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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존
현역 당시.
검존은 검선보다 강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한창 현역으로 날뛰던, 혈기왕성한 20대 청춘을 구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검존은 검선보다 강했다. 검선이 자하신공을 익히기 전, 검존은 이미 가문의 비전 검법인 적성환월검(赤星幻月劍)을 익혀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와 모용세가의 소가주.
두 사람의 차이는 명백했고, 모두가 검존을 천하삼검 중 으뜸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선"과 "존"이라는 별호를 받기 이전의 이야기.
지금은 어떨까. 현경에 올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초고수가 된 이 시점은?
"너와의 비무는 재미가 없구나."
나는 검존의 검을 흘려내며 계속 언검(言劍)으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말은 곧 칼이 되어 검존의 자존심을 공격했고, 몸에 흐르는 호신강기보다 더 쉽게 그를 깎아내렸다.
"검선의 생사결은, 이 몸을 두근거리게 했다!"
사실이었다.
"그런데 네놈은 무엇이냐!"
나는 호통을 쳤다. 검존은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나를 공격할 뿐이었고, 나는 수비에 전념하며 계속 언검을 찔렀다.
얼핏보면 내가 공세를 취하며 두드리는 것 같지만, 공세는 검존이 취하고 있다.
기본기가 탄탄? 역공이 뛰어나?
수세에 몰렸을 때 뛰어나다는 이야기. 즉, 공세는 수세만 못하다.
"이게 생사결이냐! 이게 비무냐! 네놈과는 검을 부딪히고 싶지도 않구나!"
카앙, 카앙!
"그럼 죽으시오!"
"네놈따위의 검에 죽을 수는 없지!"
나는 검존의 검을 계속 흘려냈다. 내가 아까전부터 느꼈던 감정을 검존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고, 나는 그의 인상이 찌그러질 때마다 쾌감이 터져나왔다.
"공격 한 번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자의 검에 어찌 죽을 수 있으랴!"
"이 놈!"
"꼬우면 칼침 놓아 보시든가!"
순간, 틈이 보였다. 나는 검존이 휘두르는 검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한손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어리석은 놈!"
하지만 그건 검존이 일부러 열어준 틈이었다. 검존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몸을 수평에 가깝게 뒤집었고, 나의 검은 허공을 찔렀다.
그리고 검존의 검은 내 목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순간 스친 검존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바로, 지금.
검존의 검이 정확히 내 목을 노리는 순간.
"빙백신장!"
나는 손바닥을 세워 내 목에 붙였다. 차가운 한기가 내 손바닥 전체를 덮었고, 검존의 검과 손바닥이 부딪혔다.
카가가강----!!
"뭣...?!"
"빙색마인이 허명인 줄 아느냐."
검존의 무형검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기는 점차 무형검 속으로 파고들듯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검존은 바닥에 한 발로 착지하며 몸을 계속 돌렸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막아보시오!"
검존은 돌기 시작했다. 나를 중심으로, 뛰어오른 관성을 모두 두 발에 싣고 검을 계속 휘두르기 시작했다.
"성륜참(星輪斬)!"
나라는 중심을 두고 원을 그리듯, 몸을 돌릴 때마다 검을 휘두르며 나를 깎아내렸다.
카앙, 카앙, 카앙!
하지만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 또한 검을 세워 막아냈다. 이미 용안은 무형검의 흔적을 진작에 좇고 있었고, 내 몸을 중심으로 퍼진 한기는 무형검이 날아오는 간격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하얀 안개를 가르고 날아오는 검날.
"한 바퀴!"
나는 검존의 마지막 일격을 튕겨내며 거리를 벌렸다. 검존과 나는 동시에 뒤로 뛰어오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식 이름은 네가 지은 것이냐? 그것 참 멋 없군."
나는 손바닥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처음 빙백신장으로 대응하며 검강을 정면에서 튕겨낸 손바닥에는 붉은 혈선이 새겨져 있었다.
"성륜참이라니, 너무 직관적이군. 검선의 초식은 풍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초식을 외치며 싸우는 걸 선호하지 않지만, 그를 만나서 생각이 바뀌었지."
나는 다시 파천신검의 검세를 취했다.
"그런데 너와 검을 나누니 생각을 다시 바꿔야겠구나. 현경급 고수들의 비무에 초식명을 외치는 건...너무 멋이 없어. 아니지, 그래, 그건가?"
검존이 묵묵부답일수록 나의 언검은 더욱 빛을 발했다.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내 언검이 그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본인을 능멸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소용없습니다!"
"능멸이라니, 있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한 것일 뿐."
혈겁난세의 전쟁 속에서 초식을 외치던 놈들은 모조리 죽었다. 초식을 외치다 파훼당하거나, 초식을 오치기 전에 살해당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에게 칼침을 놓는 자가 승리! 무공을 익히고 서로 합을 겨루는 낭만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시대를 살았기에, 초식을 외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 멋을 버릴 바에는 차라리 검을 꺾겠다.
"검선은 나의 시각을 바꿨다. 하지만 너는 뭐지?"
나는 일부러 검선과 비슷한 검세를 취했다. 화산파의 무공은 아니지만, 그가 나를 상대로 펼쳤던 검세를 몸으로 따라하며 검기를 일으켰다.
"평생동안 어디 은거한게 아니라, 썩어 문드러져가고 있던 건가? 검에 녹이 슨 것도 아니고, 그냥 검이 세월의 흐름에 삭아버렸군. 검존이라는 칭호가 아깝도다."
"이 놈!"
검존이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전히 그의 공세는 날카롭기는 하지만 확실한 일격이 부족했다.
"무형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힘이지.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크윽...!"
나는 검존이 휘두르는 검격을 정확히 받아쳤다. 목을 노리고 찔러오는 검은 검을 세워 비스듬히 튕겨내고, 검존과 똑같이 미끄러지듯 검을 앞으로 휘둘러 검존의 목을 노린다.
그러면 또 검존은 손목과 팔을 빙글 돌려 검을 흘려내기를 반복.
역공에, 역공에, 역공이 반복되었다. 먼저 지치는 쪽이, 먼저 집중력을 잃는 쪽이, 먼저 흔들리는 쪽이 지는 싸움.
우리의 검격은 마치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와도 같았다. 누가 먼저 말을 멈추게 하는 지, 누가 먼저 만장단애 아래로 떨어지기를 두려워하여 검을 거두는지에 따라 결판은 날 터.
"큭, 이 놈...!"
검존은 수십합 동안 이어진 살초의 교환에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슬쩍 뒤로 빠지려는 그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선은 어깨에 칼침을 맞고 내 목을 베려고 했는데."
"!!"
검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보인 틈을 노려 크게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정말...비루한 비무야."
"네 놈이...!"
검존은 수직으로 세운 검으로 내 공격을 막았다. 우리는 다시 거리가 떨어졌고, 나는 바닥을 두어번 치며 검선처럼 유유자적히 검존을 중심으로 걸었다.
"풍취가 없고, 흥이 없고, 몰개성하구나. 그저 검과 검을 나누는 거라면 비무장에 갈 일이지,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또 검선과 나를 비교할 생각입니까?"
검존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새로운 기수식을 취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검선이라고 불리기도 전에 제가 먼저 검존에 도달한 이유를. 천하삼검의 으뜸은 바로 이 모용훤이라는 것을!"
"그래, 그래. 으뜸이었지. 근데 그건 과거의 이야기고."
과거의 영광은 그저 한낱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그게 잊혀진 옛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현재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과거에 천하제일이든 뭐든 이름을 날렸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천하에 그 누가 천하제일검으로 검존을 뽑지?"
무림맹주, 고구마검 독고자영이다.
"그러니까 그냥 방해하지 말고 여기서 죽어라. 내가 오늘 서열 정리 확실하게 해주마."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검선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마. 천계에서 너는 검선의 후배가 될 것이다. ...아니지."
어디까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검선은 등선했는데, 너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 *
"검존...증조부께서 이곳에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모용세가.
모용곽과 만난 독고자영은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증조부께서는 가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가만히 계셨다는 겁니까?"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우리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이곳으로 왔소."
"압니다. 빙색마인이 예상 이상으로 더 빠르게 행동을 했다는 것 또한 압니다. 그런데...허어...."
모용곽은 붉어진 얼굴로 분을 삭였다. 세가가 무사 한 명에게 쑥대밭이 되었는데, 그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본 자에 대한 불만과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크흠."
제갈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화살을 검존에게로 돌린 독고자영의 언변에 눈을 지긋이 감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무림맹이 억울하게 욕을 먹는 것보다 검존을 탓하는 쪽이 더 무림맹에 좋았다.
모용세가의 고인(古人)이, 후손들이 위기에 처했는데, 심지어 가문의 적녀가 색마에게 범해질 상황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최소한 언질이라도 주셨으면...아니, 아예 찾아오지 않으셨으니...!"
부들부들.
"같은 핏줄이거늘...!"
모용곽의 분노는 색마가 아닌 검존을 향했다. 한숨을 돌린 독고자영은 셋의 눈앞에 놓인 선녀상으로 화제를 돌렸다.
"빙색마인은 이것 말고 다른 것은 남기지 않았소?"
"예...그렇습니다. 딸아이의 말로는 자신이 범해진 건지 아닌지도 긴가민가하다고 합니다. 남자에게 범해진 흔적이...전혀 없었습니다."
"허어.... 없기를 바라오."
독고자영은 슬픔에 찬 얼굴로 선녀상을 응시했다.
"부디 그래야 할진데...."
"........"
모용곽은 자신의 딸이 위험에 처했으나 차마 그걸로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제갈길만 하더라도 양녀 제갈선이 납치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독고자영은 아예 빙색마인에게 납치를 당해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결국 빙색마인은 어디로 간 건지 모르는 건가."
"아니오. 분명...검존께서 빙색마인을 쫓고 계실 것이오."
독고자영의 한탄에 모용곽은 반론했다.
"분명 그럴 것이오. 만약...그렇지 않으면...나는 증조부님을...."
모용곽은 이를 악물며, 이가 으스러질듯이 말을 토해냈다.
"그분을, 증조부님으로 모실 수 없을 지도 모르겠구려...."
패륜 선언!
그러나 독고자영도 제갈길도 모두 긍정했다. 딸이 색마에게 범해졌는데, 그걸 유유자적 구경만 하고 떠난 가문의 원로가 아무리 현경이라고 해도 눈에 차겠는가.
그러니 좋게 생각해야만 했다.
"빙색마인은...그럼 검존 님과 생사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소. 정황상 이곳에서 온전히 탈출한 뒤에...검존 선배님과 조우했을 터."
"필히, 그분은 이기실 겁니다. 빙색마인의 목을 잘라 오실 겁니다!"
모용곽은 울분을 토해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어딘가에서 그저 가만히 계시기만 한다면...그건 후손에 대해 너무하신 일이 아닙니까...!"
"모용 가주...."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검존께서는 그 때, 반드시 빙색마인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잡아보겠다고 말씀하셨소. 빙색마인이라는 자는...아무리 폭혈로 강해져봐야 자신의 아래라고 하셨소. 그도 그럴 것이."
독고자영은 굳건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당대 최강의 검객이셨으니!"
* * *
"본인이, 더 강하다!"
드디어 검존의 평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마음껏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검기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왔지. 지금까지는."
지금부터는 다시 내가 공세를 펼칠 차례.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방식으로 싸우는데도 진다?
"그런데 아니라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하늘의 문을 두드린 자와 어찌 같은 급에 서려고 하느냐."
아무리 태산이 높다(尊)고 한들, 하늘 위를 떠도는 신선(仙)보다 높으랴?
"보여주마."
검선이, 검존보다 더 강하다는 증거.
"희아연월, 자하지혈(紫霞之血)."
나의 검에, 적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한곳에 피가 극한으로 몰려 퍼렇게 질릴 정도로 검기의 색은 짙었고, 주변에는 짙은 혈향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환(幻), 산(散), 란(亂)."
내게는 검선의 무공은 없지만, 검선이 자하신검으로 추구하는 검의 묘리가 담겨져있다.
"검존."
나는 안개처럼 흩어지는 검기 속에서, 검존을 향해 검을 찔렀다.
"검으로, 꽃을 그려본 적이 있느냐?"
검기 끝에서, 혈화(血花)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작품후기]
적성자 바이러스 : 간지에 집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