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442화 (44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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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는 여기에

저벅, 저벅.

하얀 무복을 차려입은 무사들이 하북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은 머리에 녹색의 끈을 두르고 있었고, 등에 당당히 박아넣은 세가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알리고 있었다.

모용.

요동의 맹주, 모용세가 무사들의 등장에 하북의 사람들은 무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용세가가 하북에 왜 왔는가?

"저기 모용세가에서 하북팽가 방문하는 건가?"

"마차 안이...비어있는데?"

"그럼 뭐야?"

혹시 누가 하북팽가를 방문하는가 싶었으나, 무사들은 누군가를 호위하는 모습이 없었다.

"마차는 안에 모셔가려고 하는 거 아닌가?"

"누구를? 모용에서 팽가의 사람을? 그건 아니지."

오히려 누군가를 '호위하기 위해' 하북으로 가는 모양새였다.

"저 사람들은 왜 이 시국에 하북에 온 거지? 용봉지회 때 빌릴 객잔을 수배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 이 사람아. 소식이 이렇게 늦어서야 되겠나?"

"무슨 소식?"

"연희봉 모용란이 하북에 도착했다더군!"

"뭐…?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던 여자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던 연희봉의 등장!

이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이며 연희봉의 등장을 환대하기도 하고, 또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잘 숨어있었던 건가? 갑자기 왜 나와?"

"나야 모르지! 빙색마인에게 당한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건지, 아니면 진짜로 지금까지 숨어있다가 나타난 건지 내가 어찌 알겠나. 다만 한 가지 그럴 듯한 말은 있더군."

"뭔가?"

"...그녀가 하북 추색살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사람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모용란...남자랑 같이 지냈던 모양이야!"

"그건 좀 실망인데."

"근데 남자가 색녀에게 겁간을 당한 듯 한 모양이야! 모용란이 보는 앞에서 색마가 남자를 강간한 게지!"

"......모용란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군."

모용란은 알고 지내던 남자를 여자 색마에 의해 빼앗겼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상상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우야."

성별을 뒤집어서 생각하는 순간, 많은 무인들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찌 그런 일이….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충격이 많이 컸나봐. 하북에 있는 추색살 지부에서 잠시 안정을 취하고 있다더군."

"쯧쯧즛…. 젋은 나이에 안타깝구려. 연희봉이 누군가의 참한 아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강호인들은 육봉을 상대로 그렇고 그런 생각을 대부분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육봉을 취했다면, 그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경향은 있어도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는다.

결국, 육봉이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은 좋은 세가의 남자나 무인과 결혼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연희봉은 그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남자를 찾아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색마의 습격 때문에 망가졌고, 그녀는 이제 모용세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혹시 저 사람이 모용란인가? 으으, 완전히 사람이 넋이 나갔어. 모용세가에서 무사들이 왔는데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지를 못하고 있군."

"남자로 치면 자기 마누라가 딴 새끼한테 겁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니…. 쯧쯧, 겁탈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만약 간살이라고 한다면…."

"쉿. 말을 조심하시게."

"...그래도 사실 아닌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모용란을 위로하며, 한 편으로는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모용란이 색마에게 빼앗긴 남자는 누구지?"

"그보다 그 남자랑은 무슨 관계고?"

"혹시...벌써 볼 장 다 봤다거나 그런 사이 아닌가?"

연희봉 모용란의 등장에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모용란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질수록, 그녀의 쌍둥이이자 모용세가 소가주의 상황과 비교하며 혀를 찼다.

"아이고…. 오빠라는 놈은 여자랑 어떻게 해보려다가 꽃뱀에게 물려서 큰 낭패를 보았는데, 여동생은 정인을 색마에게 잃어버리고 말았군."

"...색마가 여자야, 아니면 남자야?"

"이 인간이? 아니, 큰일날 소리 하지 마시오. 당연히 여자...겠지?"

알려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아는 모용란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본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모용란이 어쩌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는지 그 이유와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약 사흘 흘러.

모용세가의 호위무사들은 모용란과 함께 무사히 요동에 도착했다.

이미 모용란의 이름이 강호에 넓게 퍼지는 바람에 호위무사들의 귀환길은 극비작전을 방불케 했고, 호위무사들은 무사히 모용란을 요동땅에 다시 발을 들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명백히 걱정하던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 * *

"아가씨, 마음을 굳게 다잡으셔요. 아가씨까지 무너지면 모용세가가…."

"괜찮다."

모용란은 마차 맞은 편에 앉은 호위무사를 향해 옅게 웃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하겠느냐."

"아가씨…."

모용란의 표정은 더할 나위없이 애처로웠다. 너무나 많이 지쳐 더이상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보일 정도였다.

"아가씨, 혹시 빙색마인에 대한 것이라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은거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생각했던 일이니. 평생동안 숨어지낼 수도 없는 노릇아니더냐. 후후."

모용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모용세가의 마차를 보며 저마다 이야기를 하는게, 분명 모용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터.

과연 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이봉결정전 이후.

빙색마인의 마수를 피해 혼자서 숨어있던 그녀가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에 대해 다들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있을 터.

그리고 그건 일반인들만이 아니었다.

"아가씨...혹시…."

"도착하면."

모용세가의 사람들도, 그리고 무림맹의 사람들도 모용란의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도착하면 알려주도록 하마."

모용란은 드디어, 3년 동안

떠났던 집에 도착했다. 아무 말 없이 출가했던 가문은 예상과 달리 따스하게 대하거나 차갑게 대하거나 하지 않았다.

침묵.

모용세가에는 마치 암운이 드리운 것처럼 분위기가 무거웠다. 모용란은 마차에서 내려 모용세가의 정문에 발을 디뎠다.

"왔느냐."

정문 바로 앞에는 중년의 사내가 수척해진 얼굴로 서있었다. 모용란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다소곳이 인사했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불효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네가 너 스스로를 지키고자 떠난 것을 내가 어찌 탓할 수 있겠느냐. 내가, 가문이 너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사과해야지."

남자,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곽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혹시 너의 성취가 벌써...?"

"응익도법(鷹翼刀法)은 전부 익혔습니다. 무공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벗이 있어, 완연한 절정 고수가 되었습니다."

"음...!"

모용곽의 침음성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모용곽은 바로 고개를 돌려 이를 갈았다.

"인아."

"...죄송합니다, 아버님."

모용곽과 닮은 청년, 모용인은 음울한 눈으로 모용란을 째려보았다.

"......."

모용란은 그를 보자마자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같은 남자지만,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꾸나. 그래. 이제는...."

모용곽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너를, 이제는 모용세가가 지킬 것이다."

* * *

"이곳이 요동인가."

"...상당히 멀리까지 왔습니다."

나는 왕소현과 함께 요동에 도착했다. 그녀는 호북에서 상당히 멀리 온 것에 몹시 어색했다.

"이곳까지 온 건 처음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일생의 반을 중원 내부에서, 그리고 나머지 생을 전부 천산에서 살았으니까요."

"하긴. 중원 땅이 원체 넓어야지."

우리는 모용세가의 근처에 있는 객잔에 들어가 방을 빌렸다.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고, 창 너머 모용세가의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안력소모가 심하군. 실시간으로 확인은 할 수 없겠어."

내부 상황에 대하여 멀리서 염탐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세가 내부의 건물 배치가 교묘하여, 도저히 눈으로는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정면돌파나 다른 방법이 필요한 건가…."

"상공, 슬슬 말씀해주십시오.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응?"

나는 왕소현의 굳은 얼굴에 고개가 절로 갸웃했다.

"모용란을 범하러 왔지."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주군께서...실연의 상처를 입은 여인을 범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 감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를 심검으로 품어주셨던 주군께서는...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처녀를 취한 여인을 그렇게 악독하게 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새삼스럽지만 왕소현의 사람보는 눈은 제법 정확했다.

"맞다. 나는 직접 모용란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럼 어떻게 범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천무명이 살아돌아온 것처럼 꾸미실 겁니까? 아니면 빙색마인으로서 몰래 야밤에 취할 것입니까? 그도 아니면...그 말로만 듣던 추대광의 모습으로…?"

"그럴 일은 전혀 없으니 안심해라!!"

변신은 하지 않는다. 역체변용술로 색마가 되어 모용란을 강제로 취하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되지 않는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간단하다. 이번 일은 모용란으로 끝날 일이 아니므로, 최대한 많이 시선을 끌어야하기 때문이지."

모든 것은 중간 과정이 있는 법이며, 모용란은 천무명의 화려한 등장을 위한 발판이 되어줘야했다.

"내가 남궁유린같은 악녀라면 모를까, 열심히 노력하는 애를 울리고 겁간할 수는 없지. 소현아, 우선 네가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하오문에 들려 소문을 퍼뜨리거라. 빙색마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나는 실제로 몇몇을 범하고 오마."

사르르.

빙백신공을 극성으로 일으키자,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렸다. 다행히 혈마 강림으로 적발 한 가닥은 흘러내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

"왜 그러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발에 천마신공까지 운용하고 계시니...꼭 설라와 비슷한 듯 하여."

"원래 이 힘이 설라네 힘이기도 하지. 북해빙궁의 힘을 색마짓을 하는데 쓰는 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그래도 뭐 이게 제일 확실하니까."

나는 창틀에 올라 왕소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마. 혹시나 중간에 좋은 영약 있으면 챙겨오도록 하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주군. 오시면...그."

왕소현은 슬며시 침대를 가리켰다.

"제가 하북에서 저지른 무례에 대한 별을 달게 받겠습니다."

침대는 하나였다. 나는 왕소현을 향해 가벼이 눈을 찡긋인 뒤, 바로 우리가 모용란을 쫓아 온 길을 따라 거꾸로 달렸다.

"여자는...여자는...흠…."

양심의 가책이 드는 만큼, 최대한 악독한 여자 위주로. 나는 하늘을 달리며 지상의 이상을 쭉 훑었다.

"...찾았다."

하북에서 요동으로 넘어오는 곳.

작은 소도시에 두 남녀가 산적들에게 포위되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네?"

한 명의 남자는 누군지 모르겠고, 다른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여자였다.

"꺼져, 개새끼들아!!"

입부터 험하다. 표정부터 아주 악독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목청이 좋으면 분명 어디 가서도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좋을 터.

"남궁유린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자 적녀, 남궁유린.

미래에는 위루화라는 별호로 선루필승도를 이끄는 꽃뱀의 대표주자가 산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남자 놈은 관심없고.'

고작해야 일류 수준으로 보이는 남자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둘을 포위한 산적들 중 우두머리는 놀랍게도 여자였다.

"아하하하! 나 강정이 말한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영진옥(泌榮眞鈺)을 내어놓거라!"

'비영진옥?'

그게 뭐더라. 너무 오래전에 들었던 것이라 잠시 기억을 떠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아."

기억났다.

"제법 좋은 거였는데."

만년설삼이나 선혈구와 같은 특급 물건들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정도라고 할 수 있는 비영(泌榮)이라는 생물의 내단이었다.

공력을 쌓아봐야 수 년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구할래야 쉽게 구할 수도 없는 나름 좋은 영약. 적당히 비싼 내단이었고, 그걸 두고 두 남녀와 산적들이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큭…! 결코 그럴 수 없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얘들아, 남자도 제압하고 여자도 제압해라!"

"오."

나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 좋은 먹잇감이 여기있군."

우둑, 우두둑.

나는 몸을 바꿨다.

역체변용술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다짐?

'내 여자들을 상대로 쓰지 않겠다.'

는 마음가짐일 뿐.

'저런 애들 범하는 건 빙색마인이 최고지.'

빙색마인은 지금부터 여인들을 범해야한다.

빙색마인을 죽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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