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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
달렸다. 현녀는 하늘을 달렸다.
그 누구도 보이지 않게 아주 높은 곳에서, '알몸'으로 달렸다.
허공답보!
산길을 지나가다 행여나 제자들과 마주칠까 두려워서, 그리고 혹시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도망치는 그들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하여.
완전히 알몸은 아니었다. 현녀는 자신의 몸을 침대 위에 덮어둔 얇은 천을 옷처럼 둘러 몸을 가렸다. 자신의 땀과 애액, 그리고 처녀혈로 뒤덮인 그것을.
"저기로구나...!"
현녀는 제자와 혈녀가 도망치는 위치를 발견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현녀는 도망치는 둘을 보고도 눈물을 머금고 뛰어야만했다.
'장문인실'을 향해.
쿵!
현녀는 천장을 부수고 장문인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장문인실에 '여벌'로 준비된 무복을 급히 챙겨입었다.
찌걱.
"윽...!"
너무 급히 달려오는 바람에 몸안에 있는 걸 처리할 시간은 없었다. 천을 찢어 속옷 대용으로 묶을 시간도 없었다.
냄새.
곤륜의 제자들은 분명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리라. 현녀는 급히 주변을 훑었고, 마침 자신의 치태를 가리기에 좋은 물건을 찾았다.
청란포!
푸른 새의 깃털을 뽑아 실로 엮은 천은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하늘거렸다. 현녀는 급히 무복 위에 청란포를 몸에 둘렀다.
"웬놈-장문인?!"
아주 아슬아슬하게, 현녀는 의복을 단정히하고 근엄한 얼굴로 섰다.
"백자야."
"예, 예! 본인, 백자진인 여깄습니다."
"나는 다시 마저 싸우러가마. 천장을 잘...부탁한다."
현녀는 허공답보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뒤에서 백자진인이 의아해하는 것을 뒤로 미룬 채, 현녀는 하늘을 달렸다.
"응, 그읏...!"
허벅지를 최대한 붙이고, 아래에 뭔가가 뚝뚝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하며, 마치 사랑의 도피마냥 혈녀를 안고 도망치는 제자의 뒤를 바짝 쫓았다.
다른 이들이 보면 난처하지만, 저들은 상관없다.
잡히는 즉시, 또다시 모든 기억을 잃게 될테니!
"제자야...!"
현녀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하늘을 달렸다. 제자, 색마는 현녀의 추격을 눈치채고 앞으로 더욱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만 사랑해야지.... 그래야 이곳에서 영생을 얻을 것 아니더냐."
현녀의 눈은 점차 탁한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게. 영영."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곤륜산 정상을 향해, 산발이 된 남자가 한쪽 다리를 끌며 기어오르듯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남자의 몰골은 처참했다. 절고 있는 다리는 무릎이 안쪽으로 휘어져있었고, 왼팔은 뼈가 빠진 것 마냥 아래로 툭 떨어져있었다. 등은 굽어져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얼굴.
남자의 얼굴은 처참했다. 머리칼로 가린 한쪽 얼굴은 화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코와 턱은 부서지고 망가져 크게 뒤틀려있었다.
남자에게서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크게 없어보였다.
단 한 곳이 있다면....
"......."
눈.
신체의 장애애도 굴하지 않고, 오직 목적을 이루겠다는 집념이 넘쳐흐르는 사나운 눈빛만큼은 강렬했다.
핏발선 눈으로 산 정상에 오른 남자의 앞에는, 피로 물든 소복의 여인이 다고솟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스승님."
"......"
남자는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를 부들부들거리며, 자세도 엉거주춤하여 절하는 자세를 유지하지도 못하면서 절을 올렸다.
"아직도."
여인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그가 말하더이다. 네게 임무를 주겠다. 곤륜파의 장문인을 죽여라. 네 스승을 죽인다면 너를 인정해주마."
"...그래, 그렇구나."
여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왼손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낫이 들려있었다.
"스승님, 약해지셨습니다. 천마님과의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스승님께서 나서지 못하여, 곤륜의 12장로와 제자들이 모두 마교에 의해 몰살되었습니다. 대공자, 위지린이 이끄는 십만마인에 의해 모든 곤륜의 무사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래. 보았다. 곤륜산 전체에 피비린내가 진동은 하는구나. 그래...."
여인은 슬픈 눈으로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너와, 내가 곤륜의 마지막이니라."
"아닙니다, 스승님. 저는...마인입니다. 곤륜을 저버리고 마교에 투신한, 배신자란 말입니다."
남자는 절규하듯, 애원하듯 외쳤다.
"그러니 그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저는 곤륜을 멸망시킨 자입니다. 곤륜으로 들어가는 샛길을 말하고, 곤륜의 무공을 바쳤단말입니다...! 저를, 저를...!"
쾅!
남자는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나를, 그런 식으로 불쌍하게 바라보지마------!!"
"...제자야."
"제자가 아니다! 추마귀다! 곤륜을 배신하고, 이제는 스승을 죽이려고 하는 추악한 쓰레기란 말이다! 그러니, 그러니...!!"
"나는, 이제 곧 죽겠지."
왈칵.
여인은 한움큼 피를 토했다. 남자는 바로 여인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가려고 한 걸음 다가섰다, 몸이 뚝 멈췄다.
"으, 으으...!"
"...미안하구나, 제자야. 나의 욕심이, 너를 그르쳤다."
"제자가...아니라니까...!"
"...나는, 곤륜은 네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지. 너를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 곤륜이 멸망한 건, 너를 보듬어주지 못한 업보일 터."
"아니야...! 나는 원래부터 망가져있었-"
여인은, 남자를 품에 끌어안았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단다."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아니라고!!"
남자는 왼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여인을 향해 내려찍으려던 낫을 바들바들 떨렸다. 남자는 울 것 처럼 몸을 떨었다.
"나는, 나는...."
"...시간이 없구나. 제자야, 내 목을 베거라. 그리고 네 공을 세워라. 그것이...이번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가 될테니."
남자의 등을 토닥이는 여인의 손은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추악하게라도...살거라. 자책하지 말거라. 네가...마지막 곤륜이다."
"나는, 나는...."
"제자야."
여인은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머리칼로 가려진 두 눈에는 머리에서 흐른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좀 더 잘 가르쳐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아, 아아...."
툭.
여인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는 여인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스승님...? 스승님. 제가-"
턱.
여인은 남자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죽어가던 와중에도 그녀는 남자를 향해 활짝 웃으며-
"사랑한단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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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손을 당겼다.
푸슈우우웃.
여인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져나왔고, 남자는 사색이 되어 주저앉았다.
"아, 아으, 으아...."
툭. 투둑.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빗물에 젖는 여인의 머리칼 사이에서, 여인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남자는, 스승이었던 여인을 죽였다.
* * *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막다른 길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절벽.
"젠장...안그래도 절벽 떨어져서 살아남았는데."
"오빠, 절벽이니까 살지 않을까?
"여긴 아니야...."
곤륜산맥 곳곳에는 당연히 절벽이 많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수백 수천 수만 절벽 중에서도 이 절벽은 살아나온 사람이 그 누구도 없는 '선인의 무덤'이다. 만장단애를 넘어 마치 신대의 무신이 땅을 베어가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현경 고수조차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다. 바닥이 얼마나 깊을지, 협곡 아래까지 들어간다고 해도 과연 다시 기어올라올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더이상은 놓치지 않는다."
저벅, 저벅.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혈소예를 안은 채 몸을 돌렸다.
"이번에도, 너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현녀는, 손에 검강을 만든 채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평소와 같은 흰 무복에 푸른 비단천을 두른 그녀는 품에서 청명하고 맑은 꽃향기가 풍겼다.
"청란포(靑鸞布)인가."
푸른 새의 깃털을 엮어 만들었다고 하는 긴 천. 주변에 꽃향기를 일으키는 천은 현녀의 선기를 더욱 극대화하는 물건이었다.
"오빠. 혹시...."
"그래. 스승님...씻지도 않고 달려왔다."
옷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청란포를 챙겨왔다는 것은 분명 장문인실을 다녀왔다는 것.
"스승님. 허벅지에 흐르는 거 뭡니까?"
"네가 싸고 간 정액이 아니냐."
"......."
나는 할말을 잃었다. 현녀의 적나라한 말에 혈소예도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입장이 바뀌었으면 눈 돌아갔어, 오빠. 질싸튀라니."
"뭐?"
"질내에 싸놓고 튀는 남자. 살해당해도 유분수네. ...근데 그게 내 남자일 줄이야."
"야, 너를 구하려고 지금 그런 거거든?"
현녀를 완전히 기절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제자야. 이만 항복하거라. 지금 그만둔다면, 그 여자를 다시 가두는 것으로 끝내도록 하마."
"스승님, 소예를 곤륜 밖으로 보낼 생각은 없으십니까?"
"없다. 자미성이 밖에서 반짝인다면 분명 혈겁이 일어날 터. 차라리 이곳 곤륜의 구름 속에 묻어두는게 더 낫다."
"......."
예상대로 현녀는 우리를 구속하려고 들었다. 나를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혈소예는 평생 동굴에 갇혀 기둥 속 여자가 될 것이다.
'절대 안 돼.'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다. 내가 현녀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서 당위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현녀의 행동은 분명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스승님. 저는 분명히 스승님께 말하겠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저와 함께 하고 싶다면, 여인으로서 천가장에 오십시오."
"싫다. 너야말로 이곳에 남아라. 어찌 영생의 행복을 포기하고...인간으로서 죽으려고 하느냐? 나는 수많은 인간들의 죽음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마지막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발버둥쳤지. 시황제가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예, 압니다. 저도 그러겠죠. 지금은 의연하게 보이지만, 누군들 죽기를 바라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허나."
나는 절벽 끝에 섰다.
"이곳에서 평생동안 아무 생각도 않고, 아무 의문도 품지 못하고 떡만 치고 사는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자야...!"
"스승님께서 찾는 제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저는 비천색마. 혈녀의 남편입니다."
"너, 너...!"
현녀는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검을 겨눴다.
"당장 거기서 물러나! 그곳은 나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다!"
"즉, 스승님께서도 함부로 쫓아오지 못하는 곳이란 말씀 아닙니까?"
"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네 여자와 함께!"
"소예, 미안하다."
나는 혈소예와 잠시 이마를 맞췄다.
"이번에는, 함께 죽자."
"......오빠."
혈소예는 눈을 지긋이 감으며 내게 딱 달라붙었다. 그녀는 무언으로 내게 답했고, 나는 현녀에게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스승님. 불초 제자가 떠나기 전에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저는-"
"아니, 내가 할게. 오빠."
혈소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하려던 말을 그녀는 바로 알아챘고, 나는 혈소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잘들어. 요즘 시대에는 그렇게 남자를 구속하는 여자는 매력이 없어. 적반하장으로 나오지 마. 잘못한 건 그쪽이잖아?"
"안다! 나의 죄를! 그러니까 영생으로 갚겠다는 것이 아니더냐!"
"틀렸어. 여전히 모르고 있네. 네 죄는 말이야."
쪽.
혈소예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며, 현녀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이 멋진 자지를 독점하려고 한게 잘못이라고. 오빠!"
"......안녕히, 스승님."
나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현녀는 나를 향해 달려왔으나, 절벽 아래로 더는 쫓아오지 못했다.
"오빠, 입."
"........"
츄릅.
우리는 혀를 섞으며 위를 올려다봤다. 현녀는 분노와 슬픔,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깃 사이, 허벅지 아래에는 하얀 무언가가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죄책감. 크다.
미안함.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혈소예를, 중원을, 인간의 길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면, 현녀도 분명 마음을 다잡으리라.
그녀의 몸에, 반 정도는 나를 남겨두고 왔으니.
"그래도 한 방에 임신하지는 않겠지…?"
"야 이 쓰레기야!!"
선녀를 약하게 만드는 방법.
"나중에 책임지면 되잖아!"
그건 바로 지상의 존재를 몸에 남기는 것이다.
설령 날개옷을 입어도 날아가지 않게.
[작품후기]
하렘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