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68화 (468/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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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天魔)

천지가 뒤집혔다.

신강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진정으로 지진이 일어난게 아닐까 할 정도로, 두 최강자의 전투는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마인들은 금방 제정신을 차리고 대처에 나섰다.

"천마께서 또 현녀랑 싸우냐?!"

이미 그들은 현경급 최강자들의 전투를 눈으로 봐왔고, 현경급 고수의 전투로 인한 여파를 어느정도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예상외가 아닌가?

현녀는 곤륜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정체불명의 적과 생사결을, 현녀와 싸웠던 순간보다 더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마인들은 갑자기 불안감에 빠졌다.

"혹시…?"

천마는 강하다.

하지만 천마가 최강이라고 묻는다면, 최강자 후보에 올릴 수는 있어도 당당히 으뜸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신경쓰이는 요소가 많았다.

천마는 현녀를 상대로 온전히 이기지 못했고, 무림맹주와의 비무에서도 열세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천마신공의 약점을 극복한 천마라면 다르지 않을까.

"아아...아버지…!"

대공자, 주지는 산맥의 중간이 뻥 뚫린 것에 경탄했다. 말그대로 산맥의 중간이 움푹 파여있었고, 주지는 마인들을 이끌고 연이어 이어진 구덩이를 따라 달렸다.

"대공자, 설마-"

"부정타는 소리 하지 마라! 천마께서 패배하실 리가 없지 않느냐!"

천마는 지지 않는다.

천마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야한다.

만인지상의 지존이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천마의 너머, 핏빛과도 같은 적발이 산발이 되어 서있는 혈귀를.

전신의 무복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지고,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는 피에 절어 마구잡이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천마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 아아…!"

누가 이기고 졌는가는 자명했다. 주지는 신음을 흘리며 좌절할 뻔 했다.

천마가 졌다?

인정할 수 없다.

천마는 천마이기 전에 주지의 부친이다. 언제나 누구보다도 강했던 남자가, 아버지가 패배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일.

"내놓거라!"

주지는 옆에 있던 자의 활을 빼앗아 시위를 당겼다. 일말의 머뭇거림없이, 그는 혈귀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푸--욱!

혈귀는 대처도 하지 못하고 화살을 맞았다. 마인들이 경악하며 주지를 말리려고 들었지만, 주지는 오히려 앞으로 뛰며 시위를 당겼다.

퍽, 퍼벅, 퍼버벅!

화살은 혈귀의 몸 곳곳에 꽂혔다. 혈귀는 뒷걸음질 치며 천마에게서 물러났고, 주지와 마인들은 천마를 보호하듯 자리를 잡았다.

"천마시여!"

"기절하셨네! 크윽, 상처가 깊어!"

"당장 그녀에게로!!"

마인들은 호들갑을 떨며 천마를 부축했다. 이미 기절한 천마의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발이 날랜 마인들이 급히 천마를 부축하여 천마신교로 달렸다.

"네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마라!"

"......."

혈귀는 낭떠러지에 몰렸다. 주지는 다른 마인들을 통솔하며 혈귀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도망칠 곳은 없다! 네놈은-"

"......여럿이서 핍박을 하다니. 간이 콩알만한 놈이로구나. 호부 아래 견자 없다고 했거늘. 쯧쯧."

"...뭐?"

"이해는 한다. 네놈...대공자 주지."

혈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벼랑 끝에 섰다.

"좆이 작으니 혼자서 감히 나를 상대할 생각을 못하는 거겠지. 남근이 일촌인 놈과 말을 섞을 생각은 없다."

"네, 네 놈!"

"잘 있거라, 천산이여."

혈귀는 뒤로 누워버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고, 마인들은 급히 벼랑끝에 섰다.

"젠장...마영대와 추영대에 소식을 넣어! 저 놈을 반드시 잡는다!"

주지는 머리가 시뻘게진 채 외쳤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건져와!!"

주지는 명백히 화가 나있었다.

과연 그것이 부친의 패배인지, 천마의 패배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어떤 요인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 * *

절벽 아래에 급류를 따라 흐르는 폭포가 있더라.

이게 무슨 말이냐.

나는 살았다.

천마와 최후의 일격을 나누고 난 뒤, 나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머리만 보호하자는 심정으로 두 다리를 아래로 향하게 만들었고, 나는 운명에 내 몸을 맡겼다.

첨벙.

그리고 강호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를 반긴 건 메마른 땅이 아니라 급류였다. 순식간에 나를 감싸안은 강물은 중간에 폭포를 거쳐 어딘가로 흘렀다.

원래부터 있던 강이었을까? 모른다. 나와 천마가 비무를 치른 곳이 얼마나 넓은지는 몰라도, 최소한 산 두 세 개는 초전박살을 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쿨럭."

나는 강물을 토해냈다. 입 속에 비릿하게 느껴지는 혈향에 나는 내 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감을 잡았다.

"...그냥 살살할 걸."

폭혈.

전신의 기혈을 폭발시켜 잠력을 끌어올리지만, 부작용이 마치 주화입마에 걸린 것처럼 피를 토하고 근골이 망가지는 기술.

나는 그것까지 사용하며 천마 최후의 일격을 상대했다.

후회? 당연히 된다.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결코 폭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등신이 똑같이 하겠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천마와 맞붙는다고 해도, 나도 천마도 똑같이 서로의 목숨을 깎아 공격을 날렸으리라.

피하면 지는 것.

그게, 내가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고 힘을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긴 어디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혈마강림의 부작용을 억누르느라 전신의 기혈이 터져버렸다. 체력을 회복하려면 다른 이의 음기를 갈취해야하지만....

"허억, 허억...."

그럴 수 없다. 천마를 동귀어진에 가깝게 쓰러뜨린 이상, 천마신교는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다.

여기서 내가 천마신교의 여인들을 범하러 가는 즉시, 천마신교는 멸망한다. 이시아를 볼 면목이 없어지고, 앞으로 영원히 다른 여인들을 볼 수 없게 되리라.

나는 확신한다.

지금 이 순간, 좆을 놀리려고 하면 좆된다는 것을.

그러니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나의 몸이 자연히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뒤틀린 혈맥이 다시 온전한 형태로 가라앉고 제자리를 되찾을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는 절뚝거리더라도 걷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달리는 건 다소 문제가 있지만, 애초에 지금은 달릴 필요가 없다.

잠시 비바람을 피하고,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위험하네."

혹시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나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채음보양으로 쌓아온 내공을 모조리 써버리고, 진신의 내력마저 사용해버린 지금 나는 호신강기도 쓰지 못하는 상태다.

그렇다고 부족한 기를 회복할 수 있는 채음보양을 하는 즉시, 나는 진짜 색마가 된다.

사람을 간살하고, 여자를 그저 범하고 능욕하는 쓰레기같은 괴물이 된다.

사아아.

바람이 분다.

어느덧 나는 대나무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에 도착했다. 주변에 동굴은 보이지 않지만, 대나무의 향에 나는 취할 것 같았다.

이것이 자연일까.

천산에서 그렇게 대지를 흔들 정도로 싸웠는데,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인간이 무공으로 천지를 뒤흔든다고 해도, 결국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음 경지에 올라 더 넓은 땅을 부수고 파괴하더라도, 결국 그건 자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따르는 삶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결국 자연에 따르게 되는 것이 사람의 인생.

그래서.

"......성교하고 싶다."

남녀가 음양합일을 이루고 태극을 이루는 자연의 섭리를 당장이라도 실행하고 싶다. 기적같이 내게 내공을 나눠줄 수 있는 여인이 나타나 나를 치료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아무나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상태로 범했을 때, 분명 배가 파열될 정도로 쑤시고 박았을 것이다. 무인으로서 쌓은 경지가 삼류가 될 때까지, 진신전력을 긁어냈을지도 모른다.

그게 걱정되어 나는 누구와도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다. 수마는 나의 여인이 아니고, 수마가 나를 배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나를 죽이지 않고 뒤쫓아오지 않는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만약 그녀가 추격대를 편성하고자 했다면, 나는 지금쯤 마교인들의 추적을 받았으리라.

아니.

어쩌면 마교인들 자체적으로 나를 쫓으려고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천마에게 패배를 안겨준 자를 잡기 위해.

또는 죽여서 자신이 명예를 가지기 위해.

만약 강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의 흔적을 쫓는 추격대가 진작에 나를 덮쳤으리라.

"...그러면 안 되는데."

눈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 지 정말 모른다. 그래서 최대한 의식을 유지하며-

"...젠장."

주변에 어두운 기운이 자욱하게 깔렸다. 나는 남은 기혈을 모두 내 왼팔에 둘렀다.

"누구냐."

"마영대(魔英隊) 4조 조장."

"......추양귀(追陽鬼)?"

"나를 아는가?"

익숙한 목소리다. 전생에, 추마귀 시절 그나마 나를 사람답게 대해주던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살을 섞은 적은 없어도, 최소한 말은 예의상 섞어주던 여자.

"조장, 저 자는...!"

"그래.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찾았다, 붉은 머리의 혈괴(血怪)."

"...이젠 혈괴인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은 기력을 짜내어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힘을 끌어올렸다.

"누구냐."

"4조 조장, 추양귀."

"네 배후는 누구냐."

"...천마께서 보내셨다."

"킥."

지금쯤 쓰러져서 생사를 헤매고 있을 양반이 나를 쫓는 추격대를 편성한다? 불가능하다.

"대공자군."

"......."

추양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의 침묵에 더는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죽이겠다."

"오만하군. 그 상태로 우리를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용이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어찌 용이 승냥이 따위에게 잡힐 수 있을까."

"...놈."

주변에 점차 검은 인영들이 늘어나는게 느껴진다. 여전히 눈은 보이지 않지만, 어차피 나에게는 단 하나의 감각만 있으면 된다.

"...역린안(逆鱗眼)."

혈안이 된 용안의 힘을 단 하나의 광경으로 바꾼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불안정하게 들끓기 시작하는 혈기를 오히려 다잡지 않았다.

"크르르...."

오히려 혈기에 몸을 맡겼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전부 살아 움직이는 핏덩이들 뿐.

"네, 네 놈...! 눈이...!"

"아아, 이거? 신경쓰지마라."

아마 보이기에는 눈 자체가 전부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일 터. 눈동자는 천마신공으로 붉게 물들고, 흰자위는 그냥 전부 충혈된 거지만, 보이기에는 다소 끔찍하게 보이리라.

"선착순...13명."

"뭐?"

"빨리 와라. 이 이상을 넘어가면...."

뚜둑.

"나도 나를 주체못해서, 손대중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르니."

속에서, 무언가 심지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 쳐라-----!!"

마인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뛰어들었다. 개중에는 익숙한 무공을 쓰는 이도 있고, 익숙한 눈매도 있었다.

"...열 셋, 가능하려나."

이성을 유지한 채, 안 죽이고 끝낼 수 있을런지.

철컥.

나는 운명에 맡겼다.

* * *

여인은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자욱한 대나무향 사이로 느껴지는 알싸한 피냄새. 여인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곳을 향해 발소리 없이 걸었다.

"......."

그곳에는 괴물이 있었다.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달려든 적들을 모조리 짖이겨놓은 괴물이 있었다.

스릉.

여인은 검을 뽑아들었다. 여차하면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 무거운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그러나.

여인은 금방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주변에 가득한 죽음의 기운은 대나무숲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체도 아니었다. 그저 강력한 일격에 정신을 잃고 기절해있을뿐, 바닥을 나뒹구는 이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대나무숲을 가득 채운 사자(死者)의 기운은 쓰러진 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괴물. 전신에 피를 뒤집어 쓴 괴물의 것이었다.

"...처음만났다고 해야할 지, 다시 만났다고 해야할 지."

여인은 복잡한 얼굴로 검을 내렸다. 괴물은 여인의 목소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말 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터벅.

괴물은 여인의 앞에 섰다. 기억과는 다른 큰 키에 여인은 괴물을 올려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생이 정말 많았구나."

"......."

머리칼 사이로 비친 적안이 살포시 감겼다. 충혈되다못해 실핏줄이 터질 것같던 괴물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툭.

괴물은 여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다. 여인은 어색한 손길로 괴물의 등을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비록 나는 그녀가 아니지만...대신 말해줘도 되겠지."

여인은 괴물의 피눈물이 멎을 때까지, 등을 토닥이며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승님."

괴물은, 인간의 말로 흐느끼듯 죽어갔다.

"잠깐...쉬어도...."

"물론."

여인의 말에 괴물은 웃으며 기절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잠들지 못했던 혈마는 여인의 품에서 안식을 찾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푹 쉬거라.... 사랑하는 나의 제자야."

여인은, 괴물을 제자라 칭했다.

[작품후기]

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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