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53화 (45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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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존

만병지왕은 검이다.

무인의 7할, 아니 8할은 아마 검을 기본으로 수련할 것이다.

하북팽가처럼 도법으로 특화되어있거나, 무기를 직접적으로 드는 걸 지양하는 소림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특히 정파 대부분의 무사들은 검을 다룬다.

실제로 혈겁난세, 100대 고수 중 거의 70명 가량이 검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힘을 바탕으로 기억과 무공을 빌려 쓰는 이상, 내 피가 기억하고 있는 무공의 7할은 검법이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검을 들었다.

무사가 되기 위해 검을 들었고, 문파의 삼류 무인으로서 나름 삼재검법이라도 익혀 검으로 대성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검은 내게 명확한 한계가 있는 무기였다.

이미 근골이 망가진 내 몸은 검으로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었고, 다른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무기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의 힘을 갈고닦았고, 그건 혈교주의 곁을 지키는 혈강시의 힘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검사가 아니다.

검을 사용하는 자일 뿐이다.

물론 검만으로도 나는 이미 천하제일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검은 나의 차선에 속하는 무기였다.

내 핏속에 각인된 검, 권, 각, 도, 봉, 편, 부 등 각종 무기 속에서, 나는 검이 가장 많고 천하제일의 여인에게 검으로 죽었기에 검을 갈고 닦았다.

구천현녀가 검으로 나를 죽였으니, 검을 익혀 대성해야만 구천현녀를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성명절기를 봉인했다.

따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 차고 넘치는데, 왜 굳이 보기도 싫은 힘을 사용한단 말인가?

그러나.

사용해야하는 순간이 있다면, 사용해야하는 수밖에.

추마귀 시절.

구부정한 몸으로 할 수 있는 무공은 짐승을 흉내내는 것 밖에 없었다.

이미 강호에서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추마귀가 된 이상, 나는 추마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무공을 갈고 닦았다.

조.

각.

수.

그리고 그걸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전생 혈강시의 주력이자 전력이었다.

나는 그 힘을 꺼냈다.

-혈강시의 오른팔에는 혈영룡이 깃들어있죠.

혈교주는 말했다.

-아니다. 용은 여기 고간에 있나?

농담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추마귀를 혈강시로 개조하면서 혈강시가 사용하는 무공을 추마귀의 무공에서 끄집어냈다.

마치, 짐승처럼.

마치, 괴물처럼.

나는 내 팔에 혈귀를 씌워, 검존의 검을 정면에서 부숴버렸다.

낭만도, 멋도 없지만.

승리를 위해.

* * *

쿵!

나는 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검존의 몸을 손으로 눌렀다. 내 손에는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검존은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한탄했다.

"......나를 가지고 놀았군."

"그럴 리가."

검존과의 전투는 나름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네 덕분에 다시금 알게 되었다. 역시 정파 고수들 상대로 함부로 입 터는게 아니라는 것을."

"...훗. 그런가."

검존은 허탈한 목소리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달은 크게 기울어 새벽녘의 빛이 하늘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군. 부작용이 심해보이는군. 그래서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던 건가?"

"...글쎄."

나는 검존의 몸에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몸 아래는 붉은 피가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깔려있었다.

"마공 그 자체로구나. 검은...그걸 억제하기 위한 심신수양의 방안인가."

"멋대로 생각하시지. 어느쪽이든, 그건 중요치 않으니."

중요한 건 단 하나.

"검존, 네 패배다."

"...아아, 그렇군. 나는 죽는 건가."

검존은 허탈한 얼굴로, 내 다리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하지."

"뭐지?"

"나의 안배를...부디 모용세가에 전해다오."

"......."

나는 주변을 훑었다. 사방에 우리가 펼친 생사결의 흔적이 가득했고, 바닥은 검존이 뿌린 피로 덮여있다.

이곳을 은거기인의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보이는 바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전해는 주지."

"고맙다. 언젠가...나의 진전을 이어받은 후예가 너를 죽이리라."

검존은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그를 향해 엄지로 목을 그었다.

"그 후예, 내 핏줄이 될 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대로 좋군."

검존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의 혈색은 빠르게 창백해졌다.

"검선은...마지막에 뭐라고 하고 갔...지…?"

"젊었을 때 붙었으면 어땠을까 하더이다."

"...크흐, 그 놈 답군."

검존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끝까지 멋이나 부리고…그 놈…."

"당신은? 유언이 있으면 말하시오. 전해주겠소."

"......."

검존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뜨며, 나를 향해 말했다.

"좋은, 승부였다."

스륵.

검존은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끝까지 재미없군."

매도도 하지 않고, 욕설도 지껄이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 자신의 소중한 이를 향해 말을 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무림인의 근본이 아닐까.

승패에 순응하는 자세.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생사결에서 죽음조차 수용하는 자세.

천하는 이를 두고 이리 말하리라.

근본.

"...백도 무인의 전형이로군. 하지만 미안하오. 그대는 나의 반면교사가 될 것이니."

화륵.

나는 검존의 몸에 중려신화정을 붙였다.

"나는 추하게 발버둥치더라도 끝까지 살아남겠소. 나의 가족과 연인들을, 나의 자식들을 위해."

나는, 색'마'니까.

화르륵.

사방에 튄 피를 모두 태워 없애고, 백골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런 검이었나?"

나는 검존의 검을 모방하듯 검을 휘둘렀다. 누구나 배우는 수평베기였으나, 나는 검존의 검세를 완벽하게 따라할 수 없었다.

사---악.

검풍은 동굴 안을 가볍게 휘몰아쳤고, 재는 바람에 흩날려 밖으로 날아갔다.

"......."

나는 다시 하늘을,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우리의 비무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고, 검존이 남긴 초식의 흔적이 닿아있었다.

"...검으로 저기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존과 조금만 더 검극을 나누며 검법의 극의를 좇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하는 후회도 든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저기까지 닿을 수 있다. 닿아야만 한다.

나를 죽인 구천현녀가 지상에 내려온다면, 이번에야말로 혈강시가 아닌 비천색마로서 검을 들고 구천현녀를 제압해 범할 것이다.

"검존. 미안하오."

나는 재와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된 검존을 향해 가벼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꼴려서, 더는 못참겠더이다."

검존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한 가지 비밀. 내가 굳이 곧장 승리를 취하고자 했던 궁극의 이유.

"기다려라, 왕소현."

나는 왕소현과의 약속시간에, 조금-아니 많이 늦어버리고 말았다.

"성교는 못 참지."

현경 남자와 검무를 나누는 것보다, 나의 여자와 침대 위의 비무를 즐기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바야흐로, 납겁.

나는 나의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자, 공동을 떠났다.

* * *

저벅, 저벅.

청년은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산을 걸었다. 산을 오를 때마다 호흡은 점차 벅차오르기 시작했지만,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기어이 산의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아…!"

청년은 탄성을 내뱉었다. 정상에 서 내려다보는 산세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후우…."

청년은 호흡을 고르며 자연을 만끽했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관조했다.

"나는…."

"이보시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에, 청년은 가슴이 울컥했다.

"우나?"

"...무슨 헛소리를."

청년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과 똑 닮은, '그'가 붉은 무복을 입은 채 바위 위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같은 처지에 놓인 만큼, 굳이 말이 더 필요하오?"

붉은 무복 청년은 싱긋 웃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서서히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검으로 회포나 풀어봅시다."

혈마의 핏빛과는 다른 아름다운 매화꽃의 색으로.

"검을 들고 즐거웠던 적이 있소?"

"......즐거웠던 적이라."

청년, 모용훤은 눈앞의 상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지금."

* * *

"저...무릉도원을 다녀온 것 같습니다."

"그만큼 좋았나?"

"네, 무척이나."

나는 침대에 누워 내 위에 엎드린 왕소현을 끌어안았다.

"무사히 오신 것으로 천만다행이었는데, 이렇게 저를 기쁘게 해주셨잖습니까."

"내가 고맙지."

왕소현이 있기에, 나는 혈마의 힘을 '일부' 꺼내어 사용할 수 있었다.

소예신공을 아주 살짝 느슨하게 풀어 나의 전력을 끌어낸만큼, 나는 성욕이 불끈 솟아올라 버티기가 힘들었다.

만약 검존이 여자였다면, 저 여자를 반드시 살려서 범하겠다는 의지를 다잡으며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검존은 남자고, 나의 성욕은 점차 검존과의 전투를 끝맺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검존 선배님은…."

"죽였다."

"그렇...군요."

왕소현은 슬픈 눈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힘든 결정이셨겠죠. 예. 주군께서는 변수를 싫어하시니…."

"왜? 내가 죽이지 않기를 바라느냐?"

왕소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죽이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만약 내가 그를 살려줬다면, 언젠가 복수심으로 천가장을 습격하는 일이 생길 수 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그건 십분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그저 아쉬움이라…."

"아쉬움?"

"예. 그. 그게."

왕소현은 무안한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검존과 검을 겨루고 싶은, 아앙?!"

찌걱. 나는 왕소현의 허리를 붙잡고, 그녀의 안을 찌르고 있던 양물을 더 깊게 쑤셔넣었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느냐?"

"아, 아으…! 그, 그런게 아니잖습니까! 저도 무인인 만큼, 검사인 만큼 그저 검으로 뛰어난 분과 대련을...오호옥…!"

"내가 비무를 해주고 있거늘, 실망스럽구나."

귀접검담, 개시.

푸슈우우우웃.

왕소현은 성대하게 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정신 속에서 그녀를 검으로 만족시키는 동안, 아랫도리의 검으로도 그녀의 성감을 만족시켰다.

"죄송합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유린당한 왕소현은 내 몸에 결국 퍼질러져버렸다.

"하아, 하아...."

"허어. 이제 슬슬 가야하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어찌 가겠다는 것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견디기 너무 힘든 걸요...흐끅."

"하하, 그래. 아무리 검마라도 천하제일좆은 견디기 어려운 법이지."

찰싹. 나는 그녀의 살결을 만끽했다.

"걱정마라. 이제 요동에서 할 일은 하나 뿐이니."

"하나...입니까?"

"그래."

나는 미리 준비한 서찰 하나를 집어들었다.

"떠나기 전에, 편지 한 통만 남기고 가면 된단다."

그를 위해.

* * *

빙색마인의 방문 이후.

무림맹은 제대로 된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빙색마인에 대한 선제적 포위를 해제했다.

드넓은 요동땅에서 작정하고 숨어버린 존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몇 가지 얻은 정보는 있었다.

하나, 빙색마인과 천무명이 서로를 찾는다는 것.

둘, 빙색마인은 권각술을 주로 사용했다는 것.

셋, 천무명과 엮인 것 덕분에 빙색마인은 모용란을 가만히 내버려둔 것!

모용세가는 비록 출혈이 있었으나,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빙색마인을 추적하는데 큰 단서를 제공했다.

특히 빙색마인에게 당할 '뻔'한 모용란이 큰 역할을 했다.

빙색마인조차 아름다움에 선녀라고 칭송하여 물러났다는, 남들 듣기에 믿지 못하여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빙색마인은 종잡을 수 없는 미친놈이다.

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떠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선녀라는 식으로 얼음상으로 만들었다.

-빙색마인, 실은 딱히 범할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냐?

적당히 시선을 모용세가로 보내기 위해 모용란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

사건의 당사자, 모용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색마는 분명히 자신을 범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무명이라는 이름을 듣고, 범하려고 하던 행동을 멈췄다.

"천...형...."

과연,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며, 세가를 수습하던 때.

"...모용안에게? 그 서찰, 저한테 주세요!"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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