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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존
지금까지 나는 여러 현경 고수와 싸워왔다.
최초의 전투는 아마 빙색마인으로서 독고자영에게 복수를 외치던 때, 독고자영을 상대하던 순간이었으리라.
그는 나로부터 정보를 캐내려고 하다가 그만 나를 놓치게 되었고, 나는 가슴에 칼침을 맞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전투는 검선 적성자와의 생사결이었다.
당시, 나는 오직 검기만을 사용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른다.
복호보살을 상대했을 때처럼, 혈소예를 상대했을 때처럼 바로 혈마를 꺼냈다면 다치지 않고 승리를 챙겼을 것이다.
-검에 취해보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그의 검기에 어울렸다.
목숨이 날아가기 직전까지 나를 몰아세우며, 내가 가진 최고의 검법들을 마구 펼치며 그를 상대했다.
-그래, 더, 더! 더 많은 검을 펼쳐보시게! 그대가 진정한 천하제일검이라고 한다면, 내게 그걸 증명해보란 말이네!
검선은 나의 모든 검기를 받아줬다.
나 또한 그의 전력을 받아냈다.
나는 검선과의 비무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생사결이 무엇인지 터득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검을 휘둘러 죽이는 것이었다.
검이란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도구라고만 생각했던 혈겁난세의 생존자에게, 검선은 검술이 무술이자 예술로서 승화할 수 있음을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검존에게 말하고자 한다.
만약, 검선이 살아서 검존과 비무를 펼친다면 그리 얘기하지 않을까.
-가만히 누워서 상대가 이길 때까지 기다릴 것이오? 차라리 침대에 누우시지?
검존이 여자였다면, 나는 얼마든지 침대비무를 했을 것이다.
모용란처럼 젊은 여인이었다면, 검을 뻗을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을 구경하며 음담패설로 농을 지껄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남자다.
남자를 상대로 오랫동안 비무를 할 생각 따위는, 없다!
“혈영난화(血英亂花)!”
검을 앞으로 찌를 때마다 핏빛의 꽃이 터져나간다. 비릿한 혈향 사이로 퍼진 날카로운 검기는 검존을 향해 사방에서 쇄도했다.
“큭…!”
검존은 무형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내 공격을 막았다. 혈화 사이를 가르며 오히려 역공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피어오르는 꽃의 수가 너무 많았다.
“난화(亂花), 흐드러지고.”
일부러 검기에 허초를 싣는다. 검존의 무형검은 검기를 요격하려다가 허초임을 알고 허공을 갈랐다.
“낙화(落花), 바람에 흩날리며.”
빠르게 앞으로 검을 찌르며 검풍을 일으킨다. 주변에 퍼진 혈향이 검풍과 함께 검존을 향해 날아갔다.
“혜성회격(彗星回擊)!”
무형검이 사선으로 긴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베었다. 그의 무형검이 지나간 곳에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빛처럼 터져나왔다.
기기기기기긱!
혈화와 별들로 퍼져나간 검기가 서로 부딪혀 꽃가루처럼 흩날린다. 나는 검기의 안개 사이를 뚫고 달렸다.
“헌화(獻花), 사자(死者)를 위해 바치노니.”
서걱!
나는 높이 들어올린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수평으로 세운 무형검이 아래로 미끄러질 정도로 강하게 휘둘렀고, 나의 검은 무형검을 누르며 바닥을 향했다.
“사지에 피어올라라, 혈화난영참(血花亂影斬)!”
사방에 핏빛 검기가 터져나간다.
검존은 뒷걸음질치며 나의 검격을 막아내며 물러섰고, 나는 제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며 공간을 제압했다.
수십번, 수백번 휘둘러지는 검끝에서 피어오른 혈화는 하나하나가 전부 살기가 깃들어있었다.
즉, 주변에 피어오르는 꽃과도 같은 피안개는 모두 ‘살검’의 흔적이다!
서걱, 서걱!
“폭검(爆劍)!”
검존은 무형검을 내던지듯 아래로 휘둘렀다. 그리고 무형검을 놓으며 뒤로 크게 거리를 벌렸다.
“큭…!”
공간 전체를 압도하며 퍼져나가던 혈화난영이 바닥을 찍는 무형검의 검풍에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형검 자체를 폭검시키며 거리를 벌린 이상, 공격은 허공을 베었을 뿐.
“...아쉽군. 죽일 수 있었는데.”
“고작 그 정도로 본인을 죽이려고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검존은 어느새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동작이 크고, 허초만 가득하고, 눈을 속이기만 하는 헛손질일 뿐.”
그리고 검존은 나의 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니, 비난했다.
“그것이 검선을 증명하는 힘입니까? 유감입니다. 그 정도로는 검선이 아니라, 검황은 커녕 10대 검객들 중 환검(幻劍) 좀 쓰는 자들과 비벼볼 수 있겠습니다.”
“역시.”
나는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검신에 흐르는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사방에 자욱히 깔린 혈안개가 사그라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검선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억지는.”
“가랑비에 옷 젖는다 하지.”
나는 한손으로 내 무복 어깨를 슬쩍 들어올렸다.
“네 옷에도 혈화가 피었구나.”
“뭣…?”
“꽃을 피한다고 꽃향기를 피할 수 있는 줄 알았더냐."
사방으로 퍼진 혈화는 그냥 검기만 퍼뜨린게 아니다. 검존은 자신의 무복에 튄 붉은 피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언제…?"
"느리구나. 깨닫는 것 조차."
"그, 그럴 리가 없다. 다친 적이 없었는데…?"
당연하지, 내 피니까. 무형검을 빙백신장으로 쳐내며 입었던 상처가 아직 남아 검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던 것이 튀었을 뿐이다.
"내 승리다, 검존. 혈화적성검(血花赤聖劍)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
검존은 손을 털며 다시 검기를 일으켰다. 폭검으로 터뜨린 무형검이 다시 그의 손에 쥐여졌다.
"나름 이름난 무공인 듯 하지만, 모용의 검을 넘볼 수는 없지."
"이름난 무공? 아닌데?"
나는 핏빛 검기를 가리키며 검존을 비웃었다.
"방금 대충 붙인 이름인데."
"...뭐라? 그럼 초식은?"
"톡 까놓고 말해서, 그냥 되는 대로 씨부린 거다. 흐흐."
내 말에 검존의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일그러졌다.
"이, 이 자가…!"
"멋있다고 생각했나? 그건 아니지? 그냥 아무렇게나 말했을 뿐인인데, 멋있었다면 다행이군!"
검선이 그렇게 말하더라.
"초식이라는 것은 말이다, 결국 검의 형을 언어로서 이해하는 방안이라고 하더군."
"닥쳐라! 그 더러운 입으로 초식을 운운하지 마라!"
검존은 다시 내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의 공격을 일일이 받아내며, 그의 귀에 쏙쏙 들이박히게 검선의 가르침을 읊었다.
"초식은, 그저 검형이라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초식 명이 붙기 전까지는, 한낱 베고 찌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갈-----!!!"
검존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아직 주변에 퍼져있던 혈화는 중후한 내공에 퍼져나갔고, 나와 검존을 중심으로 다시 공터가 펼쳐졌다.
"네놈은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허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 어딜 가도 없을텐데?"
"초식은 역사다! 무공의 근본이다! 그걸 되는 대로 읊어서 이름을 붙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라!"
슬슬 검존은 나이 답게, 그리고 듣던 대로 거칠게 호통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지, 아니야."
나는 검을 사선으로 놓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검의 아지랑이를 용안으로 읽어내, 무형검의 검날 중간에 정확히 검을 맞닿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 이름이었던 초식은 없다. 검기(劍技)는 검형을 만들어내고, 그 검형에 맞는 비유가 바로 초식의 이름이지. 그리고 그 초식명은…."
검선은, 말했다.
"멋있으면 아무래도 괜찮다!"
검에, 취한다.
"누구나 쓰는 수직베기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네 놈…! 정도껏 능멸해라…!"
"태산압정(泰山壓頂). 감히 태산을 눌러 찌그러뜨린다는 말이지. 이 얼마나 직관적인 이름인가? 이 얼마나 설레게 하는 이름인가."
나는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니 무공도, 검법도, 초식도 모두 부르는 자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지. 네놈에게 보여주마. 천하, 최고의 검법을."
희아연월검(熙牙聯月劍).
"파월천극(破月天極)."
달이 걸린 하늘을 부수고.
"혈혈세(血血世)."
천하, 아니 세상이 피로 물들지어니.
나는, 역수로 쥔 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 * *
털썩.
하늘이 붉다. 아니, 붉은 건 하늘이 아니라 시야가 붉게 물든 것이다.
피?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어지럽다. 전신에 흐르던 기력은 떨어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공격에 당했다.
천지를 뒤덮는 혈화의 향연은 자신을 덮쳤고, 모용훤은 쓰러졌다.
강하다.
적은 너무나도 강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볼 틈이 없을 정도로, 전력을 쏟아부어도 안되겠구나 싶을 정도로 강했다.
'여기서 뻗을 건가, 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장난스러운 기가 가득한, 하지만 근엄하고 중후한 목소리는 모용훤이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적성자.
'그냥 누워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뻗어있는게 자네의 참모습이 아니지 않나.'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언제가 제일 즐겁던가? 검을 들었을 때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검을 든 것 자체가 제일 즐겁지 않던가? 내가 아는 훤, 자네는 언제나 검을 들고 있을 때가 빛나던 남자지.'
내가?
'이대로 무너지지 마시게. 자네는 천하가, 그리고 내가 인정한 남자가 아닌가.'
적성자는 주먹을 내뻗었다.
'가서 보여주시게. 모용의 힘을. 천하제일검의 힘을.'
"아아, 그런가...."
천하제일은, 모용훤이다.
모용훤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 * *
"...하, 젠장."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검존을 보며 절로 한탄이 나왔다.
"이래서 정파 고수가 싫어."
어떻게 좀 이겨보는가 싶더니, 조금만 틈을 주면 바로 반격의 실마리를 잡는다.
깨달음.
이미 충분히 강한 존재가 또다시 깨달음을 얻어, 더욱이 강해지는 기이한 현상.
"그만큼 살았으면 이제 그만 깨달을 때가 안 됐나?"
"...적성자가 그러더이다."
검존은 상쾌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는게 사내새끼라고."
"...맞는 말이네."
"고맙소, 비천."
검존은 나를 색마가 아닌 비천이라고 불렀다.
"나는 빙색마인인데?"
"비천삼마로부터 들은게 있어서."
"......."
갑작스런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그 놈들이 왜 나오나 싶었지만, 요동 너머가 그들의 목적지기는 했다.
"빙색마인이 비천색마일 줄은 몰랐지만, 그건 이제 중요한 게 아니지. 자, 검을 들어라. 검사여."
"나는 모용란을, 네 후손을 범하려고 했다. 색마에게 화가 나지 않느냐?"
"이 정도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정도 색을 탐하는 거야 흠이 아니지. 그만큼 그 아이가 매력적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
어쩐지, 모용란을 범하겠다고 방방곡곡 알렸음에도 빙색마인인 나를 상대로 딱히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더라.
"제정신이 아니군."
"누가 할 소리."
검존의 상처는 이미 말끔히 회복되었다. 그의 눈은 더욱더 깊어졌고, 검세에 흔들림은 더 없었다.
"명경지수인가. 젠장, 왜 나랑 싸울 때 그런 걸 깨닫는 거냐."
"마음이 흔들리니 검이 흔들릴 뿐. 심지의 흔들림은 인정하고자 하지 않는 것의 부정에서 오는 것이니."
검존의 무형검은 이제 주변 공간조차 잠식하기 시작했다.
"인정하마. 아무리 천재라도,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는 법."
용안으로 아무리 검신을 훑으려해도, 검존의 무형검은 주변에 넓은 바람을 두른 것마냥 검신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도달했다면, 나 또한 그를 따르는 것이 강호의 도리. 나 또한, 검을 즐겨보리다."
"......하, 씨발."
그냥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적성자가 네 손에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오늘 검존이 검선보다 더 위라는 것을 증명해보이마."
검존은 실실 웃으며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검선을 죽인 너를 죽이면, 내가 검선보다 위라는 것이 증명되는 바!"
빈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숨이 턱 막히는 검세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논리적이라 반박할 수 없군."
검선이 죽이지 못한 자를 죽인다면, 검선보다 검존이 강한게 입증되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나는 역수로 찌른 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희아연월검, 혈혈세.
"아니, 죽일 수 있다."
검존은 나와 비슷한 검세로 기수식을 취했다.
"신검합일."
"......."
내가 신검합일을 한게 아니다. 저 놈이, 검존이 무형검을 들고 신검합일을 했다.
"...미치겠네."
이래서 정파인들이 진짜로 싫다. 다 죽어가는데 갑자기 다시 살아나 새로운 힘을 갖추지 않는가?
"몰라, 젠장."
될 대로 되라지. 혹시나 몰라서 보험은 들어놓았으니, 뒷 일은 이제 나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갑자기 검선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분명 아까전에 내공심법으로 운용한 자하신공의 내력이 내가 속삭인 것일 터.
'검선, 당신은 옳소.'
-그런데 이왕이면 현경인 여자가 더 좋지 않아요?
그리고 혈교주는 더 옳다.
'검존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으면 더 즐길 수 있을텐데.'
아쉬움은 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극한으로 즐기는 수밖에.
강자가, 약자를 꺾는 즐거움을.
"깨달음을 얻어 강해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검존은, 혈마보다 약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