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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존
"늦으시네...."
검마, 왕소현은 약속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색마에 전전긍긍했다. 그녀는 객잔의 방 안에서 객잔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빙색마인이 도망쳤다더군!"
"무림맹주께서 오시니까 도망을 친 게야! 모용란 소저를 납치하지 못한 거지!"
"범하고 갔으니까 빙색마인의 승리가 아닌가?"
"이 사람아, 아니라잖아! 모용란 소저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반해서, 선녀라고 생각하고 그냥 갔다잖아!"
"모용란은 선녀야.... 아껴줘야 해...."
객잔 1층 사람들의 소리는 곧 그녀의 정보가 되었다. 다행히 빙색마인은, 비천색마는 잡히지 않았다.
만약 무림맹에서 빙색마인을 잡았다면 대대적으로 알렸을 터.
모용세가의 위신을 세우는 동시에, 빙색마인의 단전을 부수고 손발의 힘줄을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식은 없었다. 모용세가에 들어간 무림맹주와 군사는 세가에서 나오지 않았고, 이제 추색살의 본대가 요동에 도착하여 빙색마인에 대한 포위망을 만들었다.
'어디에 계시지.'
왕소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좀처럼 다스릴 수 없었다. 혹시나 빙색마인이 무림맹주에게 추격을 받고 있는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차라리 어느 화경급 여고수와 만나 색마짓을 하고 있기를, 그래서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했으면 할 정도로 왕소현의 근심은 가득 쌓이고 있었다.
만약, 화경이 아닌 현경급 고수가 튀어나오게 된다면?
-빌어먹을 현경할당제. 강호에 현경이 최소 30명은 있겠다!
언젠가, 비천색마는 술에 취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화산에 갔더니 검선과 맞붙었지. 아미파에 갔더니 유령이 튀어나와서 나를 죽이려들더구나. 강호 전역의 인구를 따지고 보면 30명은 아주 작은 수지만, 그들은 왜 하필이면 갑자기 허허허! 걸면서 나타나는 건지.
왕소현은 살면서 현경 고수를 만난 적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이 있다면 천마 뿐이다.
- 이번에도 혹시나 현경 고수가 튀어나온다면, 분명 내가 그 놈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으으, 짜증이 나는구나. 은거한 화경 고수가 현경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게 아니냐. 누가 화경이 되었을까? 전대, 전전대 고수 중에 있을만한 놈들이 누구있지? 환유검(煥柳劍)? 권령천검(權領天劍)? 으으, 설마 검존은 아니겠지?
왕소현은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화경 고수? 그도 아니면 전전대 세대에 현경으로 올라가는게 아닌가 화경 고수? 그도 아니면 검선과 같은 세대에 이미 현경으로 이름을 알렸던 검의 지존?
"......이기실 것 같기는 한데."
누구든 비천색마가 이기리라. 그들의 무공 수위는 미지수이나, 비천색마의 무공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천마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존재. 만약 천마와 비슷한 무공수위를 가진 비천색마가 강호의 정파 은거 현경 고수에게 패배한다?
마교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검존이라는 이름이 어디 가벼운 이름인가? 아니다. 당대의 무림 고수 중 알려진 이들과 검존의 힘을 비교해보자면, 그는 아마 열손가락에는 들지 못해도 20대, 아니 15번째는 되리라.
"이기시겠지? 이기실 거야. 이기시기는 할 건데...."
과연, 어떻게 안 다치고 이길 것인가. 복호보살을 상대했던 것처럼, 혈소예를 상대했던 것처럼, 혹시.
혈마를 꺼낼 것인가?
"......혈마로 각성하시면 사정제한 풀어주신다던데."
꿀꺽.
왕소현은 침을 삼켰다. 그녀는 이미 염마와 빙마로부터 아미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 지금까지 했던 경험 중에 최고였어요.
- ...여자를 임신시키겠다는 의지가 몸으로 느껴졌어요.
색마와의 경험도 좋지만, 그 중 으뜸은 혈마라고 하더라. 진짜로 임신하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성감을 높이며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더라.
"부디...."
아무도 죽지 않고 혈마로 돌아오기를.
* * *
백도 무림인들의 특징.
잘 깨닫는다.
너무 잘 깨달아서 그냥 완전히 하늘로 등선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정도다. 한 번 일격을 맞았다고 이렇게 한 단계 더 높은 검기를, 더 강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이 어찌 함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검을 휘두르기가 쉽지 않았다.
"폭성(爆星)."
카앙, 카앙, 카앙!!
정면에서 쏟아지는 찌르기는 산발적으로 내 급소를 노렸다. 목과 배와 눈과 고간을 거의 같은 순간 노릴 정도로, 검존의 공격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큭...!"
그냥 빠른 수준이 아니다. 나의 대응이 점점 늦어질 정도. 어느 순간부터 내 무복의 끝이 찌르기로 인한 검풍으로 겉이 베이기 시작했다.
"어째 찌르기도 참 검존같이 하는군!"
검존같다. 수비를 할 때도 사람을 짜증나게 할 정도로 열이 받았는데, 공격을 할 때도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목을 노린다 싶어 검을 세워 막으면, 바로 검을 당긴다.
"칭찬 고맙군."
검존의 검이 내 심장을 노린다. 찌르기를 막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피하기에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애매하게 몸에 닿는다.
그렇다고 내가 검으로 공격을 막으려고하면-
스륵.
검로를 교묘하게 비틀어 손목을 당긴 뒤, 바로 내 심장이 아닌 곳을 찌른다.
내가 심장을 막기 위해 든 검을 회수하고, 다시 그에 대처하기 어려운 곳을 향해!
"이게 진짜!"
억지로 검을 아래로 뻗어 검을 막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검은 튕겨냈으나, 검존은 튕겨내는 것까지 계산하여 역공을 펼쳤다.
"슬슬 표정이 일그러지는군."
"더럽게 싸우는데 일가견이 있는데?!"
"다들 그런 얘기를 하곤 했지."
검존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의 검은 자신의 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차있었다.
"내 검은 상대하기 짜증난다고 그러지."
"잘 아네!"
"하지만 그는 말했지. 강호에서 나만큼 기본기가 탄탄한, 검의 정도(正道)를 걷는 자가 없다고."
정도라는 말이 이리도 무서운 적이 없었다. 검존이 휘두르는 검은 정말 정석과도 같은 검으로, 빈틈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천하에 나보다 더 강한 무인은 많지. 하지만 그 누구도 나와 무(武)를 겨루어 이긴 자가 없었다!"
"글쎄, 그건 상대해보지 않아서 그런 거지!"
모든 공격을 전부 막아내는 자.
공격을 역으로 이용해 반격으로 이끌어나가는 자.
아무리 생사결을 펼쳐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라면, 누가 이 자를 상대로 끝장을 보고 싶어할까?
"너같은 놈과는 더러워서 싸우지 않아!"
"더럽다라.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
검존은 처음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가만히 산속에서 사는 건 그저 죽어가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검존의 검세는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현경 즈음 되면 후배들을 위해 가만히 있는게 배려라고 생각했지."
"아 씨, 현경 놈들은 왜 자기 멋대로 얘기를 하고 난리야?"
검존의 몸에 혈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후손들이 나라는 존재에 안심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허나!"
카--앙!
"그건, 틀렸어!"
검존의 검은 정확히 내 목젖을 찔렀다. 나 또한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아직, 나는 잊혀질 존재가 아니다!"
푸--욱!
"나는 살아있다! 여전히, 강호 그 누구도 검존이라는 칭호를 얻지 못했어!""
무형검의 손잡이 부분을 검끝으로 맞췄다. 나는 나를 찌르고 들어오는 검존의 검을 억지로 멈춰세웠다.
"내가, 검존이다!"
스륵.
붉은 피 한방울이 무형검의 검신 위를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존의 검은 내 목젖을 아주 조금 찌르고 들어왔다.
"이제는, 내가 먼저 검을 뻗을 것이다."
"......."
역공이라함은, 곧 '공(攻)'이기도 하다. 검존은 이제 받아치기만 하는 검이 아니라, 스스로 먼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내가 도저히 공세를 취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빠른 검으로.
나를 자신의 공격에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내가, 이번에는 그의 폭풍우처럼 끊임없는 공격에 질릴 정도로!
"나의 검이, 이래도 약하다는 것이냐?"
반격(反擊)은 항상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거나 튕겨내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굳건히 버텨내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공세로 이어나가는 것 또한 역공이다.
검존은 증명했다.
"너의 검으로, 나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나?"
"......."
희아연월검은 검존의 검에 닿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가 여럿의 검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하고자 하는 검술은 미완성이었다.
아직까지, 나는 남에게 빌려오는 무공이 아니면 완연한 힘을 내지 못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나의 '독문무공'으로는, 천하 최강은 커녕 나름 강자들에게도 닿지 못했다.
"약하다고는 못 하지."
인정할 건 인정한다.
검존은 강하다.
그러나, 강할 뿐이다.
아무리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해도, 역공과 반격이 대단하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나보다는, 약하다."
"여기서 또 뭘 하려고?"
"무엇이든."
이기기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마음을 굳힌 듯 하군. 그럼 좋다."
검존은 내게서 거리를 벌린 뒤, 무형검을 가볍게 옆으로 휘둘렀다.
스릉.
주변을 잠식하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별빛이 내려앉은 듯한 검강이 검존의 손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의 시야를 교란하기 위해 펼쳤던 검강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것은 즉-
"팔훤성화(八萱星花). 나의 극의를 받아보겠느냐?"
"그런 무공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하지. 방금 지은 이름이니까."
검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구천유수십일검(九川流水十一劍)은 들어보았나?"
"...모용세가 미완의 절기라고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 중 내가 나의 검으로 만든 여덟 개의 초식이다. 이 초식을 모두 막거나 파훼한다면, 네 승리다."
"싫은데? 내가 왜-"
네 초식을 전부 받아야하냐고 따지려고 하던 순간, 검이 내 눈가를 스쳤다.
"!!"
나는 몸을 뒤로 돌리며 검을 세워 빙글 돌렸다. 태극검의 묘리로 빙글 돌아가며 검을 막으니, 검존은 손잡이를 잡은 손을 비틀었다.
"쇄(碎)."
검을 곧장 역수로 쥔 검존은 손잡이를 나를 향해 밀었다. 내 검을 지지대삼아 손잡이로 나를 가격하려고 했고, 나는 뒤로 몸을 눕히며 발을 튕겨올렸다.
"회천각(回天脚)!"
뒤집어지며 세운 발끝이 검존의 손을 노렸다. 아래에서 찌르면 분명 검을 잡은 손에 큰 타격을 입을 터.
빙글.
검존은 손바닥을 세우며 검을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내 회천각은 허공을 갈랐고, 검존은 반대쪽 손을 아래에서 뻗으며 검을 붙잡았다.
"역수...?!"
반대쪽에서, 검존은 내 가슴을 베려고 검을 사선으로 베어올렸다. 나는 넘어가던 발을 강하게 차며 뒤로 뛰었고,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서걱!
가슴팍에 묶어둔 끈이 잘렸다. 나는 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바닥을 짚고 몸을 높이 튕겨올렸다.
푹---!
내가 손바닥을 짚었던 곳에 검존의 검이 박혔다. 그는 검의 손잡이 끝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며, 양손으로 검을 찍었다.
타앗.
나는 허공을 빠르게 밟았다. 허공답보로 뒷걸음질 치듯 달리며 거리를 벌렸다.
서걱, 서걱!
검존은 나를 바로 쫓았다. 조금만 높이 뛰어오르면 검존도 뛰어오르며 나를 베어가를 기세였고, 나는 기를 갈무리했다.
"후우."
검존의 공세를 막기 위한 방법은 하나.
승리를 가져오는 것 뿐.
"비천혈세."
나는 승리의 주문을 읊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스친 검존은 내 변화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존의 검신에 비친 내 몸은 붉은 기류를, 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안하군, 검존."
일격, 투검(投劍).
"큭...?!"
카---앙!
내가 던진 검에 검존의 공세가 한풀 꺾였다. 설마 내가 검을 집어던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그의 검에는 순간적으로 떨림이 생겼다.
무인이 무기를 포기한다?
"네 놈!"
검존의 눈에 분노가 차오른다. 나와의 거리는 불과 2장.
"도망칠 생각이냐!"
검존은 강하게 땅을 디디며 검을 어깨 너머로 넘겼다. 분명 저걸 앞으로 휘두르며 나를 베어가를 터.
"도망이라니, 무슨 오해를."
나는 어깨 너머로 넘긴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검무는, 끝이다."
나의 몸에 흐르던 혈기가 어떤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짐승의 팔로.
"혈마귀영수(血魔鬼影手)."
나는, 검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제부터 검이 내 주력이라고 착각했나?"
콰득.
[작품후기]
453화만에 밝혀진 진실
천하제일검이지만 주력은 검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