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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란, 탈주
아침이 되었다.
모용란은 여느 때보다 활기찬 아침을 맞이했고, 깊게 잠들었다.
진가장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몸 안에 생기가 가득 차있는 듯한 느낌.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며, 설령 자신을 노리는 색마가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긴 듯 했다.
자신에게 변화가 있다면 하나 뿐.
"아...."
맞은 편 침대는 비어있었다. 모용란은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작은 서찰을 펼쳤다.
[용 형, 이 천 모는 잠시 일이 있어 먼저 가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용 형까지 위험에 빠뜨릴 것 같구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오늘...?"
모용란은 사색이 되었다.
"벌써 날이 지났...아, 안 돼...!"
모용란은 급히 옷을 챙겨입었다. 어제 벗어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그녀는 변장한 옷차림 그대로 객잔을 빠져나왔다.
"혹시 이런 무사를 본 적이 없으시오?!"
"검은 갓...? 아, 그 청년 말인가? 간밤에 여기 저기 드나들며 정보를 찾아다니더군. 개방으로 갔던가...?"
"고맙소!"
모용란은 천무명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찾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니, 모용란은 천무명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강호에 정보하면 크게 두 가지 단체가 있다.
하나는 개방이요, 또 하나는 하오문이다.
"뭐...? 알고 싶은 정보가 있어? 그럼 돈을 내놔."
"여기 있소."
"검은 갓을 쓴 청년이라.... 흠, 것 참. 혹시 누가 자신을 쫓아오거든 알려주지 말라고 언질을 했는데...."
"은자 하나 더 주겠소!"
"이것 참.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되오! 크흠, 하북에 팽가가 요즘 식객을 많이 찾는다고 하더이다."
"팽가! 고맙소!"
정보를 얻은 모용란은 급히 말을 빌려 대로를 달렸다. 딱히 말이나 마차를 빌렸다는 말은 없으니, 그는 분명 대로를 걸어가고 있을 터.
"이랴!"
모용란은 왜 자신이 천무명을 찾아 나서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무명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인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용란은 천무명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는 이대로 둔다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보였다. 당장 그를 노리는 여자색마도 제대로 쫓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냐,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모용란은 스스로를 되뇌였다.
"빙색마인에 관한 정보를...나도 알아야 해."
자신이 천무명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것 하나 뿐이다. 결코 다른 이유는 없다. 없어야 한다.
그래서 급히 하북으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혹시나 그를 찾는다면, 자신 또한 빙색마인과 관련된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하지? 모용란임을 밝힐까? 하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모용란은 커녕 쌍둥이인 모용인과 흡사한데? 아니면 모용세가의 일원이라고만 밝힐까?
모용란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그녀는 어느덧 대나무숲에 이르렀다.
"워, 워."
느낌이 좋지 않다. 그녀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돌렸다.
"누구냐!"
"흐흐, 그것참. 기감 하나는 뛰어나구나!"
모용란의 뒤로 호피를 두른 무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무기를 빼어들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아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큭...! 네놈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도적질을...."
"도적질을 안전하다고 하겠느냐?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하는 거지! 우리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장사가 안 되는 걸 어떡해?!"
모용란을 향해 검을 겨눈 사내는 적반하장으로 성을 냈다.
"색마들이 하도 날뛰니까 사람들이 여행을 안 하잖아?! 우리같은 놈들이 땅파먹고 장사하나? 응?!"
"네놈, 설마...?"
"흐흐, 굶어죽기 직전인데 칼 좀 깨나 쓰는 것처럼 보이는 귀공자님이고 나발이고 뭐가 중요하겠어. 우리가 양심상 속옷은 남겨드릴게."
"네 말과 칼과 옷을 내놓아라!!"
산적들은 일제히 모용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용란은 바로 말의 안장을 짚고 몸을 일으킨 다음, 말에서 뛰어내리며 칼을 뽑아들었다.
"이 놈들! 부끄러운줄 알아라!"
모용란은 힘차게 외치며 칼을 휘둘렀다. 정체를 숨긴다는 생각은 나중의 문제였고, 그녀는 우선 초식을 쓰든 말든 적들을 물리쳐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큭…!"
하지만 모용란의 주변을 포위한 녹림의 무리들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조심해라! 절정 고수다!"
"녹조원진을 펼쳐라! 놈에게 밧줄을 걸어!"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한 고수를 사로잡는데 상당히 숙달된 모습을 보였다. 모용란은 자신의 손목에 걸린 밧줄에 아차싶었다.
"큭…!"
아직, 그녀는 경험이 부족했다. 아무리 검각에서 여러 실전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강호를 주유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풀어야 하나, 풀지 말아야하나. 모용란이 고민을 끝내며 남은 손을 가슴 위로 올린 순간-
"희아연월---!!"
자신의 검법을 쩌렁쩌렁 외치며, 흑발의 남자가 검을 크게 휘두르며 나타났다.
"월현참!"
서걱!
청년, 천무명의 검이 모용란의 손목을 붙잡은 밧줄을 순식간에 잘라냈다.
"천 형!"
"이야기는 나중에!"
천무명은 모용란을 지키듯 등을 맞대고 섰다. 모용란은 자세를 다잡고 녹림의 무리를 향해 칼을 다시 겨눴다.
"어떻게…?"
"뒤에서 말 한 마리가 급히 달려오더이다. 그래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싶어 와봤소. 오기를...잘했군."
"...고맙소, 천 형."
"쫑알쫑알 아주 시끄럽구나!"
산적은 광소를 터뜨리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오냐! 오늘 너희 둘을 붙잡아 거세를 한 다음, 어디 남색 좀 즐긴다하는 유력자 분들께 선물로 바쳐주마!"
"사람을 물건 취급하다니, 불쾌하군."
천무명이 검을 겨누며 내기를 퍼뜨리자, 산적들은 하나 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크윽…!"
"저 검기...분명...소문의 그 놈이다!"
산적들은 당황했다. 생각보다 더 강대한 검기에 놀랐고, 검기의 정체를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설마...희아연월검?!"
"...정체를 안 이상 살려줄 수는 없다."
"잠깐만!"
천무명이 검을 들고 살기를 내비치자, 모용란은 천무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천 형!"
"저들은 녹림의 무리이며, 사람을 물건처럼 다루는 자들이오. 그런데 어찌 막는 것이오?"
"사람을 죽이면 은원이 생깁니다!"
"은원은 이미 많이 쌓일대로 쌓였소. 그리고 만약 내 행동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쌓을 은원을 내가 쌓는다고 한다면...."
천무명의 눈은 확고한 의지로 가득차있었다.
"내가, 그 모든 은원을 가져가겠소."
"천 형...!"
모용란과 천무명이 대치하는 사이, 산적들은 급히 몸을 내빼며 도망쳤다. 천무명은 한숨과 함께 검을 회수했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르시군, 용 형. 나도 한 때는 그랬지. 나를 향해 검을 드는 이들을 상대로 검을 거두었던 적이 있었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천무명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
"내가 머물렀던 객잔이...불에 타버렸다오. 아주, 활활."
"그런...."
"녹림의 무리에 대한 판단을 상식과 이성으로 하지는 마시오. 저들은 비이성적인 존재이며,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금전의 괴물들이오."
천무명은 몸을 돌려 떠나려했다. 모용란은 급히 천무명에게 달려가 그의 뒤를 붙잡았다.
"천 형! 나도 함께 가겠소!"
"...그대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잖소."
단순히 하북과 요동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다.
"나의 길은 피로 물든 길이오. 수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고자 했지.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할 수는 없었소. 다들 위험에 처하고, 다들...."
"저는 다를 겁니다, 천 형."
"아니오, 다를 바가 없소. 용 형은...."
천무명은 짙은 살기를 내비치며 으르렁거렸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소?"
"......."
살인에 대한 경험을 묻는다면, 모용란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무공을 숱하게 익혀왔으나, 모용란은 그 어떤 사람도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자도 있었다.
죽이려고 했던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들은 다른 이가 죽였다.
- 모용란, 너는 살인자보다 금지옥엽이 더 어울려.
벗, 방윤은 모용란 대신 야우오협을 일거에 죽여버렸다. 모용란의 약함에 대해 알고, 방윤은 자신이 사람을 직접 죽였다.
"나의 길은 살생이 넘치는 길이오. 용 형의 마음은 고마우나, 나는-"
"저는!!"
모용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또한 빙색마인에게 악연이 있는 자입니다."
"......뭐?"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모용안. 모용세가 방계의 남자입니다."
"......이런."
천무명은 표정을 굳혔다.
"팔대세가의 사람이었다니.... 아니, 그런데 그런 분이 왜...?"
"분이라니, 말씀을 낮추십시오. 저는 지금 팔대세가의 사람이 아니라, 천 형과 마찬가지로 빙색마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강호를 떠돌고 있던 자입니다."
"어째서? 모용세가는...아."
천무명은 손가락을 튕겼다.
"연희봉!"
"예, 그렇습니다. 모용세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빙색마인을 대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연희봉은 가문의 밖으로 사라졌죠. ...모용세가는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
천무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보라는 신호에 모용란은 입에 침을 바르고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출가한 게 아니라...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와백봉의 경우처럼 제갈세가의 분가에서 보호하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아니었습니다. 지금...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녀를 찾고자 하는 겁니다."
모용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용세가의 후계 문제가 크게 흔들려, 큰 낭패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저는 생각했습니다. 혹시, 빙색마인이 연희봉을 납치한 게 아닐까 하고."
"용 형...."
"천 형. 발목은 잡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빙색마인에 관한 정보를 함께 찾지 않겠습니까?"
모용란은 진심으로 절박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천 형."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어폐가 있소. 모용 형은 인정이 많아서 그렇지, 그들을 충분히 도륙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니."
천무명은 모용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오, 모용 형."
"그것보다는...아까처럼 용 형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니, 제가 아우가 되겠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천무명은 단번에 말을 놓았다.
"...가세, 안."
"감사합니다, 천 형."
* * *
'이게 나를 팔아?'
울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모른척 걸었다.
빙색마인이 모용란을 납치했다!
그런 적 없다.
모용란을 범한 적은 있어도, 모용란을 납치한 적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본인이 색마의 소굴로 기어들어오게 되었던 만큼, 나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경우가 아니겠는가?
"안. 잠시 이곳에서 노숙을 하도록 하지."
"노, 노숙...?"
"객잔까지 거리가 상당히 머니, 잠시 바람을 피할 동굴을 찾아보겠소."
나는 바로 거리를 벌렸다. 이미 주변에 동굴은 하나 찾아뒀지만, 일부러 모용란을 떨어뜨린 건 누군가와 접선하기 위함이다.
"그 사이에 외투를 구했군."
"버, 벗으면 되겠습니까...?"
동자살의를 입었던 왕소현은 위에 깃털로 된 외투를 두른 채 나를 맞이했다.
"그건 어디서 구했나?"
"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더냐."
"노, 농담처럼 들리시겠지만 진짜입니다. 갑자기...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커다란 까마귀가 막 하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을 뿐, 뭔가 특별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됐다. 어차피 내가 눈요기하려고 했던 것이니. 그보다 슬슬 작전을 시작해야할 것 같구나."
"예.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것대로."
나는 왕소현에게 미리 준비한 작전의 개요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왕소현은 종이를 받아들고 얼굴을 붉혔다.
"저,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겁니까?"
"그러면 네가 해야지. 지금 여기에 색마부인이 너 말고 다른 이가 또 있더냐?"
"으으으...."
팽가에 도착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한다.
"나는 적당히 둘러두겠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성공하여야한다."
자고로.
남장여자는 남장이 들켜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모용안을 벗겨라."
오늘밤, 현검마망이 모용안을 덮칠 것이다.