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44화 (44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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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는 여기에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남궁유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아…!"

남궁유린은 자신의 점수가 적힌 얼음 기둥을 보고 핏기가 가셨다.

"어, 어떡해…!"

손발이 오들오들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리봐도 자신의 옆에 세워진 얼음기둥은 자신을 범하고 난 색마가 남긴 얼음기둥이었다.

"설마…!"

남궁유린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빙색마인은 얼음기둥을 세워 여인에게 점수를 부여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만약 그것이 또 똑같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여기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아아…!!"

남궁유린은 풀썩 주저앉았다.

우려하던 일이 그만 생겨버리고 말았다. 남궁유린은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헉, 허윽, 흐억…."

먹은 것도 없는데 올리려니 신물이 흘러나왔다. 남궁유린은 눈에 눈물이 가득했고,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일어났다.

"검, 검…!"

남궁유린은 검을 찾았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검법으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곳을 향해 검을 세웠다.

"아아악!!"

남궁유린은 창궁무애검법을 마구 휘둘렀다. 초식은 의미가 없어지고, 그저 얼음기둥에 박힌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데 급급했다.

"허억, 허억…!"

남궁유린은 간신히 이름을 지워냈다. 아래에 적힌 점수나 그에 관한 문구는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피를 토하게 만드는 악의가 넘쳤다.

"입 닥치면 선녀라고…? 이 개새끼가…! 사람을 강간해놓고 뭐…?!"

남궁유린은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자신과 함께 비영진옥을 찾았던 무사가 도망쳤던 곳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찍으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 죄다, 싹다 복수하겠어! 도마든, 도망친 그 새끼든, 빙색마인이든!! 내가, 이 남궁유린이 다 죽여버리겠어!!"

남궁유린은 절규에 찬 목소리로 사방을 훑었다. 주변에는 아직 사지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산적들이 가득했다.

"이…!"

남궁유린은 산적을 향해 검을 겨눴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뎅겅 날아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 나쁜 새끼들."

퍼억.

남궁유린은 발을 들어올려 기절한 산적의 고간을 걷어찼다.

"너희들 때문에...흐끅,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데…. 흑…."

산적들이 습격하지만 않았으면, 조용하고 무난히 안휘로 돌아가 내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훌쩍, 내가 왜…. 아니야, 울지 않을 거야. 씁. 그래."

남궁유린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위태롭게 얼음판을 떠났다.

"의원님께...반드시, 이 상처를 치료해달라고...흐끅…!"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남궁유린은 비틀거리며 남쪽으로 떠났다.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그리고 얼마 뒤.

인근을 지나가고 있던 추색살 대원들은 높이 치솟은 얼음기둥 두 개를 보고 급히 무림맹에 신고했다.

-빙색마인이 나타났습니다!! 여인들의 점수가 새겨져있는 얼음기둥이 나왔습니다!

-뭐? 또 그냥 얼음판에다가 대충 적어놓은 가짜 아니야?

-의사...백이라고 적혀있었답니다!

-뭣이?!

한 명은 인근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산적이었고, 또 한 명은 불명.

-빨리 주변을 훑어! 찾아!

추색살은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급히 살폈다. 하지만 단서라고는 나오는게 많지 않았다.

-근데 뭐 이리 점수가 높아?

-입 닥치면 천상 선녀라고…?

-도대체 누구길래 진짜한테서 4점 이상이나 받은 거지…?

단서가 있다면, 이름이 훼손된 얼음기둥 뿐.

누군가가 범해진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누가 범해졌는지는 오리무중으로 남고 말았다.

* * *

"...천무명이라."

모용곽은 딸의 말에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녕 네가 한 말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느냐?"

"예, 그렇습니다."

모용란은 당당했다. 거짓말을 할 만큼 헛되게 지내지도 않았고, 자신의 수련을 증명해 줄 공신력있는 사람도 있었다.

"약 반 여년 간의 방황 후, 저는 서안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예, 검각주 왕소현 님을. 당시에 그분은 서안에서 색마들을 상대로 당당히 검을 들고 색마퇴치를 하고 계셨죠."

"알고 있다. 종남파가 그 덕을 엄청 많이 봤었지. 화산의 매화검수 둘과 비무를 펼쳤던 것도 알고 있다."

"예. 그리고 저는 그분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몸을 의탁하기로 했습니다. 색마를 상대로 검을 든 그분의 아래에서, 이름과 모습을 숨기고 검각의 제자로서 지냈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구나."

"예. 요동으로 올라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검각에서 계속 도를 수련했습니다. 만약...."

모용란은 함께 앉아있는 쌍둥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인이 그런 일이 있고난 이후, 소문을 듣고 올라왔습니다. 제가 가문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방계의 아이들을 소가주로 들인다는 것을."

"오라버니를 붙여라."

"인아.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해도 된다."

모용곽은 대놓고 모용인에게 면박을 줬다. 모용인은 입술을 깨물며 이를 갈았으나, 가문 내에서 이미 모용란과 모용인의 상황은 역전되었다.

강호에서 단 여섯 명뿐인 육봉.

6개월간의 강호 실전 경험.

그리고 검각에서의 수련과 검각주와의 긴밀한 관계.

여인과 하룻밤을 지내려다 가문에 수치를 준 모용인과 비교했을 때, 모용란의 삶은 소림의 승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네가 하북에서 추색살의 사람들을 찾은 것은 어찌된 것이냐."

"윽...!"

유일하게 모용란이 말하기를 꺼리던 부분이 있었다. 모용곽은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용란에게 물었다.

"진실을 말해주거라."

"......올라오던 도중에, 천 모라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모용란은 상세히 천 모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호오...."

모용곽은 눈에 이채를 띄며 딸의 제보에 귀를 기울였다.

"천무명 정도라면...음...."

"혹시...아십니까?"

"알다마다. 육봉이 있는 곳에 천무명이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지. 아니, 천무명이 가는 곳마다 육봉이 엮이지 않느냐. ...그걸 네가 입증했구나."

"윽...."

모용란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동시에 네가 가져온 정보는 너무나도 도움이 되는 정보이니라. 천무명이 독고 소저를 쫓고, 실은 그가 용봉지회에서 의술을 펼쳤던 그 청년이었다는 게지? 허어,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라.... 감동적이로군!"

쿵.

모용곽은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란아! 부끄러워하지마라! 사랑하는 정인을 위해 아미파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여인을 데리고 나온 남자다! 그런 남자에게 반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바, 반하다니요?! 저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예상했던 반응과 전혀 다른 모용곽의 반응에, 모용란은 오히려 자신이 당황하고 말았다.

"저는 당시에 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무명 정도의 실력자라면 골격만봐도 여자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을 터!"

"이런 모습인데도요?"

우둑, 우두둑.

"......음."

모용곽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 자, 남색은 아니지?"

"아버지!"

"허허, 농담이다. 흐음, 오히려 더 좋군. 내가 젊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래, 나도 중원을 여행을 할 때 서로 호형호제하던 이가 있었지. 뛰어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진 기본적인 마음이니라."

모용곽은 애틋한 표정으로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호랑이의 머리가 박제되어 걸려있었다.

"란아. 이 아비는 네가 천무명이라는 자가 마음에 드는구나. 그 정도 의지와 능력, 절박함이라면 응당 네 짝으로 마땅할 터."

"...아버님, 혹시."

"란아. 나는 남색이 아니다. 정말 형으로서 모시고 싶었던, 그런 의협이니라."

"아뇨. 아버님께서는...."

모용란은 굳은 얼굴로, 자신보다 더 창백해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모용인을 가리켰다.

"천무명과 저를 좋은 관계로 만들어...모용세가를 그에게 잇게 하고자 하시는 건...제 기우입니까?"

"........"

모용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주군, 이건 무엇입니까?"

"취해라. 오다 주웠다."

나는 왕소현에게 내가 얻은 비영진옥을 건넸다.

"음기가 상대적으로 많은 영약이니 주의하거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왕소현은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튼 뒤, 겹쳐놓은 손바닥 위에 비영진옥을 올렸다.

고오오.

그녀를 중심으로 천마신공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이 점차 내단을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고, 내단의 기운이 왕소현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음?"

순간, 나는 왕소현의 몸 주변에서 금빛의 가루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는 것을 보았다.

"...호오."

'금빛'은 천마신교에서,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어떤 신호였다.

'경지에 이르렀구나.'

현경에 이르렀다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유의미한 신호다.

'탈모의 진행을 거의 억누르는 경지에 이르렀어."

천마신공을 익히는 모든 이들의 부작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

왕소현은 비록 부작용이 다른 방향으로 나와서 미관상 더 보기 좋았지만, 그래도 탈모가 진행되는 것 자체는 어느정도 사실이었다.

고오오----!!

이제 왕소현의 머리칼은 평범한 여인들과 비슷해진 정도.

나는 왕소현의 운기조식에 호법을 서며, 왕소현의 몸에 깃드는 내단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강호는 정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 구나.'

만약 산적들이나 내가 습격을 하지 않았다면, 남궁유린은 어떻게 되었을까.

'약에 취해서 수면간 당했으려나?'

분명 어깨에 도끼가 박힌 놈에게 범해지지 않았을까?

'모용란 덕분에 요동에 왔더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

요동은 임무 때문에라도 온 적이 없던 곳이다. 그만큼 내게 인연이 없던 곳이라, 여러모로 다양한 일이 생기니 조금 감회가 새롭기는 했다.

모용세가.

혈겁난세에서도 천하 30대 고수를 배출한 세가다.

당시의 가주는 아마 지금 성추문으로 소가주 자리를 위협받던 모용인으로 기억한다.

모용란은 미래에서 그냥 평범한 세가의 강자 정도 수준이었다.

혈겁난세의 무공 수위로 따지면, 화산파 선주희와 비슷한 수위.

현재는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 확실한 건 있다.

'더 잘 자라겠지.'

내가 그녀의 처녀를 취한 기념으로, 나는 그녀의 몸에 모용세가의 내공심법을 쉽게 운용할 수 있도록 기를 불어넣었다.

한 마디로, 안에 쌌다.

정자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녀의 처녀와 내공을 채음했으니 나의 양기를 주는 것은 등가교환과도 같은 일이었다.

"남궁, 모용…. 씁, 아깝긴 하네."

"팔대세가의 여식들을 진가장으로 들이지 못한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왕소현의 말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무슨 말이냐?"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여인들을 모두 진가장으로 들인다면, 최소한 백도 무림 전체의 8할은 주군을 질시 할 겁니다."

"...저, 전체는 아니지 않느냐. 꼭 각 문파에서 한 명씩 내 옆에 두겠다는 것도 아니고."

"후후, 그래도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여식들을 색마로서 들이기는 힘드시겠죠. 풍문을 퍼뜨리고 오는 동안, 또다른 풍문을 바로 들었습니다."

왕소현은 표정을 굳혔다.

"빙색마인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말과 함께,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 직접 나를 붙잡으러 오는 것일 터."

의사백의 복수대상, 무림맹주 독고자영은 미친듯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으리라.

나, 빙색마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럼 무림맹에서 도착하기 전에 기둥 좀 세워볼까?"

시간은 이제 슬슬 늦은 밤.

나는 남궁유린을 통해 파악한 사람들의 인식을 다시금 생각하며, 나의 계획을 읊었다.

"오늘 밤, 모용란을 범한다."

단, 진짜로 범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둥만 세워두고 도망칠 뿐.

이미 남궁유린을 통해 입증된 '얼음기둥'으로 인한 여론은 많은 이들의 인식에 뿌리가 박히게 되었다.

아.

얼음기둥이 세워져 있다면, 그건 정말로 빙색마인이 다녀간 곳이구나.

그러므로.

내일 밤.

나는 모용세가의 한가운데에 얼음기둥을 하나 세울 것이다.

"빙색마인이 자기것이라고 기둥을 박아버리면, 누구도 감히 모용란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빙색마인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한 모용란에 대한 배려이리라.

"그래서 진가장으로 들이려고 지금 수 쓰는 거지요?"

"...범한 남자가 책임지는 건 강호의 상식 아닌가?"

책임과 상식은 어쩔 수 없지.

[작품후기]

이 새끼 점점 사람 새끼가 아니게 되네요

원래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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