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54화 (45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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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여자

용 형.

아니, 모용 형이라고 부르는게 맞을 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용 형으로 소개를 받았으니, 용 형이라고 부르겠소.

나는 살았소. 현검마망은 나의 물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살려두었으나, 나는 간신히 그녀를 기절시키고 그녀의 집을 탈출했소.

어떻게 기절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만나면 따로 이야기해드리겠소.

현검마망이 나를 노린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할까봐 이유를 알려주자면, 그녀는 나를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려고 했소.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나이가 충분히 찬 여인으로, 젊은 청년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를 범한 것이오. 상당히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못한, 삐뚤어지고 추악한 여인의 말로인 셈이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용 형이 혹시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하여 얘기하는 것이오.

용 형!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용 형이라도 살아간 것이 천만다행이 아니겠소? 나는 이미 강호에 나오면서 이런 역경을 많이 거쳤다오. 이미 남방의 화희(火姬)에게도 당했고, 북방의 얼음마녀에게도 호되게 당했소. 그들은 조직적으로 나를 쫓고 있으며, 나의 복수를 몸으로 막으려는 자들이지.

다행히 지금까지 나는 그들의 마수에서 무사히 도망쳐왔소. 그래서 나는 괜히 용 형이 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을 할까봐 걱정되어 이리 편지를 남기오.

나는 비록 남자로서 더할 나위없는 굴욕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꺾어지 않을 것이오. 몸이 유린당한다고 한들, 누군가를 위한 이 마음만 굳건하다면 되지 않겠소? 대나무는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요.

빙색마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소. 필히 세가 전체가 크게 힘든 시기를 보내겠지. 하지만 마음을 다잡으시오. 굴욕은 한순간이며, 언젠가 빙색마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강호에 널리 알려질 것이오.

내가, 그를 죽이겠소.

이 천 모가 목숨을 걸고 그를 죽이겠소. 그렇게되면 내가 모용 세가의 복수를 대신 하는 건가?

용 형!

천하가 왜 이러냐고 한탄할 수 있소. 하지만 이 또한 강호, 시대의 흐름. 부디 마음을 다잡고, 당당히 마음을 굳혀 심지를 바르게 잡읍시다.

구룡쟁패에서 다시 만납시다. 용 형.

그리고.

...나는 비록 여인이 아니지만, 모용 소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부디 그녀에게 안부 전해주시오.

이상, 무명(無名).

* * *

이름이 없다.

편지를 쓴 사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름을 밝혔다.

세상에 이름이 없다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그 자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모용란은 편지에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그런 일이...!"

하지만 모용란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왜 하필 모용란이 아니라 모용안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사용했을까 후회가 되었다.

"천 소협은...대체 무슨 일을...?"

"아아, 그가 천무명이었다니...! 내 딸을 구하기 위해 이런 굴욕을 감내하면서...크흑...!"

군사 제갈길은 편지의 내용을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무림맹주는 천무명의 편지로부터 그의 굳은 의지를 느껴 눈을 지긋이 감아버렸다.

"정녕 그 청년이...빙색마인을 죽이고 독고 소저를 구하려고 하고 있다는 건가...?"

이미 모용란은 천무명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숨기려고 했던 천무명의 수치와 굴욕은 모두에게 공개되어버리고 말았으나, 편지를 읽은 세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비밀로 합시다."

"암, 그렇고 말고. 단지...이 현검마망이라는 여자에 대해 조사는 해보겠소. 그녀에 대해 추적해보면 언젠가 천무명과 빙색마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터."

"천무명...용봉지회라...."

가주, 모용곽은 모용란에게 지긋한 눈으로 편지를 건넸다.

"란아. 그는 너를 남자로 알고 있는 듯 하구나."

"...예."

모용란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색마에게 범해지지 않기 위해 남장을 하고 다녔지만, 너무 효과가 잘 일어나고 말았다.

천무명은 모용란을 진짜로 모용안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모용란이라는 걸 알았다면, 최소한 '용봉지회'에서 만나자는 언질이라도 남겼을 터.

하지만 구룡쟁패다. 강호의 여러 효웅들이 자웅을 겨루는 대결에서 만나자고 했다. 결국 모용란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뿐.

하나는 천무명을 모용안으로서 만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모용란이 모용안임을 밝히는 것.

전자는 남아로서 벗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으나, 후자는 어떤 관계가 될 지 미지수이다. 여인으로서 접근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길일까?

"제갈 가주. 여기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혹시 와백봉도...?"

"...이미 저희는 선이를 반쯤 내어놓았습니다. 색마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의협인 만큼, 남은 생을 모두 은인을 위해 쓰겠다고 하더군요."

"......크흠."

갑자기 분위기가 불편해졌다. 한 명의 청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수많은 여인들의 연정(戀精)에, 자리에 모인 두 세가의 가주들은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다.

"...천 소협은."

독고자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내 딸을 한 번 살려준 은인인셈인데."

독고자영은 그 답지 않게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탄했다.

"...설마 내 딸을 빙색마인으로부터 구해온다면...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독고자영은 다른 가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갈세가의 가주도, 모용세가의 가주도 갑작스러운 불편한 상황에 눈을 감거나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란아, 혹시 천 소협은...."

"아버님. 빙색마인이 그랬습니다. 차마 말씀드리기 그랬지만...."

모용란은, 감히 다른 두 세가의 가주를 향해 당당히 제 마음을 전했다.

"빙색마인은 제가 아닌, 천 소협을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저를 범한 것처럼 얼음상을 세워...천 소협의 진의를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제가 천 소협과 여인으로서 만났다고 착각을 했겠죠."

"설마...!"

"...예. 그 간악한 자는 시험을 하는 겁니다. 남에게 범해진 여인을 품을 수 있느냐하는."

모용란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선언했다.

"색마에게 범해진 여인입니다. 이미 제 혼처는 없습니다. 천 소협만이...제 유일한 희망입니다."

색마에게 범해진 여인을 누가 품어주겠는가.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연심(戀心)을 이해하는 자 이리라.

"두 분 가주님께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저는, 이 마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모용 소저의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내 딸은...."

"천 소협은."

모용란은 편지를 곱게 품으며 따스하게 웃었다.

"반드시, 독고 소저를 구해낼 것입니다."

* * *

"엣취."

"사레걸리셨나요? 물 떠올게요."

"아니다, 연아. 괜찮다. 어디서 또 내 욕을 하는 거겠지."

모용세가에서의 일을 마치고 호북으로 돌아온 뒤.

나는 독고연과 함께 가벼운 변장을 하고 호북 거리를 거닐었다. 과거 안휘를 거쳐 산동으로 올라갔을 때처럼, 우리는 젊은 부부를 연기하며 호북 이곳 저곳을 탐방했다.

둘이서 당과를 먹기도 하고, 가극을 보러가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자연을 벗삼아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동정호로 배를 띄웠다.

사아아.

배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달이 차오른 밤, 나는 독고연을 데리고 작은 배를 빌려 단 둘이 올랐다.

고요한 밤.

맑은 달은 동정호의 위에 걸리고, 물소리만이 가득한 동정호 위에서, 나는 독고연과 함께 앉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요동은 좋은 곳이더구나. 온통 평야밖에 없어서 말을 타고 달리면 참 좋을 것 같은 곳이었지."

"저도 잘 탈 수 있어요."

"뭘?"

"말."

독고연은 은근한 눈빛으로 내 어깨에 기대었다. 노조차 젓지 않고, 물이 흘러가는대로 우리는 거룩한 밤을 만끽했다.

"앞으로...타기는 어렵겠죠?"

"글쎄. 그건 장인어른이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닐까."

독고자영은 천무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복수를 위해 뜻을 꺾은 자? 가는 곳마다 여인들이 끊이질 않는 영웅?

"가는 곳 마다 예쁜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난봉꾼을 사위로 맞이할까요?"

"딸의 병을 치료하고 납치당한 걸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내주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게지."

"아버지의 양심상태 아시잖아요."

독고연의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빙색마인에게 납치를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독고연의 실상은 일종의 패륜이다. 아무리 강제로 혼약을 맺게하는게 싫다고는 하지만 부친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좀 많이 미안하네.'

월아가 나중에 커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아마 나는 며칠-아니 몇 주는 식음을 전폐하며 자기자신에 대해 한탄할 것이다.

"...그래서 무림맹주가 천무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로 하지 않았느냐."

"네. 맞아요. 천하에서 그 누구도 보지 않을 여인이 될 거랍니다."

독고연은 배시시 웃으며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베개는 내가 주로 하는 것이지만, 독고연은 간혹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나를 올려다보고는 했다.

"이번 일은 제게 전적으로 맡겨주셔요."

"연아. 나는 무섭다."

"무엇이요?"

"네가."

나는 꽃처럼 흐드러진 독고연의 백발을 쓰다듬었다.

"네가 어떤 식으로 폭주할 지 몰라, 그게 걱정되는구나."

"에이, 설마요."

"황보세가의 일을 기억하지? 친구를 위해서 친구를 범하겠다는 너의 행동을."

"......."

독고연은 나의 여인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저는...."

"나를 위한 일이지. 그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었어."

사공희가 모든 판단을 내게 맡기는 여인이고, 이시아가 나의 판단을 존중하여 자신의 이득으로 만드는 여인이라고 한다면, 독고연은 모든 상황의 이득을 오직 내게 맞추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무섭다는 것이다. 너는 너 스스로를 해하면서까지 나를 위하니까."

그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진 자.

"나는 네가 너를 망가뜨리지 않기를 바란다."

독고연의 성정과 성향, 그리고 나를 위해서 폭주하는 경향을 모두 종합해보면, 그녀는-

"너는 분명 무림맹주의 앞에서-"

"쉿."

독고연은 내 입에 검지를 올렸다.

"거부하지 마세요."

"연아."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이미 색마에게 납치당한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독고연의 자색 눈동자는 단호함마저 깃들어있었다.

"여인이자 동시에 무인으로서, 저는 모든 것을 감내하겠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제 뜻에 따라주세요."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냐."

소곤소곤.

독고연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풀벌레 소리 사이로 묻히듯 지나간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아. 그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빙색마인을 악인으로 만들고, 천 공자를 의인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길이죠. 저라는 여인은 나락으로 떨어질 지도 모르지만."

독고연은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에는 후회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가가의 여자로 확실하게 못을 박을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아니면 가가는 싫으신가요? 색마에게 범해진 여자는 그저 한여름의 불장난이었나요?"

"...그럴 리가."

나는 독고연과 손을 맞잡았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여인을 내가 어찌 품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연아, 너는 나의 여자다."

"그 말씀 만으로도...저는 힘이 솟아나네요. 하지만...동시에 불안해요."

독고연의 손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 아니다. 잠시간 이별일 뿐이다."

"그러니까요."

독고연은 울먹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는 가가없이 사는 건 상상도 못할 것 같아요."

"나도 마찬가지다. 연아. 천가장에 네가 없다면, 부엌은 매일매일 터지고 불이 붙겠지."

"...풋."

독고연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반드시 데리러가마.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믿고 있을게요, 가가. ...으응, 이제는 아니네요. 내일부터는...천 공자가 되어야 하니까."

독고연은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밤만은...저만의 가가로 있어주세요. 그리고, 이 몸에 영원히 가가를 잊지 못하게...당신을 새겨주세요."

늦은 밤.

호수에는 잔잔한 파문만이 퍼져나갔다.

[작품후기]

성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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