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55화 (45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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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여자

하북에서 열리는 용봉지회는 어느덧 반 년 가량이 남게되었다.

무림맹은 공식적으로 용봉지회의 개최지를 공표했고, 이미 개최지를 짐작하고 있던 이들은 용봉지회를 학수고대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연 한 가지.

구룡육봉은 누가 될 것인가!

"이번에는 아무도 바뀌지 않았군 그래."

"구룡이 자기 자리를 전부 지킨 건 처음이지?"

"그래? 나는 육봉밖에 관심이 없어서. 남정네들 알아봐서 뭐해? 육봉이 더 중요하지."

구룡육봉은 누구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별호를 반납하지 않았다.

"용봉지회 이래 15명이 전부 자기 별호를 지킨 적은 처음이군."

"17명이지. 흑백이화가 있지 않은가."

"아 참. ...그러면 올해는 구룡팔봉이 되는 건가?"

"글쎄. 자릿수를 더 조이지 않겠어? 흐흐."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 육봉에 몰려있었다.

4년 동안 사람이 아무리 발전해봐야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이미 어느정도 무공의 수위가 크게 다를 바 없는 구룡쟁패는 이전 회차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육봉의 자리는 다르다.

강호에 많은 여류 고수들이 하나 둘 그 재능을 만개하고 있는 만큼,

그리고 흑백쌍화에 대해서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이전과 같은 호칭을 달지 않기로 소문이 돈 만큼,

강호에서 단 여섯명 만이 봉(鳳)의 칭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마교 소공녀는 참가하는 건가? 태극화는 불참했잖아."

"그럼 경쟁자가 한 명 줄어들었군. ...아니지, 두 명인가?"

이화육봉(二花六鳳) 중 공식적으로 용봉지회 불참을 천명한 여인은 태극화 1명 뿐이다.

다른 일곱 명은 아직 거취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용봉지회 참가는 용봉지회의 개막전 일주일 전에 결정될 것이며, 대부분 다시 참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1명.

거취가 아니라, 참가 자체가 불투명한 존재가 있었다.

검희봉(劍姬鳳), 독고연.

무림맹주의 금지옥엽으로 이봉결정전의 주인공이었으나, 동시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존재.

그녀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은 우려와 함께 착잡한 마음으로 검희봉을 기억속에서 지웠다.

"마교 소공녀! 연희봉 모용란! 와백봉 제갈선! 산주봉 방철수! 빙백봉 유설라! 중최미봉 금소예! 이상 여섯이 육봉의 자리를 지킬 것이오!"

"하하, 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화산의 매화검수 선주희, 황보세가의 황보혜지 또한 이름을 널리 알린 바!"

"이번에 검각이 호북으로 들어온만큼, 검각에서도 몇 명 나오지 않겠나? 녹림왕의 차녀도 그렇고, 의외로 찾아보면 나올 사람들은 많을 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육봉으로 점치는 이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말하지 않아도 독고연을 육봉에서 빼고는 했다.

빙색마인이 죽거나 소식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그는 불과 '얼마전' 모용세가를 습격한 것으로 존재를 다시 알렸기 때문이다.

"독고 소저는 납치당했는데, 모용 소저는 선녀라면서 건드리지 않았다더군!"

"모소선지."

"그게 무슨 말인가?"

"모용 소저는 선녀니까 지켜줘야한다고 하던데?"

연희봉 모용란의 미모와 의기에 감명받은 빙색마인이 그녀를 위한 조각상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하더라!

정말로 범해지지 않았는지는 당사자만 아는 일이지만, 아무튼 빙색마인은 결국 잡히지 않았다.

결국 빙색마인이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은 독고연이 결국 빙색마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만약 빙색마인이 죽었다면, 어디선가 살아서 소식이라도 전했을 터.

하지만 독고연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호에서 여전히 그녀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차고 넘쳤지만, 최초로 납치당한 날로부터 벌써 3년이나 지난 만큼 그런 이들도 드물었다.

그러나.

1명.

독고연을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고 하는 청년이 있다는 소문이 무림맹에서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 세가의 가주를 중심으로.

그와 마주친 이들을 거쳐.

그의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귀에도 이야기가 들리게 되었다.

빙색마인이 찾아 죽이려고 하는 남자.

천무명.

도대체 빙색마인과 천무명은 무슨 관계인가?

그 대답은 누구도 알지 못했으나, 의외로 금방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하북에서.

* * *

어두운 밤.

하북팽가의 방계 중년 무인, 팽하염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밤의 저잣거리를 산책하며 밤공기를 만끽했다.

"상공, 밤공기가 춥습니다."

"부인과 함께 걷는데 이 밤이 어찌 추울 수 있겠소."

팽하염은 검각 출신의 부인과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그들은 혼인한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연인처럼 애틋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따라 밖에 연인들이 많군."

"다들 사랑을 속삭이는 날이 아니겠어요?"

"하하, 부인. 그렇다면 오늘 천하의 사람 수가 배는 늘어나겠구려."

"어머, 농도 참…."

부부는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팽가를 중심으로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야 그들은 팽가의 대문에 돌아올 수 있었다.

"부인. 담벼락을 보셨소?"

"...예전에 비해 상당히 말끔해졌습니다. 개구멍조차 하나 없구요."

둘은 산책을 하며 팽가 전체를 순찰했다. 그리고 낙서 하나 없는 담벼락을 보며, 둘은 팽가의 번영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 때, 본가에 남을 걸 그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상공. 심려치 마셔요."

둘은 과거 팽가의 방계가 모조리 본가를 빠져나올 때 가문의 어른들과 함께 본가를 빠져나왔으나, 본가의 위세가 높아짐에 따라 다시 본가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같은 팽가잖아요? 상공도, 뱃속의 아이도."

"...그렇지. 암. 직계든 방계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소? 우리의 아들이 팽가의 남아인데."

팽하염은 욕심이 없었다. 자신이 팔대세가 방계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고, 아리따운 아내를 맞이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팽가는 나날이 번창하고, 또한 그 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비록 방계가 고개를 들지 못한다고는 한들, 둘은 크게 욕심이 없어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저, 둘이서 서로 사랑을 하고 결실을 맺어 잘 키우고 예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

모두가 즐거움과 행복함을 누리는 밤이 되리라. 두 부부는 밤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사랑하오, 부인."

"저도 마찬가지에요, 상공."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으슥한 곳. 두 부부는 서로 눈을 감으며 조용히 입을 맞-

우당탕!

옆에서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팽하염은 아내를 뒤로 물리며 바로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누구냐!"

"......."

골목길 너머, 어둠 속에서 지친 몰골의 백발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산길을 파헤치고 온 것처럼, 여인은 찢어진 소복과 살갗이 베이고 긁힌 맨발로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있었다.

"누, 누구…?"

"여기는...어디죠…?"

여인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에게 잡혀갈 것 마냥, 여인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은 말라비틀어지고 부르터, 척보기에도 너무나 안쓰러웠다.

"소, 소저는 누구요?"

"저는…."

백발의 여인은, 음울한 자색 눈동자에선 눈물을 글썽거렸다.

"모, 모르겠어요…."

"뭣…?"

"저, 정신을 차리니까 이게…."

여인은 손에 구겨진 서찰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종이의 구김이 잘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 저기…. 이거, 어떻게 읽어야 해요…?"

"뭣…."

"상공, 설마…!"

"기억...상실…!"

팽하염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향해 다가가려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여인의 위태로움에 그녀를 도와야한다는 본능이 먼저 앞섰다.

"히익…!!"

하지만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심지어 엉덩방아까지 찧으며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

"소저, 괜찮아요. 저희는 하북팽가의 사람들이에요. 팔대세가의 일원이죠."

"팽...가…? 팔대세...으윽…."

여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팽하염은 아내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의 부인은 여인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머리가...아파…."

"애써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해도 돼요. 천천히, 천천히 생각해봐요. 그리고...저희가 편지를 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보여주시겠어요?"

"여, 여기…."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넘겨주는 순간에도 손끝으로 편지를 부여잡는 모습에서 두 부부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기억상실에 걸린 여인에게, 자신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오직 손에 들린 서찰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헉…!"

팽하염은 핏기가 가셨다.

[색마는 내가 막겠소. 부디 멀리 도망치시오, 연.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소.]

"서, 설마…!"

색마. 연. 백발. 팔대세가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습.

그리고 기억을 잃었음에도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 말하고 있었다.

"설마...독고연?"

"독...고연…? 고연이 제 이름인가요…?"

"아니, 잠시, 잠시만. 이건…."

"무슨 일이냐."

저벅, 저벅.

팽가의 대문에서 청년이 뒷짐을 진 채 나타났다. 팽하염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하염이로구나. 그런데 저 소저는...허억!!"

팽도황은 귀신을 본 것 마냥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그대는…!! 자, 잠깐! 빨리 저 소저를 안으로 들여라! 어서!"

팽도황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여인을 들일 것을 지시했다.

"저, 저는…."

여인은 팽도황의 기세에 몹시 당황하며 벌벌 떨었으나,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백발의 여인은 묵묵히 팽하염 부부의 부축을 받아 팽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소동을 지켜본 많은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여인.

은빛이 감도는 백발.

강호에서 그런 신비한 머리칼을 지닌 이는 많지 않았다.

* * *

저벅, 저벅.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하남에서 하북까지 전력으로 달려왔지만, 이 짧은 거리는 왠지 모르게 걷기가 너무 힘들었다.

너무나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된 여인의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맹주."

팽가 가주, 팽도황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독고자영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연이가 확실한가?"

"그건 나도 모르지. 빙색마인에게 당해서 백발이 된 여인인지, 아니면 '그'가 착각한 것인지는 나도 모르오."

팽도황은 한탄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사자도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니, 내가 어찌 알겠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소."

쿵!

팽도황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혈육!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라면, 응당 당사자임을 알 터!"

"...그래, 그렇지. 고맙소, 팽 가주."

독고자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

"오셨습니까, 맹주님."

안에는 팽도황의 양녀, 팽유월이 차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를 손가락으로 조용히 가리켰다.

"아…!"

그곳에는 백발의 여인이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혈색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연...아…?"

독고자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백발의 여인 또한 독고자영의 방문에 고개를 돌렸다.

"연이...로구나…."

"......그."

백발여인은 너무나도 송구한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어르신의 딸인지는...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연이야! 나의 딸, 독고연이란 말이다!"

독고자영은 침대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독고연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힉…!"

백발여인은 기겁을 하며 침대 끝자락으로 도망쳤다. 독고자영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손을 떨어뜨렸다.

"맹주님, 충격이 크시겠지만…."

"맹주. 일어서시오.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소."

"아아…."

독고자영은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독고연이라고 생각한, 아니 독고연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길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남자에게 고통을 받았다가 도망친 사람처럼.

"마음 다잡으세요."

"후으, 흐으, 하아…."

백발여인은 팽유월의 도움을 받아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점차 안정된 호흡을 되찾은 백발여인은 울상으로 독고자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안 그러고 싶은데, 자꾸, 몸이 말을 안 들어요…."

"......그래. 알겠다. 가주, 잠깐...나갑시다."

독고자영은 팽도황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낸 뒤, 팽도황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겠소?"

"...저 아이가 병에 걸린 이후로 끊은 것으로 알고있소만."

"그렇소. 납치당한 날 이후로도...한 대도 태우지 않았지. 그러나 오늘을 태워야겠소."

철컥.

독고자영은 삼매진화로 연초 끝에 불을 붙였다.

"혹시...어찌된 영문인지 확인하셨소?"

"자세한 내막은 오면서 서찰로 확인했을테고,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무공조차 잊어버린 듯 하오. 기억하는 것은...하나 뿐."

팽도황은 우수에 찬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 공. 오직 그 이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후우."

독고자영은 시름과 함께 연초를 태웠다.

"......차라리,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소만."

독고자영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연이의 그 가라앉은 자줏빛 눈은...결코 거짓이 아니었소."

독고연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이름도.

무공도.

자신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억도.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

"천 공이라는 자와...다시 만나야만 한다고 하더이다."

"......."

무림맹주의 금지옥엽, 독고연은 기억상실에 걸리고 말았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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