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72화 (47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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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현녀(崑崙玄女)

곤륜산의 현녀.

그녀의 정체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항상 같은 얼굴의 여인이 수 백년 동안 곤륜파의 얼굴이라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혹자는 이야기했다.

-같은 사람이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금방 반박되었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수백년을 살아있단 말인가?

혹자는 이야기했다.

-윤회전생을 하는게 아니겠소?

이 이야기는 금방반박되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최소한 무공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그녀의 무공은 변함없이 최강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현재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현녀는 대를 이어 나간다고 하더라. 이미 백년도 전부터 그렇게 알려졌고, 현녀의 정체는 궁금증을 유발하게 할 뿐 딱히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현녀의 모습을 직접 본 이들이 없었기에.

곤륜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녀는 곤륜파 장문인을 자처하고 있음에도 문파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곤륜파의 일은 모두 장문인 아래 12제자가 도맡아 처리했다. 무림맹주가 청해에 직접 오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현녀를 독대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곤륜파 제자들이 어디 함부로 밖에 나가서 현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없었다.

곤륜의 제자들은 다른 문파보다 더 정신수양에 힘을 쓰고 선도를 닦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현녀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

선녀.

지상에 남은 마지막 신선.

모두가 등선하고 천계로 오를 때, 유일하게 지상에 남아 인간들을 보살피고 곤륜에 기틀을 잡은 곤륜산맥의 주인.

그게 현녀다.

하지만 그녀는 곤륜파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선기가 충만하게 깔린 곤륜파 정상이 아니면,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몸에 충격을 받는다.

파천신검 독고연이 선녀의 몸이 되고도 병을 달고 살았던 것처럼, 지상의 공기는 선녀에게 독으로 작용하게 된다.

지상에서 순순히 적응하려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독고연처럼 선기를 날려버린다거나.

제갈선처럼 특수하게 정제된 선기를 극히 일부만 부여받는다거나.

아니면 녹림황의 유산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장기간에 걸쳐 지상의 존재가 스며들듯이 선기를 흡수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인간의 몸에 선녀의 영혼만 덧씌워버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선녀는 지상에서 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곤륜산에서 내려오는 즉시 현녀는 독기에 노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호흡을 한 번 할 때마다 유독물질을 들이마시게 되는 셈이다.

숨 쉬는 것 조차 고통 그 자체.

하지만 이는 반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곤륜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그녀는 최강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의 경지에 오른 존재.

곤륜산에서 현녀는 최강이다.

실제로 자연경인지, 아니면 현경의 끝자락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내가 생사경에 이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전생에 죽은 이유는 산을 내려왔기 때문.

정마대전.

마교의 준동을 막기 위해 곤륜파를 이끌고 최초로 마교를 요격하여, 중원 무림이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천마와 생사결을 벌여 동귀어진에 가깝게 승리를 가져왔으나, 천마와의 대결에서 큰 상처를 입고 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삐뚤어진 복수심과 추악한 자격지심에 빠져있던 한 추마귀에 의해.

현녀를 죽이면 너도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시의 나는, '나의 의지'로 다 죽어가던 스승을 죽였다.

천기를 읽는 존재가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스승은, 순순히 내게 죽어준 것이다.

자신이 보듬어주지 못한 제자에게 속죄하겠다는 이유로.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마교가 득세하는 가운데, '단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제자가 마교에서라도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며.

현녀는 제자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고, 곤륜파는 멸망했다.

그것이 내가 전생에 지은 원죄.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청해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이유.

전생, 추마귀 시절.

나는 곤륜파의 멸망에 기여했고, 곤륜파를 멸망시켰다.

근골이 망가져 장애를 가진 자를 유일하게 받아준 문파를 내 스스로 멸문시킨 것이다.

현녀는 그것을 알고 있다.

미래를, 천기를 읽는 여인인 만큼, 과거의 시점에서도 미래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현녀를 만나기 두려웠다.

내가 저지른 원죄를 알고 난다면, 나를 어떻게 대할까.

기우였다.

제자님.

그 소리에, 나는 부끄럽게도 안도했다. 걱정이 한순간에 씻겨내리고, 응어리진 죄책감이 한움큼 덜어지는 것 같았다.

몹시 이기적인 행동이지만.

과거에 곤륜파를 멸망시켰던 내가 현녀의 구원을 받고, 거기에 현녀에게 다시 '제자'라고 불리는게 너무나도 기뻤다.

현천백가를 나왔던 내게 있어 이곳은 첫번째 안식처였으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시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사과해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제자님."

현녀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전생에는 항상 내가 그녀를 올려다봤는데, 이제는 현녀가 나를 올려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이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녀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등을 토닥였다.

"분명...그녀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 마세요."

"저는...저는…!"

속에서 뭔가가 끌어넘친다. 평정을 유지하기에는 이미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당신을…!"

"다."

현녀의 목소리에, 나는 뭔가가 무너져내렸다.

"지나간 일입니다."

"......!!"

그리고 나는 자각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쓰레기인지를.

다 지나간 일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만 '안도'해버리고 말았다.

"스승...님…!"

"그래요. 제가 당신의 스승입니다."

현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고, 나 또한 그녀를 끌어안았다.

"......진정할 때까지, 토닥여줄게요."

나는 그렇게, 한참을 그녀의 품에서 소리없이….

* * *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제자, 비천색마라 하옵니다."

"...색마?"

곤륜산의 정상.

나는 정자에서 현녀를 눈앞에 두고 당당히 '나'를 밝혔다.

"색마라 함은, 여인을 겁탈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제자님?"

"예, 그렇습니다."

나는 나의 현생을 부정하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스승님께서 실망하셨다면 송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개인적인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당신의 운명과도 같은 업이니까요. 하지만 제자님."

현녀는 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여인이 범해지며 쾌락을 느끼고 기뻐한다고 한들, 범하는 건 잘못된 행동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예, 인정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자중하고 있습니다."

"자중이요?"

"그...나쁜 짓을 저지른 여인들을 겁탈하는 정의로운 색마가 되기로 했습니다."

"......."

현녀는 기가 막힌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스승이 이리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전생같았으면-

[네가 한 일을 들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인륜을 저버린 행동을 하고도 네가 감히 나를 보려고 하느냐? 잘못을 저지른 여인이 있으면 법의 판결을 따라야 하거늘, 어찌 사사로이 네 잣대를 들어 판단을 내리느냐? 하물며 그것이 너의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라면, 그건 몹시 잘못된 일이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잘못을 저질렀다고 너까지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건 몹시 그른 일이다! 나는 네게-]

"반성하세요."

"물론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지. 왜 저렇게 담담히 혼을 내고 마는 거지?

"그...스승님."

"말씀하세요, 제자님."

"그, 제게 말을 안 높이셔도 됩니다."

불편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현녀는 지긋이 웃기만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생의 인연이 현재에 이어져 서로의 호칭을 이리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제자님과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아니면 제자님은...진정으로 곤륜의 도사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

나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청해에 들어와 사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내가 중원에 벌려놓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곤륜산은 열려있습니다. 다만."

현녀는 차를 홀짝이며 은은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삼가하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삼가하세요. 잘못을 저질렀지만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

정말 뭐지. 천기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어떻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청산유수같은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오는 걸까.

전생의 현녀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폭우라고 한다면, 눈앞의 현녀는 보슬비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바꾼 걸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왜 천마를 상대로 목숨을 걸었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나는 차마 말을 꺼내기가 민망하여 바로 즉답하지 못했다.

"그…."

"혹시 대답하기...조금 그렇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답을 재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제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현녀는 왼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저를 죽인 것에 대한 부채감이 일말이라도 있어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거라면,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스승님."

"과거는 과거일 뿐. 이미 벌어지고 지나간 일입니다. 아니...여기서 과거는 조금 다르겠지요.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스승님께서는…하지만 알고 계시잖습니까."

나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가 당신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하여 자격지심에 복수심을 품었던 것. 고작 마교 내에서 높은 직급을 얻어보겠다고...스승님을 살해한 것. 곤륜파 멸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다 제가 저지른 짓입니다. 그런데 왜…?"

"그래서."

현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다시 일어났습니까?"

"예…?"

"당신이 저를 죽이고, 곤륜파를 멸문시켰습니까?"

"그건 아직-"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까?"

"전혀요! …전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곤륜은 제게 있어 첫번째 안식처였습니다. 다른 구파일방, 팔대세가는 커녕 강호의 그 어떤 문파...심지어 표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저를 유일하게 받아준 곳이 곤륜이었습니다. 이곳은, 제게 희망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곳입니다."

"동시에 절망도 가르쳐주게 되었지요. 문파를 스스로 떠나게 되는 좌절감마저도."

"......."

현녀의 말에 나는 반문하지 못했다.

"제자님,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알고 있습니다."

나는 현녀의 말을 잘랐다.

"많은 도인분들, 선배님들, 그리고 사제들 마저도 저를 진정으로 걱정하여 그랬다는 걸 압니다. 자존심과 의지,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다리를 다친 사람이 보법을 연마할 수 있을까?

있기야 하다. 누군가는 보기 흉하다고 하더라도 흉내는 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처럼 똑같이 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아니 불가능하다.

신체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일촌남근인 대공자 주지가 여인의 자궁구를 긁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분개하는 것이다!

작으면 작은대로 기술을 연마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거근인 이들을 억지로 흉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셈이었다.

한 줄로, 뱁새가 황새 쫒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진 셈.

일촌남근에게는 일촌남근에게 맞는, 뱁새에게는 뱁새에게 맞는 방식이 있었다.

"곤륜은 제 몸에 맞는 최적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단지 제가 그걸 인정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제가 못남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랬던 거지요."

"그건 제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압니다. 저를 반병신으로 만든 자들의 잘못이라는 걸. 그래서 소소하게 복수를 했지요."

회귀하자마자 반병신이 되기 전에 가출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데리고 부부지연을 선보였고, 썩을 놈의 혼삿길을 한 번 막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더 훼방을 놓고 방해를 하겠지만, 최소한 나름의 만족감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승님. 스승님께서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으십니다."

눈앞의 이 여인이 내가 찔러죽인 여인은 아니지만, 이 말 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당신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의 말에, 그녀는 우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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