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56화 (456/568)

--------------------

기억을 잃은 여자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금방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무림맹주의 딸, 독고연의 귀환!

용봉지회를 앞에 두고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독고연의 귀환은 분명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내지르게 할만한 일이었다.

납치당해 죽은 줄 알았던 딸이 돌아왔는데 이 얼마나 기쁜 일이랴!

“어떻게 구했대? 갑자기 하북에서 나타는 이유는 뭐고?”

“나야 모르지.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독고연이 들고 있는 서찰은 누가 썼는지조차 내용이 나와있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쓴 자의 필체는 정해져있는 법!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불과 며칠 전에 독고연이 쥔 편지의 필체를 확인했다.

바로 모용세가에 보내진 편지에서, 무림맹은 천무명의 필적을 확보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금방 진실을 이끌어냈다.

“천무명이 독고연을 구했다!”

가는 곳마다 육봉과의 인연이 끊이질 않는 존재.

천무명이라고 하는 자의 행적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북에서는 와백봉 제갈선을.

사천에서는 빙백봉 유설라를.

요동에서는 연희봉 모용란을.

그리고 이제는 검희봉 독고연을 구한다?

사람마다 아는 정도는 달랐지만, 나름 귀가 트인 이들은 천무명의 행적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인을 구하기 위해...설마 빙색마인을 상대로 발을 묶고자 한 건가?”

“그건 말도 안 돼! 빙색마인은 모용세가를 습격한 고수! 그런 존재를 어떻게 천무명같은 자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여인을 위해 아미파를 상대로도 홀로 들어간 남자야. 빙색마인을 상대로 목숨을 걸었다면....”

“아아...! 천무명!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천무명이 독고연을 구하여 하북으로 보냈으나 그 뒤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의협...!”

색마로부터 여인을 목숨 걸고 구해낸 자.

만약 그가 여인을 구하고 죽는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영웅적인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 저를 위해서 목숨을...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천 공자.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남자를 생각하며, 독고연은 눈물을 삼킨다.

만약 그랬다면, 수많은 강호 인들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무덤 앞에 온 것이오?

-아, 가가....

-그대를 질책하려는 것은 아니오. 구명지은을 입은 분이니, 나 또한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니...그의 마음을 생각하여,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그의 몫까지.

-아아, 가가...! 저는...!

강호인들은 상처입은 독고연의 마음을 달래며 독고세가의 사위로 들어가 손자까지 무림맹주로 만드는 상상을 했다.

“독고연 여전히 예쁘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그럼 뭔데? 색마에게 당한 거? 그건 괜찮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며 접근하면 되니까!”

“...기억상실이라는데?”

하지만 독고연의 상태는 사뭇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글을 읽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무공조차 쓰지 못한다. 자신이 독고연이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심지어 아버지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

“뭐?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아, 그로 인해 기억상실이 걸린 듯 하다더군!”

“...그럼 뭐야. 예쁘기만 하고 끝이라는 거 아닌가?”

강호인들은 독고연을 상대로 펼치던 음습한 상상의 나래를 접었다.

아무리 무림맹주의 금지옥엽이라고 한들, 무공도 기억도 자신도 모두 잃어버린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일까?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내가 아니라 여색을 위해 들이는 경우 뿐이리라.

“독고세가는...사실상 끝났군.”

방계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선조의 사생아나 숨겨진 혈통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다.

심지어 독고자영 본인도 데릴사위로 독고세가에 들어가 성을 바꾼 경우라, 독고세가의 핏줄은 오직 독고연에게만 이어져있었다.

“독고세가가 쇄락한다면...분명 무림맹주 자리가...?”

“벌써부터 논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독고자영이 이 일을 계기로 생각이 바뀔 지도...?”

강호의 여러 세력들이 저마다 품에 생각을 달리 하는 가운데, 독고연을 구한 하북팽가는 그저 독고연을 보살피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 기억을 잃었다면, 분명 마음이 회복되면 기억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수밖에.”

하북팽가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천무명에 대해 아는 자는 하북팽가로 소식을 전해주시오.

천무명을 찾기 위해.

다만.

독고연의 기억을 되찾을 계기가 될 지도 모르는 계기가 ‘무림맹’이 아니라 하북팽가인 이유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남자를 두려워하기 시작한-이유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인정하기 싫은 이유라 다들 모른 척 했다-독고연은 하북팽가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자신을 보호해준 팽가의 부부, 서찰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해준 팽가의 가주,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심성의껏 기억을 잃은 독고연을 보살펴주는 팽가의 여인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독고연.

그녀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팽가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 * *

“...본인은 당분간 하북과 하남을 오가며 용봉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소. 차도가 있거나 빙색마인, 또는 천무명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 바로 말씀해주시구려.”

“물론이오, 맹주.”

팽도황은 한껏 수척해진 독고자영의 손을 맞잡았다.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부디 힘을 내시오. 맹주는 백도의 희망 아니오?”

“...고맙소.”

팽도황에게도 딸이 있다. 양녀로 들인 팽유월이 아니라, 생모를 사별한 딸인 팽신혜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빙색마인에게 당했다. 철저하게 유린되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얼음기둥’을 당했다.

모두의 앞에서 범해진 건 아니지만, 모두에게 여인으로서의 가치 아닌 가치가 알려지고 말았다. 그것이 설령 색마가 측정한 값임에도 불구하고.

“맹주. 소식이 오면 반드시 알리겠소. 그러니 마음놓으시오. 만약 빙색마인이 다시 이곳으로 온다고 하면....”

쿵!

팽도황은 포권을 취하며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대가 오기 전까지, 내 전력으로 빙색마인의 발을 묶겠소이다.”

“...이왕.”

독고자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팽도황의 옛 이름을 굳이 언급했다.

“지금까지 내가 그대에 대해 많은 오해를...했던 것 같소.”

“그렇지 않소. 젊은 시절의 나는...많이 그랬지. 하지만 팽이왕은 죽었고, 이제는 팽도황이오. 새 사람이 되었지.”

둘은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미 독고자영의 주변에는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이 떠날 채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안타까운 얼굴로 독고자영의, 맹주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 마냥 안타까워했다.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연아....”

독고자영은 마지막까지도 독고연을 멀리서 지켜보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엄마아아!”

독고자영은, 어린 여아가 독고연에게 엄마라고 안기는 것을 보았다.

“엄마...?”

독고연은 어색한 손길로 아이를 안아들었다.

“엄마....”

그리고 마치 팽가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인 것마냥 끌어안았다.

“내가 너의...엄마니?”

“응! 예쁘면 엄마! 엄마 예뻐!”

그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일그러졌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엄마, 울어?”

“으응, 아니야. 아니야....”

독고연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내 딸....”

“독고 소저....”

“유월 언니.... 미안해요. 아닌 거 아는데, 아는데....”

독고연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똑 떨어뜨렸다.

“뭔가를...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 것 같아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걸...!”

“.......”

팽유월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독고연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한참 아이를 안았다.

“......설마. 아니, 그건....”

“맹주, 혹시...?”

“그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야 하오. 만약 그렇다면....”

그 모습에 독고자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군사.”

“예.”

“빙색마인을 찾는 즉시,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 내게 알려주시오.”

독고자영은 고저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반드시 그 자의 목을 베어...아니 머리를 몸에서 뜯어버릴테니...!”

* * *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빙색마인.”

“그래. 고생했다.”

빙색마인이라고 불린 청년은 눈앞의 네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년이 누구냐?

나다.

“지금쯤이면 독고자영도 슬슬 하남으로 돌아가겠지?”

“무림맹주가 시간을 오랫동안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요. 하남과 하북을 오가며 볼 수도 있으니....”

“하북팽가 정도는 충분히 빠르게 달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악참도 선배님께서 대처를 충분히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을테니.”

그리고 내 앞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판을 짜는데 있어, 무공 뿐만 아니라 지력까지 걸출한 두 명의 여인이.

“준비는 다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후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백발적안, 흑발금안.

두 명의 여인은 흑의와 가면으로 정체를 가린 채,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오랫동안 직검을 쓰느라 무뎌졌을 지는 모르지만...그래도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

쩌적, 쩌저적.

백발적안 여인의 다리에 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빙백신공은 마치 군화처럼 맨 다리를 감싸안아, 얼음의 군화가 되었다.

“빙화신각(氷靴迅脚).”

"...어우야."

안 그래도 키가 크고 시원시원하게 다리가 뻗은 설녀(雪女)가 맨다리를 드러내니, 그 모습에 내 안에 잠든 무언가가 불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네 성명절기더냐?"

"권각술이 제 주력인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빙백신장이 주력인 줄 알았지."

"...북해라면 모를까, 중원에서 다리를 쉬이 드러내서는 아니되지요."

“그럼 저도.”

철썩.

흑발금안의 여인은 치마의 옆을 살짝 들췄다. 그녀의 허벅지에는 통 하나가 끈에 걸려있었고, 여인은 뚜껑을 섬섬옥수로 돌렸다. 그러자 안에서 머리카락처럼 얇은 은침이 빠져나왔다.

“...그거 설마 은하침통(銀河針筒)은 아니지?”

“통은 아니고, 은하침이죠. 몇 개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흑발금안의 여인은 은빛 침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걱정마세요. 쏘는 건 이게 아니라 그냥 일반 침이니까.”

“...그게 더 무서운데.”

“후후, 걱정마시라니까요? 설마 저희가 공자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렇습니다. ...공자, 각오는 되셨습니까?”

도망칠 각오.

“물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나는 주변을 훑었다. 우리의 앞에 있는 공터는 검격의 흔적으로 가득했고, 하얀 서리가 아래에 잔뜩 깔려있었다.

그리고 울타리처럼 펼쳐진 얼음기둥들의 사이, 불에 타올라 폭삭 주저앉은 건물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속아넘어가겠지?”

“그럼요. 빙색마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쳤다.”

“...빙색마인이 요동으로 잠시 떠난 틈을 타서, 천무명은 독고연을 구출해냈다.”

이 모든 것은 자청선녀의 계획일지어니.

우둑, 우두둑.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 몸을 확인했다. 백발적안의 여인이 내게 건넨 얼음에는 완벽한 ‘천무명’이 비치고 있었다.

“시작하자. ...오너라, 색마의 마녀들이어.”

“진심으로 갈 겁니다, 공자.”

“후후, 현검마망이 말해줬어요. 천무명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의 고간에 박았을 때...엄청난 희열을 느꼈다고.”

빙설마망은 바닥을 가볍게 맨발로 두드리고, 금안마녀는 허벅지 아래에 묶어둔 통에서 비침을 꺼내들었다.

빙색마인의 명령에 따라, 천무명을 쫓기 위해.

“잡히면...가만 안 둘 겁니다.”

“아시죠? 저희의 조건.”

“그래.”

나는 심호흡과 함께, 뒤로 내달렸다.

“잡히면, 따먹힌 상태로 팽가로 간다는 것!”

“가죠, 선!”

“선공은 제가!”

산동에서 인연을 쌓은 두 명의 백봉마녀(白鳳魔女)가 빠른 발놀림으로 나를, 천무명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천무명! 색마의 명을 받들어, 너를 범하겠다!”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왠지, 둘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나는 천무명으로서 독고연을 구출시킨 뒤, 두 마녀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작품후기]

사파 여간부들이 주인공을 범하려고 하는 건 국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