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59화 (45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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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여자

충격을 받은 천무명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독고연은 팽유월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산책에 나섰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하북팽가의 장원 내부를 넓게 걷는 정도였지만, 독고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독고연이다...."

"히, 히익?!"

독고연은 조금만 낯선 사람이 나타나도 금방 겁을 먹었다. 옆에서 팽유월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금방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을 지도 모른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조금,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독고연의 표정은 더할 나위없이 창백해져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혹시나 누가 올까봐 두려워했고, 그게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비켜서게 만들었다.

"일단 저기 가서 쉬어요, 소저."

"네, 네...."

독고연은 팽유월의 부축을 받아 장원 내의 작은 정자에 앉았다. 가쁜 호흡을 다독이며, 그녀는 심신의 안정을 취했다.

"아직 밖에 나가기에는...미안해요, 독고 소저."

"아니에요. 계속, 계속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독고연은 음울한 눈빛으로 팽유월에게 물었다.

"팽 소저. 저는...어떤 사람이었죠? 사람들이 아는 독고연은...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죠?"

"잠시만요. 무리하지 마세요. 함부로 기억을 되찾으려고 했다가는...."

"알아야겠어요."

독고연은 팽유월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했고, 여전히 불안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제가, 독고연이 누구였는지...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안 그러면...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불안에 가득찬 독고연의 자색 눈동자에는 작지만 아주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분이 계셔요. 그런데...저는 그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어요...!"

"독고 소저. 진정하세요."

팽유월은 독고연을 안으며 토닥였다. 독고연은 팽유월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소저."

팽유월은 울 것 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천 공자를...믿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천 공자를요...?"

"예. 그분의 말을 믿으세요. 그분은...그 지옥에서 소저를 구해온 분이니까요. 천하 누구보다도...어쩌면...소저는 천 공자를 믿으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 * *

독고연은 천무명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마음을 다잡으시오, 천 소협."

나는 나와 일면식은 없지만 인연이 깊은 남자, 무림맹의 군사 제갈길과 따로 만났다. 그는 나를 위로하고자, 그리고 나로부터 정보를 얻고자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원래는 내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인사부터 해야하나, 그대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 이야기하는 것이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애써 담담히 그에게 내 속내를 털어넣었다.

"독고 소저가 차라리 기억을 못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제갈길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만 동시에 슬픈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군사라는 입장 상 내게 질문을 해야하는 건 어쩔 수 없으면서도, 나를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보였다.

"부디...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시오."

"물론입니다. 군사님."

나는 그의 앞에서 '모든 진실'을 밝혔다.

* * *

추신.

무림맹주께.

먼저, 본인 제갈길은 천무명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를 파악했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에게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소. 이 아래는 본인이 파악한 내용이나 유추한 것이 첨언되어 있으니, 부디 판단은 맹주에게 맡기겠소.

천무명은 빙색마인의 거처를 발견하여, 독고연을 구했소.

빙색마인의 거처에 대한 조사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 바, 굳이 그에 대한 정보는 담지 않겠소.

빙색마인에게는 세 명의 수하가 있는 듯 하오. 모용란 소저를 곤경에 빠뜨린 여인을 기억하시오? 그 자가 바로 빙색마인의 하수인이었소.

그녀를 바탕으로 빙색마인을 추적한 결과, 독고 소저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하오.

문제는 그녀의 상태였소.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실어증에 걸려있었고, 아마도 빙색마인의 아이를...

...

...그리하여, 천무명은 다른 두 명의 여인에게 쫓겼소. 독고 소저에게 서찰을 쥐여주고, 그녀가 혹시나라도 글을 읽게 될 수 있다면 그걸 보고 도망치기를 바랐다고 했소.

맹주!

본인은 이 일에 대해 더이상 추궁하고 싶지 않소. 천무명은 내 딸의 은인인 동시에, 독고 소저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자가 아니오?

그런 자에게 이 이상으로 추궁하는 건 상처를 후벼파는 일이오.

맹주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소?

지금은 천무명에게 맡깁시다.

그녀는 지금 그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상태요. 마치 그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말이요.

그대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믿고 맡깁시다.

독고 소저가 다시 검희봉으로서 일어날 수 있게.

요동에서 들은 대로, 천무명은 신의의 제자였소. 독고소저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던 만큼, 필히 독고 소저를 구할 방도를 찾아낼 것이오.

이 제갈길도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보리다.

부디 무운을 빌겠소.

맹주가 직접 광동으로 내려가는데 남해의 악적들은 감히 중원에 진출하지 못할 것이오.

맹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대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오. 한 번 겪었던 일을 또다시 겪는 것 만큼 아픈 일이 없으나, 그들은 처음으로 겪는 일이 아니겠소?

맹주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한 곳 뿐이오.

빙색마인!

빙색마인 본인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얻지 못했소. 만약 천무명이 빙색마인을 직접 조우했다면 필히 빙색마인에게 살해당했을테지.

그러니 지금 당장은 내가 하북팽가에 머물며 독고 소저를 지키겠소이다.

이 제갈길이 목숨을 걸고 지킬 터이니, 부디 마음을 놓고 다녀와주시오.

추신.

하오문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연락을 취하겠소.

독고 소저의 귀환에 대해 승냥이처럼 달려들테니, 이쪽에서 응당 그에 준하는 미끼를 던지도록 하겠소.

* * *

늦은 밤.

천무명은 직접 죽을 들고 독고연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 공자…."

"누워계시오."

독고연은 침상에서 바로 일어나 직접 죽을 받으려고 했으나, 천무명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독고연을 제지했다.

"먹여드리리다."

"......."

남자가 여인에게 식사를 떠먹인다? 호사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차마 남들의 앞에서 대놓고 보여줄 수는 없는 광경이다.

천하에 그 어떤 남자가 직접 여인을 위해 죽을 떠먹여주겠는가!

"우, 으으…."

하물며 이전에 연인과도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존재라면 더더욱.

"후, 후."

천무명의 손짓은 자연스러웠다. 적당한 만큼의 양을 덜어 입김으로 죽을 식힌 뒤, 익숙한 것처럼 독고연에게 숟가락을 뻗었다.

"아아."

"...아앙."

독고연은 조심스레 천무명이 건넨 숟가락을 물었다.

맛있다.

죽이 왜 이렇게 맛있나 싶었다. 자신의 입에 딱 맞는 맛이었고, 독고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환자에게 단 맛은 좋지 않으나...역시나."

천무명은 죽을 다시 퍼올리며 쓰게 웃었다.

"입 맛은, 다행히 여전한 듯 하오."

"......."

독고연은 순간 울컥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이런 어린 아이와도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분명 천무명이 회상하는 그녀 또한 자기자신이건만, 왠지 모르게 스스로에게 질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나를 상대가 그리워한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상대는 애틋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만약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고 한다면, 지금의 '내'가 천무명이 기억하고 있는 독고연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천 공자."

"불안해하지 마시오."

천무명은, 그런 독고연의 불안감마저도 바로 알아챘다. 그는 죽을 식탁위에 두고 독고연의 손을 맞잡았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좋소. 우리의 인연은 지금부터 새롭게 쌓아나가도 되니."

"...공자가 생각하시기에."

독고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독고연은, 공자를 사모했나요?"

"......."

천무명은 침묵했다. 독고연은 그의 침묵에서 금방 답을 알아냈다.

"...풋."

"웃지 마시오."

남자란, 때로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속내를 금방 알 수 있는 법이다. 독고연은 천무명의 표정에서 쑥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면 다른 걸 물어볼게요. 공자는...독고연을 사랑했나요?"

"아니."

천무명은 칼같이 대답을 잘랐다. 그 말에 독고연은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빈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그의 성정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토록 단칼에 자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 아아…."

독고연은 기억을 떠올렸다.

천무명의 근처에는 벌써 세 명이나 되는 육봉이 인연을 쌓았다고 했다.

무공도 뛰어나고 배경도 뛰어난 그들에 비해, 이제 천자문과 기본 심법을 익혀나가는 독고연은 비교를 할 수 조차 없었다.

"그, 그렇군요. 저 혼자...그녀 혼자 짝사랑을 한 거군요…."

독고연은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을 스스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천무명의 말에서 자신이 차인 것마냥 너무나도 슬펐다.

"...농담도 못하겠군."

천무명은 독고연의 손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독고연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지금도, 사모하고 있소."

"......네?"

"사랑했다고 하니, 조금 심술이 나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변심한 것 같지 않소?"

천무명은 뚱한 얼굴로 궁시렁거렸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도 마음이 변함이 없는데...꼭 그렇게 얘기하니...크흠."

"아…."

감정이 바닥을 쳤다가 다시 하늘 높이 치솟는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독고연은 천무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죄, 죄송해요…."

"사과할 건 아니오. ...크흠. 나도 사과하리다. 괜한 오해를 일으켰군."

"아, 아뇨. 제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사과를 하며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프흣."

독고연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부친조차도 몸이 절로 꺼리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까?

기억은 하지 못해도,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게 아닐까.

독고연은, 이 남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공자.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엇이오?"

"제가 모르는 독고 소저의 이야기를...해주시겠어요?"

"......."

천무명은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독고연은 천무명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자신을 향해 당겼다.

"알아요. 공자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사람이 기억을 잃어버릴 만큼 충격적인 일이 있었겠죠. 하지만...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좋소. 알려주겠소. 다만...우선 치료부터 먼저합시다."

천무명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둔 향을 피웠다.

"이야기는 심신의 안정을 취한 다음이오."

꽃향기와도 같은 향에 독고연은 꽃밭에 누운 것 마냥 몽롱해졌고, 천무명은 다시 독고연의 옆에 다가갔다.

"이걸 봐주시겠소?"

"이건…."

독고연의 앞에는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삼매진화와는 사뭇 다른 듯한 불꽃은 독고연을 말갛게 비추고 있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누워주시오. 그리고 마음의 긴장을 푸시오."

천무명의 말에 독고연은 순순히 따랐다. 베개에 머리를 이고,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으며 눈을 감았다.

"심신의 안정을 지키며 들어주시오. 중간에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기억이 되돌아오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내 최대한 조심하리다."

"네…."

"방금 전의 불꽃을 기억하시오."

독고연은 검은 시야 너머에서 밝게 타오르는 불꽃을 떠올렸다.

"그리고...안심하시오. 오늘밤은 내가 곁에서 그대를 지켜주리다."

"......."

독고연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적혈태양(赤血太陽)이 떴습니다. 색마부인은 고개를 듭니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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