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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
곤륜산은 산세가 복잡하고 험하다.
중원에서 괜히 곤륜으로 오늘 걸 꺼리는게 아니며, 특히 곤륜파는 청해-곤륜산 안에서도상당한 험지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곤륜 전체가 익숙하다.
특히 지금 이 시점이라면 내게는 더욱 익숙한 곳이다.
현천백가에서 탈출한 내가 한창 곤륜에서 무공 수련을 했던 시기가 바로 이맘때 즈음.
"...생각해보니 얼추 맞나?"
용봉지회가 열리기 얼마 전.
나는 곤륜산을 떠났다. 곤륜파의 제자에서 파문당했다.
다행히 현녀가 자비를 베풀어 무공을 전부 폐하는 일은 없었으나, 이미 반병신이 된 내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라는 이유 때문이리라.
어쩌면 현녀가 내게 내려준 마지막 자비였을지도 모르고.
나는 생각했다.
전생의 존재와 현생의 존재가 같은 존재인가? 이미 그 결론은 미래의 혈교주와 지금의 혈소예가 엄밀히 따졌을 때 다른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따지고 보면, 현녀랑 나 남남 아니냐?
그러니까 '색마'다운 짓을 했다.
아미파의 장문인을 범하고 색벗이 된 남자가 나다.
곤륜파의 장문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이유가 왜 없겠는가!
이건 결코 싸고 튀는게 아니다. 그녀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나는 내 마음대로 할 뿐이다.
전생의 인연을 생각하여 수많은 부인 중 한자리 수에 우선순위를 둘 수는 있어도, 현녀만의 지아비는 될 수 없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는 적당한 공터를 발견했다. 마침 눈앞에는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있었다.
'나를 쫓아오고 있다면, 분명 여기를 발견할 것이다.'
첫경험으로 기절시키기는 했지만, 결코 그걸로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러도 일 각, 아니 어쩌면 반 각만에 바로 깨어날지도 모르지. 나는 최악의 경우, 내가 집을 뛰쳐나가자마자 바로 현녀가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오는 것까지 가정했다.
다행히 내가 허리를 좀 잘 놀렸는지, 그녀는 깊게 잠들었다.
쿵, 쿵!
- 구속은 사랑이 아니오.
나는 발을 이리저리 놀리며 지면에 현녀를 위한 글귀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서서히 혈기가 돌아오는 아기색마에게 운명을 맡겼다.
'어디냐.'
그녀와 나는 전생에 운명공동체였다. 그리고 그건 현생에도 마찬가지다.
호북에서의 만남과 하북에서의 만남 이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비기'를 서로의 몸에 심어두었다.
"비천혈세."
다시금 태극혈영신공의 힘을 끌어낸다. 안그래도 붉었던 머리칼이 이제는 선혈로 물들었고, 내 전신에도 붉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자 하나 구하고 곤륜을 도망치기에는 충분한 내공이다. 나는 혈마의 힘을 이끌어낼 때마다 현녀의 가슴속에 묻혀버린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피에 묻힌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으로 되돌아온다.
"...벌써 9번이라고?"
나는 현녀에게 9번이나 붙잡혔다. 9번 모두 혈소예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그녀를 만났고, 탈출하려고 하면 현녀에게 붙잡혔다.
그냥 도망쳤으니까.
현녀가 나간 사이에 집을 나갔으니, 집 안에 설치된 진법이 현녀에게 바로 나의 탈주를 알렸으리라.
지금도 알리고 있을 것이다. 단지 현녀가 기절했으니까 들리지 않을 뿐.
발깃.
아기색마가 냄새를 맡았다. 나는 아기색마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여긴...."
운명의 장난일까. 마침 내가 가려고 한 곳은 과거 내가 곤륜의 제자로서 시험을 치르고자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금광동.
이대제자였던가, 일대제자였던가. 한 단계 높은 항렬로 오르기 위한 심험을 치루고자 했던 바로 그곳이며, 나는 이곳을 시험칠 자격을 얻었으나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문은 굳게 닫혀있다. 주변에는 그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마군림보."
그러므로 달린다. 이미 시험의 내용은 전부 다 알고 있고, 시련을 위해 만들어진 동굴 내부의 형태도 잘 알고 있다.
이곳은 들어온 자들의 앞에 거짓과 환상을 가득 뿌리는 현혹의 진.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내 주변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나타났다.
-나를 왜 죽였어?
-살려줘!
-죽고싶지 않아....
-나는 아무 죄가 없는데!
-네가 죽였어!
-너 때문이야!!
"어쩌라고."
천마군림보에 혈영을 싣는다. 천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내 앞길을 가로막는 환영의 팔들을 모두 짓밟으며 달렸다.
"내 너희들을 모두 기억하마!"
하나하나, 내가 혈강시로서 죽인 자들이 스쳐지나간다. 섬서의 모 객잔에서 쉬던 청년, 화산파 매화검수, 녹림의 산적 등.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너희들을 죽인 것을, 어찌 잊을까!"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혈교주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나는 혈교주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런 어줍잖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혈교주의 명령이었든 말든, 저들을 죽인 모든 살생의 업은 내가 가져갈 것이다.
"너희들을 죽인 걸 잊지 않는 대가로! 나는!"
그리고 그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나는 색마로 살기로 했다.
"너희들을 죽인 만큼,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주변에서 뻗어지는 시체의 팔들이 머뭇거리는게 보였다. 나는 좌우로 벌어지는 복도를 달렸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다시 그대로 부활할 수는 없어! 대신 그만큼 새로운 생명으로 보답해주마! 내가, 이 천하제일인의 딸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마!!"
끼이이익!!
사방에서 요사스러운 비명이 넘쳐흐른다. 나의 억지에 대한 불만이며, 절규이며, 애원이다.
제발, 죽어달라는 것일 터.
"갈----!!"
나는 그들에게 일갈했다. 나의 앞을 가로막던 악귀들이, 악령들이 안개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심판을 원한다면, 너희도 구천현녀가 되어라! 내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그러니!"
나는 남은 거리를 계산했다. 마침 정확하게, '아홉 걸음'이 남아있었다.
"내가 아내를 구하는 걸, 방해하지마라------!!!"
나는 뛰었다. 악귀들의 손을 짓밟고, 복도를 달려, 마지막 문을 향해 발을 들어올렸다.
사범패륜각(師犯悖倫擊).
콰-----앙!!
문이 박살났다. 나는 흙먼지를 손으로 훑으며 바로 앞으로 달렸다.
"......왜 또 왔어?"
그녀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와. 제발. 혼자서 도망치라고 했잖아."
나는 그냥 앞으로 다가갔다. 혈소예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혈소예에게 다가가 기둥에 묶인 금줄에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금줄에 닿자마자 내 손에 전격이 튀기기 시작했다. 내외로 혈교의 내공심법을 배격하는 금줄에 내 피부는 금방 타들어갔다.
"그만 하라니까!"
"...일단 뜯기 전에 분명히 말하지."
나는 손을 들어-
"내 여자 살리겠다는데, 말이 많아."
짜-----악!!
혈소예의 뺨을, 후려쳤다.
*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현녀는 성교 후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몸을 옆으로 눕혔다.
"...하."
예상은 했다. 또다시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온갖 방법으로 도망을 쳤다.
-스승님께 드리는 제자의 마지막 식사이옵니다.
부엌에서 스승을 위한 밥을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부엌으로 들어간 뒤, 그는 부엌에 상을 차려놓고 도망쳤다.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함께 씻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자는 계곡에 잠시 몸을 담그고 오겠습니다.
함께 동침하기 전에 씻어야 한다는 이유로 계곡으로 떠난 그는 계곡물에 몸을 맡기고 흔적을 지워 도주를 시도했다.
-스승님, 저는 사실 상대를 구속하고 하는게 취향입니다. 손발을 침대에 묶어주시고 안대를 써주시겠습니까?
바로 직전에는 침대에 묶인 채 안대가 씌워져, 눈이 가려진 채로 한 시진을 방치되기도 했다.
안마라는 걸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눕혀놓은 뒤 뒷통수를 치기도 했고, 잠든 척을 하니 바로 뛰쳐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후, 후후...."
그래서 현녀는 새삼 성교를 하고 나서 그가 도망을 쳤다고 해서, 딱히 급한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도망을 간다면 '그곳'으로 간다.
그가 도망을 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한 만큼, 그녀와 함께 도망을 치고자 하는 의지 또한 강렬하다.
"...이제는 달라."
우둑, 우두둑.
현녀는 자신의 뒤에 묶인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단번에 옷을 쥐어뜯었다.
파----악!!
"강하게도 묶어두었구나. 제자야.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현녀는 구속구처럼 매듭이 몇 겹이고 묶여있던 옷을 힘으로 찢어버렸다. 터뜨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후후."
현녀는 자신의 아래에 흐르는 진한 액체를 손으로 훑었다. 아직도 뱃속이 따뜻할 정도로 진했고, 현녀는 자신의 안에서 나온 걸 두 손으로 받아 가볍게 손바닥을 비볐다.
"스읍, 하아, 스으읍."
현녀는 두 손을 붙이며 길게 호흡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심호흡을 길게 하며 몸을 비비는 현녀의 모습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할짝.
"......이런, 맛이로구나."
현녀는 손바닥에 질척거리는 것을 혀로 가볍게 훑었다.
"......달콤한게, 정상인가?"
현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간밤에는 맛과 향을 음미할 새가 없었다. 그와 처음 관계를 맺은 만큼, 현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쾌락, 행복, 영원히 함께 살아갈 도원향의 반려.
그렇다.
이곳은 영생(永生)의 공간이다. 잡초처럼 자란 풀들은 불로초이며, 뜰에 자라는 나무는 선과(仙果)다.
"......어찌 필멸자의 길을 걸으려는 것이냐?"
현녀는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과 배에 문질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지지직.
"......훗."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제단에 있는 그녀를 구출했을 터.
"제자야. 네가 감히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현녀는 느긋한 손길로-
"......어?"
* * *
머리칼처럼 붉어진 볼에는 나의 손바닥 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어, 어...?"
"도망치는데 시끄럽게 떠들면 걸리는 거 모르냐."
그녀의 눈에 고통이, 당황이, 그리고 분노가 깃들기 시작했다.
"지금...날 쳤어?"
"야, 혈소예."
뚜두둑! 나는 혈소예를 묶어둔 금줄을 모두 힘으로 뜯어냈다. 손에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앞으로 넘어지기 전 혈소예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넌 내 아내다. 꼬우면 혀깨물고 죽든가."
"...너, 너 이...."
"셋, 둘, 하나. 안 죽었으면 가자, 부인."
나는 혈소예를 기둥에서 바로 꺼냈다. 가슴과 엉덩이와 허벅지 말고는 전부 갸냘픈 여인이 피골이 상접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핼쓱해져있었다.
"얼마나 갇혔지?"
"...일주일?"
"쯧. 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거 봐라."
천만다행으로 가슴과 엉덩이와 허벅지 살은 빠지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창백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좋게해야 하지 않겠는가?
"꽉 붙잡아라. 가벼워서 날아갈 수 있으니."
"......갑자기 뭐야."
나는 혈소예를 내 품에 안았다. 그녀는 정말 자연스레 내 목에 팔을 휘감았다.
"정말, 왜 그래?"
"이번이 마지막 기회거든. 현녀를 따먹고 왔다."
".....네?"
혈소예는 벙찐 표정으로 놀랐다. 나는 진심으로 당황한 그녀의 표정에 속으로 웃으며 금광동의 출구를 향해 달렸다.
"오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냐니. 말 그대로지. 무공이 안되면 색공으로 이겨야하지 않겠냐. 선녀도 처녀면 색마한테 자지러지는 거야."
"......미친. 미쳤어. 진짜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혈소예는 점차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오빠 감금 못해서 벼르고 있던 여자야. 그런데 안에 싸고 튀어? 분명 죽이러 올 걸?"
"곤륜산에서라면 모를까, 중원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지 않냐."
"......그렇긴 한데."
혈소예는 명백히 뭔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밖은 태양빛이 화창하게 빛나고 있었다.
"...윽."
나는 혈소예의 머리를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일주일이라고는 해도 햇빛을 쬐지 못한만큼, 빛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터.
"오빠, 근데 진짜 괜찮아...? 아무리 보지가 삼류여도 몸은 현경...아니 생사경이잖아."
"그래서?"
나는 일단 달렸다. 동서남북을 따지는 건 중요치 않았다. 일단, '곤륜산맥'에서 탈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빠 좆맛에 기절했다고 해도, 금방 깨어나서 쫒아오지 않을까?"
"그렇겠지. 최악의 가정으로 내가 집을 뛰쳐나오자마자 바로 쫓아오는 걸 가정했으니."
"그, 그러면 어떡해?"
"흐흐, 걱정마라."
아무리 현녀라도 '그냥'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옷을 벗겨서 팔에 매듭을 묶었지. 그냥 뛰쳐나오려고 하면 알몸으로 나와야 할 걸?"
"......."
"어디 나와보라고 해. 그러면 바로 널리 알려질테니까. 곤륜파 장문인의...나체대팔식이."
나는 집을 나오면서, 옷으로 입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챙겨 밖에 던져버렸다.
"선녀는 옷이 없으면 꼼짝도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