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71화 (47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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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견희.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요?"

"천마가 죽었대."

"......."

사공희는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눈앞에서 야무지게 생선의 뼈와 살을 바르는 흑발의 여인을 보았다.

"시아 아버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양반, 무슨 의도로 죽었다고 하는 걸까?"

천마의 딸, 소공녀 이시아는 생선의 가시를 젓가락으로 전부 발라냈다.

"죽지도 않았을텐데."

젓가락에 내공까지 깃들게 하여 생선을 바르는 그녀의 손길은 바야흐로 천마분골착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그야 당연하지. 걔가 우리 아빠 죽였으면, 그 놈은 나한테 죽어."

"...그렇긴 하죠."

사공희는 쓰게 웃으며 이시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걸 모른 척 했다.

"상공은...아마 많이 늦으시겠죠?"

"응. 천산에서 소식이 전해져왔어. 애들 말로는...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더라."

"그럼 일단 살아는 계시네요."

"그러니까."

절벽 아래 사람이 떨어지면 십중팔구는 죽는다. 즉, 일~이 할 가량은 살기도 한다는 말이다.

"다행이다. 과부가 될 뻔 했어요."

"나랑 싸우자는 거지?"

"설마요. 몸 험하게 쓰지 말랬어요. 무공 수련도 전부 어검술로 하는데 제가 시아랑 어떻게 싸워요?"

"얼굴에 표정이나 바꾸고 얘기하지."

사공희의 능글맞은 미소에 이시아는 손사레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먹어요?"

"괜찮아. 원래 딱 아쉬울 만큼 먹어야 배부르게 먹는 법이지. 잘 먹었어. 이 정도로 잘 구울 줄은 몰랐는데."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성장을 하죠."

"...그럼 나는 사람이 아닌가?"

이시아는 마당 한 켠에 버려진 탄 잿더미를 보며 한탄했다.

"후우. 어떻게 3년 넘게 발전이 없지…?"

"괘, 괜찮아요. 상공이 말씀하시길, 시아는 안방에서 천마무게잡기만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뭐만 하면 천마래. 그럼 저거는 천마어육염상이야?"

"......어육말고 그릇도 같이 태워버렸으니까 어육은 조금."

"어휴. 됐어. 그래, 요리에 발전이 있어서 좋으시겠네요. 그래도…으흐흐."

이시아는 몸을 슬쩍 돌려 웃었다. 감히 사공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시아는 그간 충분히 더 자랐다.

"나도, 분명히 발전하고 있으니까."

아아. 8에서 9로 늘어나는 건 크게 늘어난 것 같지 않으나, 1이 2로 늘어난 건 무려 '두 배'나 늘어난 셈.

"우리,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치?"

"당연하죠."

호북에 있는 동안, 이시아의 중단전은 상당한 성장을 보였다. 나머지는 화경에 올라 상단전을 완전히 여는 것 뿐.

"살면서 누군가를 상대로 잠깐 헤어지는 건데 이렇게 아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처음이야."

"그러니까요. 연이가 팽가로 갈 때도, 밤에 부엌에서-"

"누가 울었어?!"

"...울었다고는 아직 얘기 안했는데."

이시아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사공희의 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튕기듯 쳤다.

"그거 말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알지? 걔가 떠난 날, 네가 침대에서 네 가슴 한 손으로 들어올리고 그 끝을 입으로-"

"시아,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사공희는 이시아를 가슴으로 품었다. 강제로 목이 끌어당겨진 이시아는 사공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수, 숨 막혀…!"

"안 죽어요. 상공은 일각 넘게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신 때도 있는 걸요. 시아 엉덩이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제 가슴은 잠깐이지만 시아 엉덩이는 시도 때도 없잖아요."

"푸하, 그거랑은 다르지! 여기다가 얼굴을 박지는 않잖아!"

"...그럼 비겼다고 치죠."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키 차이는 나고 있지만, 둘은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손을 맞잡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또 언제 만나게 될 지."

"용봉지회가 끝나고 난 뒤가 아닐까. 그 전에 여기를 들린다면 좋겠지만…."

이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사공희를 비웃었다.

"용봉지회 전에 만나면 분명 만삭이 되어있을텐데, 누구 속 뒤틀리는 꼴 보고 싶어?"

"어머나. 그런 의도는 아닌데."

"누가 아니야? 화경으로 오르는 것보다 아이 가진게 더 기쁘면서."

"........"

사공희는 지긋이 웃으며 이시아의 손을 꾹 잡았다.

"분명 시아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뭘?"

"임신. 상공의 아이를 함께 기르는 거예요."

"무당파 엄마로부터 배운 천마라. 재미있겠네. 그럼 나는 차기 무당파 장문인에게 천마신공을 가르치면 되는 건가?"

"음...우아함과 기품?"

"하. 말은."

이시아는 피식거리며 웃었다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손에 걸고 있던 외투를 뒤로 펄럭이며 걸쳤다.

검은 장포.

그녀가 처음 호북에 왔을 때와 같이, 이시아는 마교의 소공녀다운 옷을 입었다. 천가장에서 지내며 입었던 월녀복이 아닌, 마교의 소공녀로서의 복장을 갖췄다.

"다녀올게."

"네. 혹시 천산에서 상공을 뵙게 된다면 안부전해주세요. 천가장에서 변하는 건 제 배 밖에 없다고."

"얼마든지. ...정말 옆에서 안 도와줘도 되겠어?"

막 밖으로 나가려던 이시아는 발걸음을 돌렸다. 사공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밖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이런 거로 발목잡기 싫어요."

"발목을 잡는게 아니라…."

"사월 언니도 있고, 또 현타 사숙도 있으니까요."

"......."

만약, 천마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않았다면 이시아는 호북에서 계속 힘을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력이 아니라 정치력.

천마신교에서 차기 소천마로서 적합한가에 대해 증명하기 위해, 이시아는 마교로 잠시 떠나야했다.

"가는데 한 달, 다시 하북으로 가는데 한 달. ...하북에 빨리 갈 수 있으면 가도록 노력할게."

"네. 저도...혹시 하북에 가게 된다면 팽가에서 기다릴게요."

"팽가. 응, 약속이야. 언젠가...거기서 만나자."

"어디요?"

"어디긴 어디야. 침대지."

"...그렇네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시아."

"나도야. …...안녕, 희 언니."

"어머."

이시아는 바로 등을 돌린 채 걸었다. 그 속도와 움직임은 분명 천마신공까지 사용한, 천마군림보였다.

"...언니?"

"언니이이이이."

"소공녀가 언니라...이건 귀하군요."

"시, 시끄러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여인은 쿡쿡 웃으며 소공녀의 뒤를 따랐다.

"달릴 준비나 해."

염마, 빙마, 검마. 비천삼마와 더불어 소공녀를 따르는 비천여삼마. 이들만 합쳐도 십마 간의 대결은 소공녀의 승리다.

"천마신교로 돌아가면...그 때부터는 전쟁이니까."

"도착하고 용봉지회에 출전하기 전까지 소천마의 기반을 마련해야한단 말씀이시죠? 후후, 얼마든지요."

"최선을 다해 지지하겠습니다, 소천마."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그래도 천마신교를 대공자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요."

"그래."

이시아는 손을 가볍게 털었다.

"가자, 천산으로."

네 명의 마인은 천산을 향해 말을 달렸다.

* * *

"다들 가셨네요."

아무도 남지않은 천가장. 홀로 남은 사공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매일매일이 북적거리던 천가장은 이제 없다. 독고연은 먼저 하북으로 떠났고, 이시아도 잠시 고향으로 떠났다.

천가장이 이렇게 고요했던 날이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견희."

사공희의 뒤에서 흑발의 여인이 다가왔다. 금안을 반짝이는 여인, 제갈선은 사공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괜찮아요. 잠깐일 뿐이니까."

"네. 잠깐만 이별일 뿐인데...엄청 슬프네요."

사공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곳이 이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는데."

"그만큼 견희에게 이곳이 친숙해졌다는게 아니겠어요? 그렇잖아요. 견희에게는...이곳이 집이잖아요."

"네."

사공희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누구 한 명은 반드시 집을...지켜야죠. 다만-"

"혼자서 지내면 쓸쓸하고 힘들잖아요? 제가 말 벗이 되어드릴게요."

제갈선은 사공희의 옆에 서서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었어요. 아이의 태교를 위해서라면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한다고. 슬픈 감정이 너무 깊으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선의 책으로 태교를 하는 건 조금…."

"아니, 설마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어요?"

제갈선은 황당해하며 품에서 서책을 꺼내들었다.

"동화부터 고전까지 아이들 기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은 전부 본가에서 가져왔다구요."

"아…."

사공희는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제갈선의 양부, 제갈길에게는 이제 천자문을 건드리기 시작하는 아이가 있었다. 필히 본가에 남아있는 태교 용품을 받아온 것일 터.

그런데 제갈선이 이걸 다 받아왔다고 한다면-

"오해 안하세요?"

"오해는 무슨. 제가 아이 생겨서 가문을 나가면 겉으로는 안 그래도 속으로는 쌍수들고 환영하실 걸요? 하물며 그게 천무명이라면 더더욱. 뭐...유부남에게 첩실로 들어가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시겠지만."

제갈선은 키득거리며 부채를 펼쳤다.

"그러니까 지금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나중에 저도 도와주셔야해요? 제가 그분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 희도 저를 도와주세요."

"...선."

사공희는 팔괘의 한켠, 진법의 축에 세워진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선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무섭다라. 그건 제가 하고싶은 말인 걸요."

제갈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천 공자가 돌아왔을 때, 당신의 지금 경지를 보고 뭐라고 말하겠어요?"

"......."

사공희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게슴츠레 웃었다.

"...둘째 낳자?"

"......무인이 더 좋아요, 부인이 더 좋아요?"

"당연히 부인이죠. 하지만 제가 가장 되고 싶은 사람은…."

사공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상공의 여인이랍니다."

* * *

째액, 째액.

맑은 새소리가 울린다. 주변에는 온통 청명한 기운이 가득하다.

"......."

의식이 몽롱하다. 구름 속을 떠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푸근하다. 풀벌레 소리와 따사로운 햇살은 나를 다시 눈을 감게 끔 나른하게 만들었다.

"...아."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나는 속을 다스렸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남아있는 내공의 양으로 역산해보면 대략 사흘은 내리 잠든 것 같았다.

'회복된 내공의 양은 고작 1갑자.'

천마와의 대결에서 극한까지 긁어모은 내공이 무려 6갑자에 이르렀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무려 300년 넘는 공력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내공이야 다시 쌓으면 돼.'

진신전력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내공을 회복한다면, 나의 진신전력인 3갑자까지는 충분히 회복하고 남으리라.

'휘발성 내공은 채음보양으로 다시 채우면 되고.'

내공을 회복할 수단은 많다. 시간과 여자가 충분하다면 내공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비워졌기 때문일까? 이상하리만큼 채음에 대한 의지가 사그라든다.

주변에 가득한 풀내음 속에 섞인 진정향이 나를 억누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발기 안한 아침이라니. 아기색마가 제대로 죽었군."

남근은 빳빳하게 서기는 커녕 축 늘어져있다.

혈마로서의 전력을 꺼낸 만큼 상시 발기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몇 발은 뺀(?)것 처럼 힘이 없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누가 나를 구해준것 까지는 알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옷이 이런 단정하고 정갈한 무복으로 환복되었을 리가 없으니까.

"......."

나는 슬쩍 머리카락을 뽑았다. 천마를 상대로 혈마를 꺼낸 만큼 몸 안의 혈기가 아직 남아있나싶었지만….

'검은색이네?'

손에 쥐여진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혈마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걸 뜻하는 동시에, 그만큼 내가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리라.

"누가 나를 구해줬고, 이곳으로 옮겨줬다…."

구명지은을 입었다. 아마 덕분에 폭주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테지.

그리고 그 상대는 저기 있다. 나는 멀리 절벽에 선 채 광활한 산맥을 바라보는 여인의 뒷태를 보았다.

긴 흑발의 여인. 몸에 딱 달라붙는 하얀 무복. 끝. 귀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촐한 복장은 그녀를 나타내는 대명사이기도 했다.

"아…."

하필.

방 안에서 나는 향으로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그녀였다.

"......."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녀의 뒤에 섰다. 그녀는 내 존재를 금방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름다운 목소리. 목소리 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 지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선녀와도 같은 미모.

같은?

아니다.

그냥 선녀가 눈앞에 있을 뿐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뭐지.

내가 아는 이 여자는, 이렇게 말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저기, 혹시-"

"천기를 읽었습니다. 본래의 흐름도 읽었습니다. 당신과 나의 관계 또한 읽었습니다."

"......."

그렇다.

이 여자는 '미래'를 볼 줄 안다.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도 전생의 내게 살해당했다.

"한 가지 미리 말하자면 저는 미래를 읽었을 뿐, 당사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저나 다름없지요. 그러니…."

여인, 곤륜의 현녀는 내게 포권을 취하며 상냥하게 웃었다.

"제자님, 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나 또한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스승님."

[작품후기]

해피 뉴 이어

신년기념 3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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