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을 잃은 여자
무림맹주가 하북팽가를 떠나고 난 이틀 뒤.
팽가의 방계, 팽하염은 홀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밤산책을 나섰다.
사랑하는 아내는 독고연의 고통에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졌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여인조차 공감하기 어려운 경험을 한 독고연의 아픔에 자신의 아픔인 것 마냥 아파하다가 쓰러진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마음이 꺾이면 무너지기 마련.
팽하염은 홀로 밤 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천무명은...살아있을까?"
과연 그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독고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쩌면 천무명 한 명 뿐일지도 모른다.
천무명을 만나면 기억을 되찾을 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천무명이 살아서 어딘가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독고연의 회복을 바라며.
검희봉의 부활을 바라며.
그리고 독고세가가 다시금 힘을 되찾고 무림의 팔대세가로 우뚝 솟기를 바라며.
독고연이 기억상실만 잘 해결된다면, 분명 독고세가는 번영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 기억을 되찾는게 꼭 필요한 걸까?"
팽하염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는 바로 잃어버린 기억 그 자체였다.
그의 아내는 말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라, 머릿속에서 스스로 지워버린 기억일 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잊어버리기도 하지…."
독고연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독고연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기억을 묻어뒀다면, 그걸 강제로 열어젖히는 것이 독고연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어느쪽이든 아내는 독고연을 너무나도 불쌍히 여겼다.
너무나도 선녀처럼 아름다웠기에 벌어진 불상사.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기억을 잃기 전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을 뿐.
팽유월의 아이, 월아에게 보이는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독고연은-
"......응?"
빈민가 근처.
팽하염은 웅성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 몰려있는 군중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이고, 의원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죽은 것 같기도…."
"무인들에게 습격을 받은 것 같아…. 괜히 건드렸다가는 우리까지 피를 보는게…?"
"그만!"
팽하염은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급히 앞으로 달려가, 그들이 살피고 있던 이를 보았다.
"헉…!"
훤칠한 청년은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다. 무복은 곳곳이 찢어져있었고, 옷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말라붙어있었다.
부우욱!
팽하염이 등의 옷을 손으로 찢으니, 그곳에는 붉은 손바닥 자국이 명백하게 남아있었다.
"설마 이건…."
"뭐, 뭡니까?"
"장법인 것 같은데, 나도 자세히는…."
팽하염은 긴가민가 한 얼굴로 다른 곳을 살폈다. 다행히 청년은 아직 살아있었고, 갸냘픈 숨이나마 간신히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어서 빨리 의원을-"
덥썩.
아래에서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팽하염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히익?!"
나름 일류 고수인 자신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손이었다. 죽어가는 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손길은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를, 팽가에 데려가주시오…."
"패, 팽가…?"
청년의 눈에는 강렬한 의지가 가득했다.
"팽가에...그녀가 있다고 들었소."
앞머리가 피에 절어 덕지덕지 들러붙어있음에도, 그 아래 가려진 청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부디…."
털썩.
청년은 의식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팽하염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그저 팽가를 찾아야한다는 일념만을 보인 청년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자신의 본능이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망상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실제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어느쪽이든 일단 사람은 구해야지."
팽하염은 청년을 등에 업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보이는 것보다 다소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기다리시오, 청년!"
팽하염은 바로 팽가로 향했고, 마침 밖에 나와있던 팽도황의 도움을 받아 청년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오?"
"...무명입니다. 천무명."
팽하염.
그가 구한 청년은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 * *
팽가는 지극정성으로 천무명을 치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팽유월이 직접 붙어 천무명을 치료했고, 천무명이 팽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바로 무림맹으로 전해졌다.
"내 금방 가겠네!"
"안됩니다, 맹주! 지금 광동에서...!"
"뭐? 크, 크윽...!"
그러나 무림맹주는 바로 하북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오히려 하북에서 먼 곳을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 광동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는 그걸 막으러 가야만 했다.
"천무명인 건 확실한가?"
"필체를 받았습니다. 서찰과 똑같습니다. 정황도 파악했습니다."
천무명 왈.
독고연의 흔적을 쫓다가 용 모라는 남자와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을 납치하려고 든 빙색마인의 수하를 상대로 간신히 탈출했다.
"납치? 겁간이 아니라? ...크흠, 그래. 납치로 하지."
천무명은 빙색마인의 수하를 상대로 도의를 주장했다. 그녀는 천무명의 의기와 호협에 감동하여 빙색마인을 배신했고, 빙색마인의 거처를 알려주고 어딘가로 숨었다.
"빙색마인이...이곳에 있었다고?"
"참으로 간이 큰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우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흔적을 발견하는대로 즉시 정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남, 무림맹의 바로 위!
여차하면 황하로 도망칠 수 있게 기반을 마련해놓은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 진법을 설치했고, 그곳을 자신의 얼음기둥으로 보호하고 있었다고 했다.
천무명은 그곳에서 독고연을 구출했다.
"빙색마인에게는 두 명의 마녀가 더 있었다고...?"
"예. 천무명은 그 둘에게 쫓겼습니다."
빙색마인과 같은 백발의 빙공 여고수, 그리고 발이 날랜 암기술의 고수. 천무명은 빙색마인이 오기 전 두 여인의 추격을 떨쳐내며 독고연을 하북으로 보냈다.
"왜 하남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던가?"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아니, 애초에 어디론가 보낼 생각이 없었답니다. 그저 추격대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도망치라고 했다더군요."
"그럼 연이가 팽가에 간 이유는...?"
"...아마 팔대세가라는 것에 대한 본능아니겠습니까? 비록 기억은 잃었지만, 팔대세가라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독고연은 도망치고 도망쳐 하북으로 흘러들어왔고, 천무명도 독고연을 찾아 하북에 들어왔다.
"추격자들은?"
"둘로 나뉘게 되어 간신히 떨쳐냈다고는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듯 합니다."
"팽가에 추색살 단원들을 좀 더 보내도록 하지."
"예? 하지만 그러면 광동의 일은...."
"내가 좀 더 열심히 뛰면 되잖나!"
무림맹주는 후일을 기약하며 광동, '해남'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달렸다.
광동에 도착하면 천무명이 독고연의 기억을 되찾게 했다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낯선 천장이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있고, 내 전신을 찌르던 격통은 어느새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일어나셨나요?"
내 옆에는 청초한 미녀가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그녀는 다소곳하고 정숙한 복장으로 나를 맞이했다.
"여기는...."
"하북팽가에요, 천 공자."
"팽가...혹시...."
"인사드립니다. 팽유월이라고 해요."
팽유월.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팽가 가주님의 따님이시군요. 송구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아니에요. 모시게 되어 영광인 걸요. 그보다...."
팽유월은 긴장한 얼굴로 내 몸에 손을 올렸다. 소복 사이로 뻗어진 손길은 내 가슴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다친 부위는 치료를 해드렸지만, 여기의 상처는 치료해드릴 수 없었어요."
"괜찮소. 그건...."
나는 팽유월의 손을 맞잡았다.
"소저의 마음씨 덕분에 조금이나마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소."
"감사해요. 그런데 소저라...푸흡."
팽유월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한 아이의 어머니랍니다."
"허어...? 시, 실례했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후후, 그렇게 봐주셨다니 고마울 따름이에요."
팽유월은 몸을 일으켜 무복을 가져왔다. 곱게 다려놓은 흑의는 내가 입고있던 것과 사뭇 달랐다.
"환복을 도와드릴게요."
"아니,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소이다."
"팔을 크게 다치셨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으음."
실제로, 내 팔에는 붕대가 휘감겨있었다. 나는 묵묵히 팽유월의 배려를 받기로 했고, 팽유월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가요. 당신을 기다리는 여인이 있으니까."
저벅, 저벅.
나는 팽유월의 인도를 받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변에는 많은 팽가의 식솔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금방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새근, 새근.
"아아...!"
안에서 옅게 숨을 쉬는 소리에 나는 안도감이 절로 나왔다. 그 수많은 굴욕을 겪으면서도, 생사를 몇 번이고 넘나드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여인이 저곳에 있다.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공자."
"...아니오."
나는 안으로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무사히 살아서 도망친 것으로...만족하오. 나는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이 없는 자요."
"공자."
팽유월이 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문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나로 인해...독고 소저는 그 모진 고통을 겪게 되었소. 내가, 내가 원흉이란 말이오...."
"그렇지 않아요!"
팽유월은 나를 향해 호통치며 내 얼굴을 붙잡았다.
"그건, 결코 당신 탓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구한 영웅이에요! 당신이 목숨을 걸고 구한 여인이라고요! 그런데 왜 당신이 죄책감을 가지는 거죠?!"
"......."
나는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팽유월의 눈은 단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독고 소저를 구할 수 있단 말이에요. 아직...그녀는...."
팽유월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기억을, 잃었단 말이에요...."
"뭐...?!"
순간.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팽유월로부터 몸을 돌려 문고리를 열어젖혔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연!!"
"아...."
안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병약한 백발 여인이 겁먹은 채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혹시...천무명...?"
"연, 나를 알아보시겠소? 연!"
"......."
나는 독고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오.... 혼자서 도망치게 하는게 아니었소...!"
"그...."
독고연은 내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공자의...아마...공자께서 주신 그 서찰 덕분에, 저는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미안해요."
뚝, 뚜둑.
"저는, 저는...."
독고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아, 아아...!"
억장이 무너져내린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차라리 나는 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독고연의 보라색 눈동자는 나를 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소."
나는 독고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괴로움, 고통, 그 모든 아픔을 잊어버리시오. 차라리 그게 그대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일테니."
"공자...."
독고연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저는...다른 건 모르겠지만...확실한 건...."
독고연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울며 웃었다.
"아프고...괴롭고...힘들겠지만, 반드시 되찾아야할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아니오, 그건-"
"저를...치료해주시겠어요?"
"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공자를 보고 나서부터."
독고연은 반달처럼 휘어진 눈꼬리에서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가...너무 아파요...."
독고연은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울었고, 나는 그녀를 내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죽을 것 같이...아파요...."
"...걱정마시오. 내가 꼭 치료해드리다."
나는 독고연이 안정될 때까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독고연은.
색마에게 납치되어 색마의 부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천무명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작품후기]
힌트 : 색마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