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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현녀(崑崙玄女)
현녀의 집에서 기거한 지도 어느덧 나흘째.
나는 현녀의 집에서 먹고, 자고, 먹고, 자기를 반복하며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내력은 상당한 양이 돌아왔다. 천마와의 일격에서 망가진 신체 또한 회복되었다.
'최고의 결과였지.'
천마와의 생사결에서 나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천마는 당분간 전면에 나서지 못할 것이며, 천마를 쓰러뜨린 나는 절벽 아래에 떨어져 실종되었다.
중원 그 누구도 천마를 이긴 흉수에 대해 알지 못하리라.
딱히 예고를 하고 찾아간 것도 아니고-천마에게만 알렸지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냥 만나자마자 바로 전력을 끌어당겼으니 천마와의 생사결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다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마교인들이나 정파인들 입장에서는 황당하리라. 자고 일어났더니 산이 깎여있고 천마는 패배했다더라.
죽지는 않았다.
애초에 최후의 일격을 내가 천마의 배에 쑤셔넣기도 했고, 손톱 끝에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함께 쑤셔넣기도 했다.
과다출혈로 죽지 않을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마지막에 대공자가 다른 마인들을 이끌고 나타난 덕분에, 나는 천마를 무사히 마교인들에게 인계할 수 있었다.
'대공자만 왔으면 분명 천마는 살해당했을 거야.'
대공자는 승냥이다.
천마의 자리를 얻기 위해 천마를 죽이는 패륜도 마다하지 않을 쓰레기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에 화살을 맞은 척 연기를 하면서도 안도하고 절벽에 떨어질 수 있었다.
천마가 죽으면 이시아를 볼 면목이 없지 않은가?
"그래, 괜찮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천환단을 마지막에 배에 쑤셔박았으니, 천환단은 알아서 천마의 몸을 회복시키리라.
'내 몸도 마찬가지고.'
나는 검존과의 일전 이후, 천마와의 대결에 대비하여 품에 천환단을 챙겼다.
유비무환!
덕분에 천마도 살고 나도 살았다.
천마는 자존심을 잃고 나는 내공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얻는 것이 많은 대결이 아닌가?
'솔직히 나 아니었으면 대머리 반짝이면서 천마군림보 썼을 거 아냐.'
-보아라, 천마의 위엄을.
휘황찬란한 금발을 반짝이며 맹수처럼 사납게 웃는 천마. 태양빛은 그의 머리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보아라, 천마의 위엄을.
휘황찬란한 금빛 두상을 반짝이며 사납게 웃는 천마.태양빛은 그의 머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천마가 위엄을 가지고 싸울 수 있게, 그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게 머리칼을 주었다.
혈마에게 패배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대신 그는 머리칼을 얻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이번 비무를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냐?
없다.
당장은 없다.
나의 보상은 호북, 아니면 하북으로 갔을 때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이시아와의 관계에서 공인을 받는 것!
"천마...지금쯤 자기 손자에게 천마신공을 어떻게 아기 때부터 가르칠까 고민하고 있겠지?"
즉, 이번 전투에서 내가 얻은 건 천마라는 든든한 조력자다.
정확히는 이시아의 딸-또는 아들에게 마교제일인의 할아버지가 생기는 셈이다. 그 아이는 이시아의 뒤를 이어 또다른 천마로서 자랄 터.
"휴. 이제 두 발 뻗고 시아 안에 사정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제는 이시아를 임신시켜도 천마가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습격할 일은 없다!
부친을 잃고 어머니로부터 인계를 받은 사공희는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엄연히 부친이 둘다 살아있는 이시아와 독고연은 여러모로 부담이 컸다.
차라리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모녀덮-
"...흠."
끌리기는 하지만, 그건 이시아와 독고연에게 실례다. 둘이 허락을 한다면 모를까.
"......그보다 한 명은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림맹주 독고자영.
만약 대공자 주지가 그에게 암살-이라는 이름의 과육시식을 성공한다면, 맹주는 선녀가 된다.
하루 아침에 미모의 여인이 되는 셈이다.
남성기와 여성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단 겉으로 보이기에는 미녀가 될 터.
독고연이 천무명에게 구출을 받았다는 명목으로 하북으로 간 것도 부친을 선녀화의 마수에서 구하기 위함이다.
용봉지회가 시작되면 독고연의 곁에 누가있겠는가? 독고자영이다.
독고자영은 독고연을 지키기 위해 곁에 싸고 돌 테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셈.
"...할 일이 많네."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많다. 특히 당장 돌아가야할 일이 있다.
'슬슬 배가 불러올 때가 되었어.'
사공희와 팽유월.
과거의 일은 지나간 것.
하지만 현녀가 말한 '과거'는 회귀하기 전의 일이다.
현생의 일에 대해 과거의 일이라고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다.
"이번에도 옆에서 안 도와주면 개쓰레기지. 암."
두 명의 여인을 임신시켜놓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밖에서 싸돌아다닌다?
태교를 해야할 시기에 산 위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낸다?
"...미안합니다, 스승님."
나는 내공을 다스렸다. 지금이야말로 스승의 품에서 떠나기 딱 좋은 때.
"......솔직히 구속당한 기분이라, 썩 좋지 않았소."
나는 빈 집을 향해 합장했다. 현녀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나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귀환의, 탈출의 기회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현녀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중에 한 번 크게 사례하지."
나는 보았다.
현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을. 이미 다른 여인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포기한 눈빛을.
"......그럼, 갈까."
새삼, 나는 깨달았다.
"여기있다가는 영영 스승님 치마폭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겠지."
도원향 또한, 하나의 감옥이 될 수 있음을.
* * *
"환마. 우리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것 같은데?"
도마는 눈앞에 가득한 도사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대공자도 너무하지. 청해로 도망친 암살자를 잡으라니, 이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우리보고 도사들이랑 싸우다가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적마?"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구나."
"...쓰벌, 누구는 무게 좀 잡으면 안 되나?"
적마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저기...환 형. 저까지 따라온 이유는...?"
"아, 삼 형. 별 거 없소. 그냥 우리 셋에 딸려왔으니, 같이 함께 죽으라 이거지."
"예?! 왜, 왜 죽습니까?"
"마교인이 청해를 잠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어느 도사가 반길까."
환마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에 곤륜파의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위협했다.
"멈춰라! 이곳은 곤륜의 영역이니라!"
"동시에 마교의 천마를 암살한 자가 도망친 곳이기도 하네. 증거가 있다."
"즈, 증거?!"
무사들은 환마의 말에 당황했다. 일개 무사에 불과한 자신들이 대처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큰 사안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진인 분들을 모셔오겠다!"
"진인?"
"곤륜의 12진인을 말하는 것이오. 장문인을 아래에서 보좌하는 12장로와도 같은...."
적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 눈앞에는 자신들과 비슷한 무공 수위의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 두 명.
"...우리가 뭐라고 저렇게 많이 왔대."
"마교의 이들은 들으라!"
가장 앞에 있던 장로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너희들은 지금 청해를 함부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 썩 물러가라!"
"거두절미하고, 이것을 보시오."
환마는 바닥을 지팡이로 두드렸다. 그의 지팡이에서 하얀 안개가 대나무길을 따라 흩뿌려졌다.
"이, 이건?!"
"땅 아래에 굳은 피라네. 천마를 암살한 자가 흘린 피지. 우리는 이것의 흔적을 쫓아왔을 뿐이오."
환마의 안개와 반응하여 파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핏자국은 명백히 곤륜산 안으로 이어져있었다.
"적 형, 역시 환마는 굉장한 분입니다!"
"...저거 그냥 약품이오. 안개는 눈속임이고."
"네?"
"피에 반응하면 색이 변하는 물질이 있지. 그걸 안개처럼 뿌렸을 뿐."
"크흠. 12진인이여! 그대들이 원한다면 모든 무기를 두고 가리다. 우리는 소천마의 명에 따라 흉수를 찾아야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소."
환마는 지팡이를 바닥에 꽂았다. 도마와 적마, 그리고 수염의 사내도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피의 흔적을 쫓아 흉수를 찾게 해주시오."
"...환마는 정신이 나갔다고 들었는데."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왔을 뿐."
환마의 말에 장로들은 침을 삼켰다.
마교 십마 중 가장 강한 자들을 찾아보라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까다로운 자를 골라보라면 단연 환마를 고를 것이다.
환술(幻術)은 칼질로 대처할 수 없는 사이한 수법이기에, 아무리 곤륜의 장로들이라도 쉬이 대처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그대들이 허락해준다면, 입구쪽이나마 확인을-"
"그럴 필요없다."
장로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흑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무복 위에 푸른 천을 두른 여인에 삼마는 모두 포권을 취했다.
"곤륜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인사는 필요없다. 흉수를 찾는다고?"
"예, 그렇습니다."
상대는 천마와 벌써 수차례 싸운 존재.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현녀는 천마를 죽인 흉수가 아니었다.
흉수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다. 현녀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미안하지만 곤륜의 영역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천마를 죽인 흉수를 찾는 거라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예?"
"환마. 잠깐."
적마가 환마의 옆으로 서며 물었다.
"어불성설이라는 말씀은 어떤 부분입니까?"
"그 정도도 몰라서 어딜 곤륜에 발을 들이겠-"
현녀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이런...!"
그리고는 급히 발걸음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로들도 갑작스러운 현녀의 움직임에 놀랐는지 당황하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적마. 뭔가 알아낸 거 있소?"
"아아. 돌아갑시다. 곤륜이 막아섰으니 조사는 할 수 없소. 그리고.... 삼 형, 하나 확실히 물어보도록 합시다."
적마는 수염 사내와 어깨동무를 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정말 사자(死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은 것이오?"
"...물론이오, 적 형."
사내의 한쪽 눈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운 전장에는, 누구도 죽지 않았소."
* * *
달린다.
빠르게 산을 달린다. 곤륜산은 산 전체가 현녀의 영역이라, 내가 집을 빠져나온 걸 금방 알아챌 터.
"젠장, 젠장…."
원래는 동쪽으로 달려야했다. 그래야 청해를 빠르게 벗어나 감숙성이든 사천성이든 어디든 빠르게 들어갈 수 있다.
"미치겠네."
하지만 나는 서쪽으로 달렸다. 곤륜파가 있는 곳에서 더 안쪽으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이유?
모르겠다.
그냥 내 본능이, 내 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이 기묘한 기감을 따라가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다시 붙잡혀 사랑과 헌신, 봉사라는 이름으로 구속당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기감을 따라 달려가니-
"...이것봐라?"
인적이 없는 동굴 근처에 한매검진(寒梅劍陳)이 펼쳐져있다. 근처에 강기로 펼쳐진 보이지 않는 금줄같은 것이 깔려있다.
통과는 무리.
그렇다면 강제돌파다.
이러다 걸리면? 그냥 무공의 재활훈련을 위해 밖에 나왔다가 이상한 곳에 진법이 설치되어 호기심에 봤다고 하면 끝이리라.
"...희아연월."
나는 손에 강기를 불어넣어 높이 치켜들었다. 내 손에 들린 푸른 강기의 검은 매끄럽게 반짝였고, 나는 바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서걱---!
뭔가 얇은 피막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가진 검진 안으로 달렸다.
카앙, 카앙, 카앙!
사방에서 검기가 날아와 나를 덮친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검강을 어검술로 날리며 동굴 안을 향해 달렸다.
"스으읍."
여인의 향기가 난다. 그리고 아기색마가 반응한다. 먹어봤되, 먹어보지 못한 자.
"아…."
동굴 안에는 붉은 머리의 여인이 묶여있었다. 전신이 흰 천에 구속된 채, 겉은 쇠사슬 같은 것으로 꽉 조여있었다. 입에는 구속구가 채워져있었다.
"혈소예!!"
나는 단걸음에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구속구를 바로 벗긴 나는 혈소예의 뺨을 두드렸다.
"정신차려!"
"...오...빠?"
혈소예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이걸 금방-"
"...쳐."
"뭐?"
혈소예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도망치라고, 당장!!"
"어딜,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냐?"
동굴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동굴 안으로 들려왔다.
[작품후기]
와! 성실 3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