내가 검은 천을 건드리기 무섭게 하얗게 바스라졌다.

"내, 내가 잘못한 거 아니다?!"

"알아요.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풍화된 거겠죠.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다소 놀랍기는 하지만…."

혈소예는 검은 천을 들어 옆으로 털었다. 마치 쓰레기를 비질로 치우듯 백골은 옆으로 밀려났고, 혈소예는 손으로 바닥을 쓸며 아래에 적힌 글귀를 확인했다.

"[여우를 조심하라.]?"

"여우?"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다. 중원 역사상 여우라고 불린 여인을 전부 모으면 비무장을 한 바퀴 돌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여우를 조심라니. 정말로 의미불명이다.

"여우...."

"뭐 짚이는 거 있어?"

"아뇨.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여우가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거나, 아니면 여우같은 년에게 당해서 교훈을 주는 말이거나."

"가능성 있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남긴 유언이 여우같은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면 충분히 이해할 법 하다.

그러나 왜일까.

왜 나는 자꾸 여우라는 말 자체가 신경이 쓰이는 걸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빠, 좀 더 이쪽을 탐색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소예야. 저 안에 바깥으로 통하는 탈출구가 있을지도 모르잖냐."

"...으으, 알았어요. 지금은 오빠 믿고 따를게요."

혈소예는 순순히 내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나는 뭔가 어색한 느낌에 자꾸만 불편함을 느꼈다.

"음...."

"왜 그러세요?"

"역시 이 자세가 맞는 것 같아서."

나는 혈소예를 내 앞으로 잡아당겼다.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하복부를 붙잡고, 왼손으로 유사시에 뭐든지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이건, 그."

"네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참아다오. 이렇게 있는게 아니면...내가 불편하거든."

"...오빠는, 미래의 혈교주님을 이렇게 보호했나요?"

"......."

정답이다. 혈강시는 언제나 혈교주의 바로 뒤에서 그녀를 지키듯 섰다. 언제든지 왼팔을 뻗을 수 있게 혈교주의 왼쪽 뒤에 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위험한 기문진법 안으로 들어갈 때는 항상 몸을 바짝 붙였다.

"걸어가면서 계속 양기 줄테니까 채양해."

"...채양이라고 하니까 뭔가 엄청 음란한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냥 흡정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것 참, 시시콜콜한 거 가지고 따지기는."

"오빠, 지금 제가 약해졌다고 엄청 막나가네요? 나중에 제가 몸만 회복하고 나면...하아, 아니다. 알았어요."

혈소예는 궁시렁거리다가 내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이제 삼류에서 이류 정도의 내공을 회복한 그녀는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다.

"...내가 걸림돌 되기 진짜 싫은데."

단지 그걸 본인이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내 입방정에 자꾸만 화가 나니 짜증을 낼 터.

아니, 정확히는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는 셈이다.

혈교주.

미래의 혈교주와 혈강시는 서로를 상호 보완하는 관계였다. 혈강시가 혈교주만 지키는게 아니라, 혈교주도 혈강시를 지키며 상대에 대처했다.

일종의 2인 1조.

대부분의 전투는 혈강시가 도맡았지만, 혈교주도 혈강시에 못지 않는 전투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혈소예도 진법에 붙잡혀 내공을 모두 봉인당하지만 않았다면 분명 미래의 혈교주만큼 강한 힘을 발휘할 터.

내공의 회복.

이 앞이 기연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분명 뭔가 내공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가 있으리라.

"몸 뜨끈하게 지질 수 있는 온천이 있었으면 좋겠군."

"뭐예요, 기연 예상하기예요? 그럼 저는 앞에 거대한 시련이 있다는 거에 걸게요."

"그거 재미있는데. 진 사람은 나중에 침대에서 하룻동안 노예가 되는 거다."

"......오빠, 저 분명히 기억했어요?"

혈소예와 나는 서로 계단 아래에 있을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과연 보물이 있을까, 아니면 또다른 시련이 있을까?

이런 숨겨진 기연의 장소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태극신공을 익힌 자만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지어니.

-...태극신공이 적힌 책을 같이 놔두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언젠가 동굴을 발견할 무림의 후학을 위해 모든 안배를 해놓은 경우.

이런 기연은 발견한 자에게 순수하게 자신의 무학을 건네주고자 하는 계승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시체에 절을 하라.

-앗! 하라는 대로 하니까 무공서가!!

진법 내부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바로 기연의 보상이 튀어나오는 경우.

- 크하하! 비경선인의 무덤이라니! ...뭐? 여자만 익힐 수 있다고? 아니, 씨발. 비경선인은 여자였단 말인가?!!

- 으하하! 천교의 교주여! 내가 왔노라! 네놈의 무공으로 네 자식들을 죽이겠...뭐라고? 네 시체에 아홉 번 절하라고? 놈! 아홉 번 썰어주마!

자신이 죽은 뒤에 남겨둔 기연이 특정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걸 바라지 않을 때, 그와의 악연을 생각하여 그가 절대로 하지 않을 일종의 조건을 걸어두는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

혈소예가 예상한 경우.

- 크하하! 연자여, 나의 대허토룡도를 얻기 위해서는 시험에 통과해야한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시험이 이루어지는지는 각양각색이지만, 단순히 무공을 익히는 것이 시련이 아니라 특별한 시련을 마련하는 경우.

함정을 파훼하거나, 기문진식을 돌파하거나, 특정 무공을 익힌 나무인형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 시련이 있거나.

정말, 각양각색이다.

"그냥 무공만 덜렁 있을 거라니까. 우리가 몸을 회복할 영약이 떡하니 있을 거라고."

"그렇게 인생을 쉽게 살면 저희가 여기에 떨어졌겠어요? 그냥 바로 탈출구가 나왔죠."

"소예야, 너 힘이 없어지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변하는 거 아니냐?"

"씨이,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병신이 되서 오빠한테 도움조차 되지 못하는데. 나 때문에 여기 갇히게 되는 거라면...."

"얘가 진짜. 아까 뺨을 맞고도 정신을 못차렸네. 너는-"

"힉...!!"

내가 왼손을 들자, 혈소예는 겁을 먹고 바짝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무슨 역경이 있어도 너를 데리고 나간다. 산에 굴을 파서라도 나갈 거다. 그리고 네가 왜 역할을 안 해줘? 내가 만약에 꼴리는 일이 있으면...네가 해주면 되잖아."

"......."

혈소예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 다시 자신감으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내게 몸을 바싹 붙이며 옅게 웃었다.

"...그러네요. 제가 무공보다 더 잘하는게 있는데, 그걸 잊어버렸네요."

"그런 셈이지. 혹시나 내가 혈마가 되면, 그 때는 네가 없으면 나 혼자 벽에 딸치다 자살할 걸?"

앞의 시련을 상대하기 위해 혈마가 되었는데 여자가 없다?

죽음이다. 나는 혈소예가 있기에 혈마가 될 수 있을 것이며, 혈마가 되면 어지간한 시련은 탈출할 수 있으리라.

'아니지.'

시련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혈소예의 침대 노예가 된다.

'제발 시련이 없기를!'

저벅.

나는 계단 끝에 다다랐다. 우리의 앞에는 기나긴 통로가 있었고, 나는 야명주가 밝히는 통로 안쪽으로 혈소예와 함께 걸었다.

화륵. 화륵.

"......선술?"

우리가 앞으로 걷자, 야명주 아래에 있던 곳에 불이 환하게 밝아졌다. 투명한 무언가 안에 반짝이는 불꽃은 신비 그 자체였다.

"소예야, 이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사람을 인식하는 거죠. 원리는 중요한게 아니에요, 오빠. 사람에게 반응하도록 되어있다는 건, 현재까지도 관리되고 있다는 거고 안에 분명 사람이...."

"없는데. 안에 사람의 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다. 너 지금 완전 스승님이랑 반대구나."

"......내공은 이류지만 몸은 현경이라고요? 나 참. ...그런 식으로 자꾸 제 기 안살려줘도 돼요. 이제는...괜찮으니까."

들킨 건가. 역시 혈소예다.

"지금 뭐 부부는 일심동체니 뭐니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직 저희 결혼 안했거든요?"

"독심술이라도 익힌 거냐?"

"오빠는 눈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요."

"그럼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게?"

"얘 데리고 나가서 바로 침대에 눕힌 다음에, 음...구속뒷치기?"

"......."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감을 통해 혈소예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화----악.

넓은 공동은 불빛으로 가득찼다. 혈소예가 '와'하는 감탄사를 흘리는 바람에, 나는 궁금증에 실눈을 뜨고 주변을 훑었다.

"...어우야."

황제의 별궁도 이보다는 반짝이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곳이었다. 벽 전체가 금빛으로 가득-아니 금이었다.

"이런 미친."

금을 녹여 입힌게 아니라, 그냥 금을 깎아서 기둥으로 세워두었다. 황금으로 된 궁궐의 안이라고 보는게 맞았고, 우리가 밟은 붉은 천 앞에는 붉은 제단이 놓여있었다.

"완전히 처음 보는 곳인데. 소예야, 조심해라. 내가 중원 곳곳의 기연을 확인해본 사람으로서, 보통 이런 곳이면 천장에서 뭔가 거미같은게 툭 떨어지던-"

"오빠.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아요."

혈소예는 제단을 가리켰다. 제단에는 한자가 아닌, 그보다 더 고대의 문자가 의미심장하게 적혀있었다.

"...입구에 있던 놈은 한자로 여우를 조심하라더니, 이건 또 뭐야?"

"여기 주인이 여우가 아닐까요?"

"인적은 없는 것 같은데...아주 오래 전에 비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건 무슨 뜻이야?"

"오빠."

혈소예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제단 아래에 적힌 갑골문을 가리켰다.

"제가 반쯤은 선녀인 건, 아시죠?"

"선녀보다 더 예쁜 여자긴 하지. 선녀니까 뒤가 그렇게 예쁜-"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

혈소예는 더할 나위없이 진지했다.

"아빠랑 만났을 때 뭐 들은 거 없어요? 정말로?"

"......장인어른께서 내게 알려준 거라고는 네가 날 따먹을 거니까 조심하라는 말밖에 없는데."

심지어 늦었다. 혈소예는 잠시 벙찐 얼굴로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아빠는 왜 그런 걸 얘기하고 난리야. 으으, 아무튼 그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이 얘기로 돌아가죠. 이거, 저 읽을 수 있어요. 반은 선녀라서."

"...진짜 선녀라고?"

"네. 고대의 문자니까, 선녀도 읽을 수 있죠. 사실 어머니가, 월영신교가 남긴 걸 독학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월영신교?"

걔가 왜 거기서 나와.

"오빠, 딱 결론만 얘기할게요. 이 방은."

혈소예는, 제단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비릿하게 웃었다.

"혼자서는 절대 탈출할 수 없는 곳이에요. 방법은 딱 하나."

"...그러면?"

혈소예는 눈을 샐쭉이며 한손에 고리를 만든 뒤, 엄지를 반대쪽 손에 푹푹 쑤셨다.

"시련, 인정하십니까?"

"......."

이곳은, 여우굴.

선인을 잡아먹는, 요녀의 소굴이었다.

[작품후기]

혼자서는 절대 나갈 수 없는 방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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