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76화 (476/568)

--------------------

곤륜현녀(崑崙玄女)

“......?”

“제자님,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스승님.”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기분에 눈을 뜨니, 내 침대에는 흐트러진 소복의 현녀가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었다.

“스승...님?”

“손만 잡고 잤습니다.”

현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진한 입술자국이 남아있었다.

“할 것 처럼 덮쳐놓고는…..”

“제, 제가 스승님을 덮쳤다구요?”

“예. 제가 마치 덮쳐지는 걸 원하는 것처럼 매도하면서 저를 강제로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 그런.”

미쳤다. 어떻게 스승을 범하는 패륜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전생에는 직접 죽이더니, 현생에는 좋아 죽이게 만들려고 하는 건가? 나 없이는 못사는 몸으로 만들려는 건가?

"제자님은...저를 범하고 싶은 겁니까?"

"버, 범하다니요! 저는 그저...."

스승의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이 여인의 눈을 보고 거짓을 말할 수 있을까? 설령 각오를 다지고 거짓을 말한다고 한들, 현녀는 금방 내 거짓을 눈치챌 것이다.

그럴 바에는....

"...스승님."

나는 현녀를 내 품에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내가 현녀의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제자,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어도 되겠습니까?"

"불경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스승님을 여인으로 보고자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여인으로 보았다. 사내새끼란 여자에게 잘보이고 싶은 기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중원 어디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곤륜은 저를 받아주었죠. 어쩌면 저는 그 때부터 스승님께 매료되었던 걸 지도 모릅니다."

곤륜파에 있었을 때 만큼은 진심이었다.

내가 무공을 익혀 강해지고자 한 이유는 남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현녀의 옆에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음습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장로들이 나를 경계했겠지. 이해한다. 눈빛에서 현녀를 범하겠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을테니.

"비록 그 마음은 후에 배반당했다고 생각하여 패륜을 저질렀지만...스승님께 품은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습니다."

"변치 않았다면?"

"스승님을, 당신을."

나는 내 속에 깊숙이 묻어둔 진심을 현녀에게 토해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임신시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윽…!”

너무 적나라하게 말한 걸까? 현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사랑합니다. 스승님.”

“아…!”

현녀는 탄성을 내뱉으며 침을 삼켰다. 나는 그녀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손을 잡고 기다렸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현녀는 담담한-하지만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큰 상처를 준 그녀는 그렇게 말했죠. 무공을 버리라고. 그리고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자고.”

“예, 그랬습니다.”

당시. 심사가 칡덩굴보다 더 꼬여있던 내가 고깝게 이해하고 해석했던 소리.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곰곰이 생각을 되뇌인 결과, 나는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해는, 몹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를 대신해 제가 오해를 풀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나는 내 꿈에 부푼 가정이 진실이었기를 바랐다.

“...그러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자님, 저와...이곳에서 평생을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

죄책감이 나를 엄습한다. 그 때도, 그녀는 분명 모두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터.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서 저와 평생을 사는 겁니다. 근심과 걱정은 모두 잊어버리고, 이 앞의 작은 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겁니다. 복숭아 나무를 가꾸고...제자님과 제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그 말은,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언행의 한계였으리라. 자신의 진심을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기 부끄러워했던 선녀가 최대한 돌리고 돌려서 말한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스승님.”

“스승님은...싫어요. 현녀도, 선녀도 싫습니다.”

“그럼 제가 어찌 부르기를 원하십니까?”

“...부인?”

현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바로 현녀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 못참겠다.”

“네?”

“농사, 지금 당장 시작합시다. 자식농사.”

“뭐, 뭣…?!”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현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게서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아직 상의밖에 안 벗었는데.”

“그, 그치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난 뒤에…!”

“걱정마십시오. 원래 부부지연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게 아닙니다. 그냥 눈이 마주치면 하는 겁니다.”

“그런 억지가…!”

“아니면...싫으십니까? 부인.”

“으, 으으….”

현녀는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생각 좀 하고 오겠습니다!”

떠났다.

도망쳤다.

나는 허망하게 침대에 주저앉았다.

“......섰는데.”

현녀는 이 방면으로 전혀 내성이 없는 듯 했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침대에 다시 주저앉-

‘지금이다.’

지 않았다.

“...후우.”

나는 다시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였다.

“......미치겠군. 눈을 보는 순간 바로 정신이 나가버리네.”

속마음을 감출 수 없다.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 만큼은 들키지 않겠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라있다.

“스승님….”

나는 스승의 진심을 알아버렸다.

그녀의 욕망을 알아버렸다.

오랫동안 사랑을 모르던 선녀가 사랑을 알아버렸을 때, 그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젠장...이게 벌써 몇 번째지?”

현녀가 자꾸만 옆에 있으면,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이곳에 구속하고 싶어하기에.

영원히.

-도망쳐!!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어둠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 * *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울려퍼진다. 주변에 온갖 한자가 가득 깔린 하얀 동굴의 가운데에는 적발의 여인, 혈소예가 기둥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깨어있느냐?"

기문진식의 밖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소예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아주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이네."

"좋지. 드디어 그가 진심을 말해줬으니."

현녀는 검지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나 또한 나의 진심을 말해줬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이차를 생각해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영생을 함께 살아갈 반려인데."

"......미친 년."

혈소예의 빈정거림에도 현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마음껏 욕하거라. 너는 평생동안 여기에 갇혀있을테니. 현경 고수니, 달에 벽곡단 하나 정도만 있으면 평생 죽지 않겠지."

"...야, 나도 사람이야. 사람은 물 안마시면 사나흘이면 죽어."

"반은 선녀가 아니더냐. 공기 중의 수증기만 흡수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탈수증에 걸리면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테지."

"...하."

혈소예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망치는 걸 걱정해야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럼?"

"오빠. 무조건 도망칠 걸. 네가 아무리 개수작을 부려도 곤륜을 빠져나갈 거야. 곤륜은, 이제 그에게 더이상 집이 아니니까."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다."

현녀는 으르렁거리며 혈소예의 턱을 붙잡았다.

"다음에 올 때는 그 이의 아이를 가진 상태로 오지. 그래, 너는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말이야."

".......넌, 정말 미쳤어."

"미쳤다고? 아니지, 아니야."

현녀는 활짝 웃으며 혈소예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그저,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흥, 사랑이라면 나도 안 져. 나는…. 몇 번이고 말할 거야.”

혈소예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기에 오빠가 몇 번이고 찾아온다고 해도...나를 버리고 도망가라고 할 거라고.”

“후후, 두고보지. ...그러길래 왜 굳이 와서 건방을 떨었지. 응?”

“.......”

혈소예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 * *

꿈을 꿨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안개가 펼쳐져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목적은 없다.

그저 뭔가를 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 뿐. 무엇을 찾아야하는지, 왜 찾아야하는지 이유도 전혀 알 수 없던 와중에 나는 안개 속에서 한 명의 여인을 발견했다.

“당신, 진짜 바보네.”

적발의 여인은 나를 비웃었다.

“그냥 편한 길을 가면 되잖아.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거야?”

여인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힘든 길을 걸어? 왜? 나는 누구보다도 편한 길을 걷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다.

“정말...당신 고집을 꺾는 건 질렸어. 그래, 당신 마음대로 해.”

여인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전신을 피로 물들인 듯한 그녀에게는 진짜로 짙은 피냄새가 물씬 풍겼다.

“고집 부리다 죽을 수 있어. 그런데도 포기 안 할 거야?”

포기? 고집?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내가 죽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린다는 건 단 하나의 경우 뿐이다.

가족.

내가 전생에 가지지 못했던 것.

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평생동안 가지고 싶었던 것.

그 가족이 위험에 빠져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구할 각오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수도 있어. 가족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한순간의 불장난같은 마음으로 너를 가지고 노는 걸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생각했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나를 상대로 그렇게 장난치듯 능멸하는 여자를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고뇌했다.

“가족이다.”

나는 눈앞의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붉은 여인, 혈녀의 손을 붙잡고 내 마음을 전달했다.

“천하, 모두가 나를 버렸을 때. 오직 그녀만이 나를 챙겨줬다.”

“그냥 천살성(天殺星)이라서 그랬을 뿐이야. 필요에 의해 그랬던 거라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정말로 내가 천살성이었다면, 그게 정말로 의미가 있던 거라면, 누구든 나를 중용했겠지. 하지만 누구도 나를 그렇게까지 챙겨주지는 않았어.”

“.......”

“누구도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지 않았다. 사랑에 보답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전생에 못다한 은혜를 갚아야지.”

혈녀는 침묵했다. 나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 않나?”

“...그렇네. 세상에서 나만큼 너를 챙겨준 여자는 없었지.”

그녀는, 혈교주는 순순히 내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왼손약지에는 잇자국이 붉게 남았고,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혈교주와 눈을 마주했다.

“자신있어?”

“언제나 자신은 넘치지.”

“벌써 몇 번이고 실패했을지도 몰라.”

“그럼 몇 번이고 더 시도하면 되겠군.”

“...어쩌면 비협조적으로 나올 지도 몰라.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연약해서, 아무리 현경의 고수라도 마음이 꺾이면 이겨낼 수 없는 법이거든.”

혈교주는 말했다.

“얘, 인질이라는게 왜 그렇게 효과적인지 아니? 자신이 상처입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입는 모습을 보는게 더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입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거지.”

“그렇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말. 고집불통이네.”

혈교주는 쓰게 웃으며 내 손등을 들어올렸다.

“그래, 마음대로 해. 대신 이게 마지막 기회야. 더이상의 기회는 없어.”

“그래? 그러면 목숨을 걸어야겠군. 그래...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함이었지.”

하나. 천마를 패퇴시켜 현녀를 죽인 업을 청산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롭게 생긴 또하나의 업.

“이번에야말로 너를 지켜보겠다.”

“.......”

전생, 나는 혈교주를 구하지 못했다. 비록 사람은 다를 지언정, 그걸 엄밀히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나는 내 앞에서 네가 또다시 나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게 설령 너를 죽인다고 해도?”

“하. 내 대답을 알지 않나?”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 죽어. 죽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자신감 넘치네. 부디 성공하길 바라. ...가기 전에, 마지막.”

혈교주는 내 발등을 맨발로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뭐 하기 전에 입맞추면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던게 누구더라.”

“몰라. 안 죽는다며. 알아서 해.”

혈교주는 붉어진 얼굴로 내게서 떨어졌다.

“기회가 한 번 뿐이라는 거,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

이번에도 실패하면, 나는 영원히 곤륜에 갇히게 된다.

“무운을 빌어. 반드시 탈출해서 행복을 찾는 거야. 네 행복은...여기에 없으니까.”

“교주.”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왜 나를 혈강시로 선택했지?”

“......이제와서 그걸 묻는 거야?”

혈교주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한탄했다.

“당연한 걸 뭘 물어. 그야….”

흐드러지는 안개 속, 혈교주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가...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주기를 바랐어. 너라면, 내가 어떤 길을 걸어도 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어. 마교 소천마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그건-”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평생동안 함께할 가족을 원한다면."

"잠깐, 너-"

"그게, 나였기를 바랐어."

"...어라? 나 왜 눈물이...?"

뭔가,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