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49화 (449/568)

--------------------

검존

나는 그의 인사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 반갑다고하면 화를 낼 것이오?"

"귀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도망치면 될 줄 알았더니, 갑자기 뒷덜미가 잡혔으니."

나와 청년은 거리고 나왔다. 나는 어디 사람의 눈이 띄지 않는 작은 공터면 족했으나, 청년은 아예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나야 그래주면 고맙지."

"그럼, 따라오십시오."

청년은 동쪽을 향해 달렸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신속. 강호의 여느 보법으로 이름 좀 날린다 싶은 자들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만큼 청년은 빨랐다.

"......."

약 2각 동안 달리기만 했고, 우리는 계곡 아래 펼쳐진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기연 얻기 딱 좋은 장소로군."

"공감합니다. 그리고...무덤이 되기에도 적절한 장소죠."

스릉.

청년은 허공에서 검을 뽑았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나는 용안을 통해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무형검(無形劍).... 정말, 이런 변수는 예고를 하고 튀어나왔으면 좋겠는데."

"이 정도로 날뛰시고 무사하기를 바라시는게 양심이 없는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그냥 여느 잡다한 문파도 아니고 팔대세가 중 하나를 건드렸는데, 당연히 누구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화산의 검선.

아미의 복호보살.

'빌어먹을 현경할당제.'

어쩐지 쉽게 넘어간다 싶더라. 나는 역체변용술을 모조리 풀고, 내 얼굴 위로 혹시나 몰라 준비한 가면을 덮었다.

"한 가지 질문. 왜 존대를 하는 거지?"

"선배님이 되실 분이니."

청년은 하늘을 향해 검을 겨눴다.

"먼저 하늘로 올라갈 분에게, 이 모용 모가 선배로서 대우해드리는 겁니다."

"......와, 이런 건방은 처음인데. 너 누구냐?"

"검존(劍尊)."

모용훤(募容萱).

"검선을 이긴 그 실력, 어디 한 번 봅시다. 비천."

"아니지, 그냥 비천이 아니지."

나는 전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색마다."

* * *

그 시각.

모용세가로 향하는 무림맹 추색살 본대는 두 명의 선발대를 두고 있었다.

"맹주, 정말 아무 일이 없을까요?"

"군사, 걱정마시게. 분명 막을 수 있을 것이야."

무림맹주 독고자영과 군사 제갈길.

둘은 요동에 얼음기둥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바로 무림맹을 뛰쳐나와 요동으로 달렸다.

"그대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내 발보다 빠른 자는 그대밖에 없지 않은가?"

"보법에 특화된 저와 다른 이들을 비교하시면...."

"하하, 겸손은. 그대가 만약 후삼국에 태어났다면 군신과 무후의 평을 동시에 받았을걸세."

"맹주님만 하겠습니까. 인중자영이라고 칭송을 받았겠지요."

"사람 참...."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금칠을 했다. 부끄럽다? 그럴 일도 없다.

둘은 그만큼 능력이 되는 사내들이었고, 실제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무림을 이끌어왔다.

새애액----!!

당장 주변에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광경은 두 사람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둘은 땅과 물 위를 직선으로 내달렸고, 둘이 지나가는 곳 주변에는 기파가 흩날려 풀들이 전부 바람에 눌릴 정도였다.

"모용세가는 나와 달라. 반드시 성공할 걸세."

"과연 빙색마인을 잡을 수 있을런지...."

"걱정마시게. 그분에게 진작에 도움을 요청했으니, 분명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주셨을게야."

독고자영은 확신했다.

"문파라면 모를까, 세가의 일이 아닌가? 분명 도와주러 오실 게야."

"저는 걱정됩니다. 워낙 자아가 강한 분이시니...."

"어허. 그분을 믿게. 천하삼검으로 불리셨던 분이야."

"...예. 화산의 검선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당대를 평정하신 분이지요. 검존 어르신은."

검존!

감히 검의 지존이라는 담대한 별호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그의 검은 빠르고 강하여 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았다.

구파일방에 검선이 있다면, 팔대세가에 검존이 있다.

둘은 당대를 양분하는 호적수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검선이 산 위에 오연히 홀로 서있는 고고한 학이라면, 검존은 드넓은 평야를 내달리는 늑대라고 하더라.

"하지만 과연 그분이 세간의 일에 관심을 가지실까요? 십상련의 일이 있었을 때도 방관하셨지 않습니까. 심지어 모용세가가 크게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 때는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이 그 날 추색살에 참가하겠다고 온 계기가 있지 않소?"

검선의 죽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무림맹주조차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현경 고수들이 확인한 결과, 검선은 사망했다. 화산의 정상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고, 그를 통해 사람들은 확신했다.

- 자하신검이...졌어?

검선은 누군가와 비무를 펼쳤고, 사망했다.

- 검선이? 누구한테? 검존이냐? 아닐텐데?

- 독선이나 다른 이들의 무공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패도적이군. 음...이건 검술이라고 보는 게 맞나?

- 검술이오. 하지만...이런 검기를 지닌 존재는 지금까지 없었는데?

그것이 다른 현경 고수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 천하는 넓구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초고수가 존재했다니!

생전 처음 보는 무공을 쓰는 존재와의 생사결 흔적이 가득하자, 천하를 등지고 은거하던 이들이 하나 둘 천하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검존 또한 마찬가지.

호적수의 죽음은 그에게 중원 땅에 다시 시선을 돌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오랜 은거를 깨고 모용세가에 자리 잡았다.

그 누구도 모르게.

오직 무림맹주만 아는, 당대의 모용세가 가주조차 모르는 극비사항이었다.

"천하를 등진 것도 아니고, 이제는 산에서 내려오셨으니 모용세가를 잘 지켜주실 것이다. 음, 그렇고 말고."

아무리 자신이 관심없는 색마에 관한 일이라고 한들, 최소한 가문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몸을 움직일 것이다.

"빙색마인이 진짜라고 한다면...분명 제압해주실 것이다."

무림맹주는 아쉬움을 토로할 뿐이었다.

"그 분이 죽이면 안 되는데...끙...."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제갈길의 근심을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검존이 빙색마인에게 패배할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 *

팔대세가는 저마다 무공에 큰 특징이 있다.

남궁은 호쾌하고, 팽가와 황보는 패도를 추구하며, 제갈은 지혜로운 검로를 좇는다.

그렇다면 모용세가는?

- 모용세가는 개성이 없죠.

혈교주는 말했다.

- 각지에서 모은 무공을 자신들의 것으로 모았기에, 딱히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없어요. 검의 성질을 여섯개로 나누고 등급을 나눈다면, 모용의 검은 분명 정육각형을 그리고 있겠죠.

여느 문파가 다 그렇지만, 모용세가는 특히 다양한 종류의 무술이 많았다. 검법, 도법, 권법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무공이 많았다.

- 평균 점수는 94점 정도로 높은데, 이상하게 100점은 하나도 없는 세가?

어느 분야로 특출나다고 한다면 단연 만병지왕인 '검'이나, 그마저도 다른 세가들에 조금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오직 검만을 숭상하며 검의 극의를 좇는 이들과 두루 섭렵하는 이들의 성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검을 다룸에 있어 으뜸인 존재가 생기기 마련.

모용훤.

그가 바로 모용세가에서 태어나 당대 모든 검객들을 꺾고 당당히 검존(劍尊)이라는 칭호를 차지한 존재였다.

비록 수십년도 전의 존재이나, 그가 현역 시절에 그 검선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이 있었던 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리라.

그리고 그는 모용세가의 검을 새롭게 발전시켰다고했다.

- 모용? 반(反)이다.

스승은 말했다.

- 모용은 극의에 다다르면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고, 검로를 뒤틀고, 공격을 역으로 뒤집어 자멸하게 만드는 검을 쓴다. 근본이 있고 내실이 있는 검법을 기본으로, 상대의 검을 뒤집어 자신의 공격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무당파의 태극권과는 그 묘리가 사뭇 다르다. 태극권은 흘려내는 것(流)를 추구한다면, 모용세가의 비전은 상대의 공격을 거스르는 것(逆)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더라.

- 뭐 그렇게 어렵게 말해요?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혈교주는 말했다.

- 기본기 쩔고, 역공 조심하라고.

'혈교주, 역시 당신이 옳소.'

카----앙!!

검강을 씌운 검이 튕겨나온다.

나는 내 목을 노리고 미끄러지는 내 검을 붙잡고 몸을 앞으로 쭉 당겨야했다.

왜?

검존이 자신의 검등을 손으로 밀며 미끄러지듯 내 검을 밀어버렸기 때문!

"흠."

검존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검을 튕겼다. 내 검은 다행히 허공을 향해 휘둘러지며 튕겨나갔고, 나는 거리를 벌리며 검세를 가다듬었다.

"고작 이것 뿐입니까?"

검존, 모용훤을 상대로 나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철저한 살검을 추구하는 파천신검에 근간을 둔 나는 좀처럼 모용훤의 검을 파훼하지 못했다.

"더 있지!"

다시 연격을 이어나간다. 안 되면 될 때까지 검을 휘두르면 그만!

"희아연월, 추사(錐射)!"

나는 검을 앞으로 내세워 마구 찔렀다. 모용훤은 그저 한 발을 뒤로 내딛으며 손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카앙, 카앙!

남들이 보기에는 허공에 손을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의 손에는 보이지 않는 검이 존재했다.

실제로 투명한 검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아무것도 없이 손에서 검강을 만들었을 뿐.

"아래입니다."

"위잖아!"

다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특징이었다.

"크으윽?!"

무형검이 내 목을 스칠뻔 했다. 나는 검을 수직으로 세워 검을 막았으나, 모용훤은 바로 검을 잡은 손을 뒤바꾸며 자세까지 바꿨다.

카가가강!

무형검이 내 검을 타고 내려온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비스듬히 세워졌고, 나는 무형검이 노리고 있는 어깨를 비틀며 검을 바깥으로 튕겨냈다.

"어딜!"

나는 아래로 내려간 검을 한손으로 잡고 정면으로 베어당겼다.

노리는 것은 모용훤의 목!

"유감."

모용훤은 검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쥐며 높이 세웠다.

푸--욱!

마치 통나무에 도끼가 박히듯, 무형검의 손잡이 부분에 검날이 박혔다.

"약합니다."

모용훤은 눈을 번뜩이며 무형검의 손잡이 아래를 손바닥으로 올려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위에서 가운데를 눌렀다.

검이 마치 작두처럼 아래로 내려찍혔다. 나의 검이 무형검의 지지대 역할을 했고, 무형검은 내 머리를 반으로 가를 것처럼 내려왔다.

"큭!!"

나는 검을 놓았다. 그리고 손등에 강기를 실어 검신을 쳐냈다.

"이건...?"

"만월경파장!!"

무형검을 밀어낸다. 넓게 펼친 손등에 실린 강기가 검날을 쳐냈다.

"큭...!"

나는 검을 튕겨내고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검을 놓쳤고, 또한 손등에는 피부가 긁힌 것처럼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수였습니다. 하지만 무의미합니다."

확실히 인정한다.

검존은 강하다.

기본기가 탄탄하여 빈틈이 없고, 역공이라는 수를 자신의 비전절기로 만든 실력 또한 일품이다.

'왜 사람들이 검선이랑 검존을 비교했는지 알겠어.'

자꾸 비교하기는 싫지만 상대하면할수록 검선과 대비되는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능에 노력이 받침이 되니, 그야말로 지존이라고 부르기에는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 하하…."

"어떻게, 항복하시겠습니까? 순순히 목을 내놓으면 단칼에 죽여드리겠습니다."

"되게 아니꼽기는 하네."

강하긴 강하고, 공격은 잘 통하지 않으니 몹시 화가 치민다.

"그렇게 존대하면 자존심 안 상하냐?"

"먼저 죽을 고인을 위한 애도라고 합시다."

"시건방진 놈. 나이고 나발이고 너는 양심 자체가 없는 놈이로구나. 백년 넘게 산 노인 주제에 나랑 비슷한 얼굴로 존댓말이나 찍찍 내뱉는다니!"

"불만있으면 검으로 답하십시오."

검존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기수식을 취했다.

"오지 않으면, 제가 먼저 갑니다. 모용의 검이 어떤 검인지 똑똑히 보시길."

"그래, 아주 모용의 검에 치가 떨리는 구나. 그런데...그거 아냐?"

나는 필살의 검을 꺼내들었다.

"나는 검선을 직접 상대했지. 그래, 내가 검선을 죽였다."

"......."

아직까지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내가 검선을 죽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그 검기가 귀하의 것이었습니까?"

"그렇다. 희아연월검. 나만의 독문무공이지."

내가 그를 상대로 펼친 검기가 화산 정상에 그대로 남아있었을테니.

"강고한 검기인 건 인정합니다. 검의 근본은 살(殺). 죽이기 위한 검을 극성으로 연마한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래. 검선을 죽인 검이 말한다."

자존심 강한 무림인이라면 견딜 수 없는,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최고의 일격.

"너, 검선보다 약하네."

"......뭐라?"

처음으로, 검존의 표정에 금이 갔다.

[작품후기]

선밑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