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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현녀(崑崙玄女)
어색하다.
무엇이 어색하냐 하면, 그녀의 말투가 어색하다.
“왜 그러십니까, 제자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생, 현녀는 내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장문인이었고, 나는 일개 제자에 불과했으니.
처음 만났던 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오로지 내게 하대를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나는 존대를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차가 식습니다. 어서 드세요.”
“...스승님. 말씀을 낮추십시오.”
“.......”
현녀는 노골적으로 내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말을 낮추라고 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그녀는 차를 다소 거칠게 내려놓았다.
“싫습니다.”
“네?”
“저는 제자님과 초면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의를 갖춰야지요. 저희의 관계는 다소 복잡하지 않습니까? 복잡미묘하지요.”
“...그건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만 현녀와 나는 완전히 남남이다. 혈연인 것도 아니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전생의 스승이 내 눈앞에 나타나서, 마치 다른 사람인양 행세를 한다고 느끼는 걸까. 정확히는 현녀가 천기를 읽어 나와의 관계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마치 나처럼 과거로 직접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혈소예와는 분명 다를텐데.’
내가 과거로 돌아온 힘은 혈소예의 힘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나를 과거로 되돌리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지금의 혈소예는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기억을 전승받은 또다른 혈소예라고 할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그녀는 나를 상당히 좋게 봐주고 또 여러 좋은 경험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미래의 혈소예와는 다르다.
만약 미래의 혈소예, 혈교주가 지금 과거에 그대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와라, 혈마! 혈마겁탈격!
-혈세혈세!
...아마도 나는 혈교주의 생체 육봉이 되지 않았을까. 상당히 무시무시한 상황이라 나는 등에 오한이 들었다. 다행히 지금의 혈소예는 내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고, 또 나를 가지고 장난치듯 대하고 있어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미래의 혈교주가 결혼 적령기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낸다고 한다면, 지금의 혈소예는 이제 갓 성인이 되어 풋풋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혈소예는 그렇다.
그렇다면 현녀는?
‘진짜 모르겠네.’
말투는 분명히 다른데 왜 나는 자꾸 현녀의 얼굴에서 스승이 느껴지는 걸까. 분명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기묘한 감각에 스스로 감각을 몇 번이고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천기를 읽은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그녀가 내비치는 감정이 너무 적나라했다.
생각해보자.
엄밀히 따졌을 때, 눈앞의 현녀가 나를 상처입혔던가?
아니다.
말주변이 없고 딱딱하게 말해 상대를 오해하게 만드는게 주특기였던 스승의 언변과는 차원이 다른 화법이다.
스승이 혹시나 중원 땅에 다른 이를 만나도 말실수를 할까봐 한 마디도 못하게 입 꾹 닫게 만들어야 한다면, 당장 현녀는 중원땅에 내놓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말을 잘 했다.
분명 다른 사람인데.
분명 다른 여자인데.
왜 나의 직감은 스승이 현녀가 된 것처럼 느끼고 있을까. 혹시 스승이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닐까?
“...스승님. 하나 여쭙겠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천기를 읽으셨다면, 제가 어찌 죽었는지 아십니까?”
“.......”
현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기를 본 건 십 수 년 전의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그래요. 천기가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죠. 혹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까?”
“...아마도 제가 의식을 찾은 날이 아닐까 합니다만.”
시기가 맞물린다고 한다면, 나의 회귀가 천기를 크게 뒤바꿔놓았으리라. 추마귀가 되었어야 할 소년은 성벽 위에서 강에 뛰어내려 현천백가를 탈출했으니까.
그 뒤로 내가 개입하여 바꾼 운명은 수도 없이 많다. 일일이 말하는 게 시간 아까울 정도로 나는 많은 활동을 했다. 천기는 이미 뒤틀리고 엉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뒤로 누구도 천기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돈만이 가득하고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냐면, 저는 이제 천기를 더 읽을 수 없게되었다는 겁니다.”
“...예?”
“정확히는 읽으려고 해도 혼돈이 눈앞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는 볼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하지만 제가 봤던 천기가 본래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저는 제가 죽는 순간까지 봤습니다.”
“아….”
또다시 가슴이 미어진다. 현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억은 나를 또다시 좀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천마와의 대결 이후 내상을 다스리던 그녀에게 접근하여, 뒤에서 송곳을 쑤시듯 꼬챙이를 찔러넣었다. 당시 그녀는 호신강기조차 몸에 두를 수 없을 만큼 약했고, 추마귀의 일격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곤륜파의 도사들은 모조리 죽었죠. 제자님은 그 때 직접 참전하지 않고...산에 숨어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마교를 일시적으로 장악한 대공자 주지는 십만마인을 이끌고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했고, 곤륜파의 도사들이 모두 목숨을 바쳐 그들을 막았습니다.”
“당시 저는 천마와의 대결에서 요양중이었죠. ...그렇게 보았습니다.”
“........”
아마도 그녀는 보았을 것이다. 곤륜파 도사들의 몰살을. 자신이 천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천마가 죽었기에, 오히려 대공자 주지가 미쳐날뛰게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자조했으리라.
모든 제자들이 죽었다. 자신은 천마를 죽였지만, 그 뒤로 제자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말실수로 변절한 곤륜의 마지막 제자가 찾아왔으니, 아마 생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린 것일 터.
선녀는 지상의 더러움에 환멸해버린 것이다. 내가 죽인 것이지만,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저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그 뒤의 천기는 전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기에, 제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환경이었죠. 여러가지로 궁금하기는 합니다만-”
“스승님과.”
나는 슬쩍 운을 띄웠다.
“스승님과 똑같은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 제 목을 갈랐습니다. 저의 은인과 함께.”
“.......”
현녀의 표정은 창백해졌다. 뭔가 아는 눈치였고, 나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스승님. 그녀는 누구입니까?”
“...글쎄요. 짐작가는 바는 있습니다만….”
현녀는 대답하기를 몹시 꺼렸다.
“말씀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추궁할 겁니까?”
“아니요.”
내 말에 현녀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어째...서죠?”
“어느 분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는 차를 삼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요.”
죽일만해서 죽였을테지.
다만.
‘그냥은 안 넘어가.’
다시 지상에 나타난다면, 나는 반드시 그녀를 검으로 꺾어 범할 것이다.
“...이름 정도는 괜찮겠죠.”
그래도 역시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현녀의 입에 집중했다.
“그녀는.”
현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구천현녀(九天玄女)일 겁니다.”
“.......”
이게 왜 진짜지?
* * *
아무리 선녀라도, 아무리 무인이라도 때로는 밥을 먹고 살아야하는 법.
벽곡단만 먹고 사람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슬과 솔잎만으로 먹고 살면 병이 생기기 마련.
내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전부 버리고 천계로 등선할 것도 아닌 만큼, 나는 그저 내 욕망대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식사를 제안했다. 과연 현녀가 지상의 화식(火食)을 할 지는 모르지만, 불을 쓰지 않고 자연의 방식으로 요리하는 방법은 내게 차고 넘쳤다.
곤륜산에 있는 채소들모아 버무리고 무쳐 만들 수 있는 요리만 수 십 종에 이른다. 나는 모처럼 현녀에게 나의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을 찾았지만-
"제자님은 그냥 앉아있으면 됩니다."
현녀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부엌으로 향했다. 말총처럼 하나로 묶은 머리로 그녀는 부엌을 들어가려는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엌은 아녀자의 영역이랍니다, 제자님."
"......."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부엌에서 쫓겨났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풍겨오는 냄새에 의존한 채, 가만히 방 안에 앉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오래기다렸습니다, 제자님."
이각이 채 지났을까. 현녀는 한 상 가득 음식이 든 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얗게 익은 쌀밥부터 시작하여 곤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육류는 향긋한 향까지 느껴졌다.
"조금...의외로군요."
"무엇이 의외라는 겁니까?"
"스승님께서 이렇게 직접 요리를 하신 것, 그리고 요리들에 고기가 있는 것."
"누가 그러더군요. 여인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어찌 밥상에 고기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나는 묵묵히 수저를 잡았-
"...아."
사람이 습관이라는게 무섭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먼저 수저를 들 뻔했다. 내 안에 있는 유교색마가 크게 호통을 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 비천색마, 네 이놈! 어찌 스승이 먼저 수저를 들지도 않았는데 수저를 드는 것이야!
"괜찮습니다. 남자가 먼저 드는게 맞으니, 신경쓰지 마시길."
- 남녀는 인정이지. 암.
"......."
유교색마는 현녀의 배려를 넙죽 받았다. 내가 수저를 들자, 그제서야 현녀는 자신의 수저를 들고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하나같이 전부 맛있다. 독고연이나 내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맛있다. 황궁에서 현녀의 음식을 먹는다면, 황제는 정사를 내팽겨치고 곤륜산에 귀의하여 도를 닦을 것이다.
미미(美味)!
나조차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맛있었다. 평생 이런 밥만 삼시세끼 먹는다면, 내가 굳이 부엌으로 들어갈 이유는 존재하지도 않으리라.
"......."
맛있다. 극락의 맛이다. 이곳이 도원향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달칵.
나는 식사를 마쳤다. 현녀는 어느순간부터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후식까지 가져와 내 입에 직접 넣어주기까지 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입을 열고 씹는 것 밖에 없었다.
"제자님, 피곤합니까?"
"...잠깐 눈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후후, 얼마든지요. 여기, 누우세요."
현녀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
아니, 그래도 어찌 스승의 허벅지에 머리를 이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현녀의 허벅지에 누웠고, 현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열기에 금방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역시 역사제일젖.'
나는 눈을 슬며시 실눈으로 떴다. 소복 너머로 비치는 살결과 음영은 그 크기를 충분히 짐작케했다. 사공희나 팽유월에 못지 않은 크기도 크기지만, 혈소예의 가슴에 뒤지지 않는 미형(美形)이었다.
"후후. 한숨...푹 자도록 해요."
현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녀의 품에 있으니 자연히 피로가 풀리고 긴장감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근심과 걱정 따위는 모두 사라지는, 이상향이 이곳이 아닐까.
고요하다.
마치 요람과도 같다.
하지만.
정말로 편안한가?
진정으로,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가?
쨍그랑.
- 아, 조졌다.
- 꺄아악?! 시아, 손 괜찮아요?!
- 언니! 또 뭘 한 거예요?!
- 그, 그냥 천마설거지를...!
- 내가 미쳐! 이게 설거지예요? 천마초전박살이지! 손 좀 줘봐요. 으으, 좀있다가 수유대수음 같이 하기로 해놓고 손이 이러면 어떻게 해요?
- ...시아가 수유하고 연이 대수음 하면 되잖아요. 저는 입맞추고 있을게요.
- 견희, 역시 천재야.
"......."
고요하다.
적막하다.
산 위는 정적만이 가득하다.
"아."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 느낀 편안함은 과거에 대한 동경임을. 안락하고 편안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서는 뭔가 불편함이 있었다.
- 상공. 그렇게 빨아도 이제 젖 안 나와요. 월아 거 그만 드세요....
- 아빠!
그렇다.
내게는, 돌아가야할 장소가 있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아니라, 내가 편안하게 해줘야 할 곳이 있다.
사공희가, 이시아가, 독고연이, 팽유월이, 당서희가, 유설라가, 왕소현이, 제갈선이, 진사월이 기다리는 곳이 있다.
"스승님, 저는-"
"제자님."
현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봉긋한 언덕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은 너무나도 맑고 청명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겁니까...?"
현녀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딜, 가려고 하는 겁니까?"
현녀의 푸른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작품후기]
작가는 히로인들이 유형이 겹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정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천색마에 히로인 유형이 하나 빠졌더라고요
심지어 무협하면 근본인 히로인 유형인데!
부릉 부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